제분사 “가격 인상 요인 많아 구매 타이밍도 못잡아”…식품업계 “상황 예측불허, 예의주시 중”
3월 17일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에 따르면 밀 가격은 부셀(약 27kg)당 10.98달러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72.4% 상승했다. 지난 1월 호주와 아르헨티나에서 공급량이 증가하면서 하락했던 밀 가격이 이처럼 오른 주된 이유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밀의 핵심 생산국이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가을밀 수확과 봄밀 파종에 제동이 걸린 우크라이나 정부는 식량 확보를 위해 밀과 옥수수, 곡물, 소금 등 주요 농산물 수출을 금지했다. 앞서 곡물수출할당제를 도입했던 러시아는 3월 15일 부분 금지령을 걸어 곡물 수출에 대한 추가 제한을 발표했다.
문제는 전쟁 여파로 식량난을 우려한 주요 밀 생산국들도 밀을 비롯한 각종 곡물 수출을 걸어잠그고 있다는 점이다. 인접국인 헝가리 농무부는 3월 4일(현지시간) 모든 곡물 수출을 즉각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전 세계 주요 밀 수출국 중 하나인 터키 정부도 곡물 수출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밀 수입의 60%를 러시아에서 얻고 있는 이집트도 밀과 밀가루와 콩 등의 수출을 금지했고 아르헨티나도 자국 내 식량 수급 안정화를 위해 밀과 옥수수 등의 반출을 통제할 방침이다. 전세계적으로 공급이 말라붙자 밀 가격이 전례 없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주요 수출국에서 밀 수출을 동결한 가운데 2020년 기준 세계 2위의 밀 수출국인 미국의 작황 감소 역시 가격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글로벌 농작물 데이터 전문 기업 그로인텔리전스(Gro Intelligence)는 미국 최대 밀 생산지인 캔자스 주의 겨울 밀 재배 지역은 현재 ‘심각한’ 수준의 가뭄을 겪고 있고 텍사스 주는 ‘극단적인’ 수준의 가뭄을 겪고 있다며 전년에 비해 생산량이 대폭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악재가 계속되자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발표한 2월 세계식량가격지수(FFPI)도 140.7로 치솟았다. 1996년 관련 집계를 시작한 이래 사상 최고치다.
국제 밀 가격의 가파른 상승으로 국내 업체들도 긴장하고 있다. 지난 2021년 10월 국회예산정책처가 발간한 ‘곡물 수급안정 사업 정책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밀 자급률은 1% 미만 수준이며 수입 물량의 80%를 미국과 호주,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다. 공공비축한 밀의 곡물 재고율도 8~13% 수준으로 FAO가 권고하는 적정 재고율 17~18%보다 한참 낮다. 밀 가격 상승으로 전방위적인 타격이 예상되는 이유다.
식품업체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국내 식품업체들은 이미 지난 2021년 원자재 값 상승으로 한 차례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중국의 농산물 대량 구매와 미국과 캐나다, 러시아 등 주요 밀 생산국의 기상 악화 문제 등의 영향을 받은 2021년 밀 가격은 부셀당 7.42달러로 2013년 이후 8년 만에 역대 최고가를 경신했다. 당시 롯데제과, 해태제과 등 제과업체들과 베이커리 업체들을 비롯해 농심과 오뚜기 등 라면 업체들이 연달아 가격을 인상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밀 가격이 훨씬 높다. 전쟁으로 인해 상승한 유가도 운송비 부담 가중에 일조하고 있다. 국내 식품업계가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며 밀 가격 변동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유다.
다만 아직까지는 가격 인상 가능성에 선을 긋는 모양새다. 농심의 한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이 오르니 당연히 부담이 안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는 비축분이 있고 상황을 주시하면서 대응을 준비하는 단계”라며 추가적인 가격 인상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롯데제과 관계자 역시 “상황이 어떻게 될지 전망할 수 없는 게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일단 섣불리 가격을 인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SPC 관계자는 “우크라이나나 러시아보다는 미국, 캐나다, 호주산을 많이 쓰기 때문에 당장은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면서도 “다만 워낙 큰 곡창지대가 공급을 중단했다는 사실이 간접적으로 전체 가격을 끌어올릴 수 있어 우리 같은 식품회사들은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식품업체들은 원재료 재고를 3~6개월가량 확보해두기 때문에 비축분이 남아 있는 기간에는 가격 인상을 감내할 여유가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 설명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밀의 경우 주요 원료인 만큼 상당히 비축해두고 있다지만 주요 원료들은 그만큼 소진이 빠르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했다. 이어 “밀 같은 핵심 원료는 가격이 크게 변동되면 업계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식품업체들은 제분사에서 밀가루를 구매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제분사의 밀가루 가격 변동이 큰 변수”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제분업계도 당초 예상과 달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밀 가격이 치솟자 당황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CJ제일제당, 대한제분, 동아제분 등 국내 주요 제분사를 회원사로 둔 한국제분협회 한 관계자는 “밀 가격이 이렇게까지 폭등할 거라고는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우리도 지금 밀을 사야 할 시기인데도 구매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며 “밀 가격이 떨어지길 기대하면서 관망하고 있는데 상황이 쉽지 않고 지금 당장은 당연히 가격 인상 요인이 굉장히 많다”고 말했다. 다만 “실제로 가격이 얼마나 오를지는 각 회원사들이 재량에 따라 결정할 문제”라면서 말을 아꼈다.
이와 관련해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미 전세계 밀 가격이 50% 이상 올랐는데 우리나라가 영향을 안 받는 건 불가능하다”며 “유가가 오르고 러시아와의 교역도 끊겨 운송과 물류에서의 압박이 커졌기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라면부터 빵, 과자 등 밀가루로 만든 모든 식품의 가격이 줄인상 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