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군 논란·부처 축소·여소야대 ‘그때도 지금처럼’…윤 인수위 친이계 인사 다수 포진 ‘메시지’도 비슷
#‘안정’ 김대중, ‘열린’ 노무현, ‘일하는’ 이명박, ‘조용한’ 박근혜
인수위를 보면 새 정부의 5년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인수위에서 대통령 당선인 취임 전까지 새 정부의 국가비전과 목표, 과제 등 국가의 밑그림을 그리는 까닭이다. 통상 대통령 당선 2주 안에 꾸려지는 인수위가 운영되는 과정에는 들여다보면 다음 정부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물론 당선자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드러난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인수위를 차기 정부 국정운영의 예고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IMF 외환위기 발생 직후 들어선 김대중 당선인은 경제, 실업, 물가, 민심, 불안한 국내외 정치 상황 등 모든 것을 안정화하는 데 초점을 뒀다. 인수위 출범 당시 경제 전반의 위기감 확산과 사회적 불안의 심화로 산적한 문제들이 많아 새로운 정책을 설정한다기보다는 국정운영의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을 인수위 운영의 최우선으로 삼았다. 다만 김대중 정부 인수위는 수평적인 의견 개진보다는 당선인 일방의 지시로 운영되었는데, 이를 두고 고압적이었다는 비판과 IMF라는 급박한 경제 위기 속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공존한다.
노무현 당선인은 ‘국민참여형 열린 인수위’, ‘토론을 강조한 설득형 정책인수위’를 지향했다. 참여와 소통을 강조했던 당선인의 국정철학이 반영된 것이다. 노무현 정부 인수위는 지방순회 국정토론회, 공청회, 국민제안 접수 등을 통해 사회 각계각층의 현안을 광범위하게 수렴했다. 특히 당선인이 매주 인수위의 크고 작은 회의를 직접 주재하며 적극적인 토론자로 나선 것이 주목을 받았는데, 토론과 참여의 가치를 중시하는 당선인의 철학은 대통령 취임 후 평검사와의 대화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민주당 내 지지기반이 약했던 당선인이 선거 본부의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학계와 연구기관 출신 인물을 중심으로 인수위를 구성한 것을 두고는 ‘코드 인사’라는 당내 반발이 심화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는 외양보다 내실을 기하는 데 초점을 두겠다며 ‘일하는 인수위’, ‘섬기는 인수위’, ‘작은 인수위’를 추구했다. 이명박 당선인은 쉬는 날 없이 일하겠다는 의지로 1월 1일에도 출근해 ‘월화수목금금금’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인수위 예산 규모 20% 감축과 효율성 추구 등은 대통령 취임 후 공공기관 슬림화와 같은 정책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국정운영에 있어서는 비전 수립보다는 ‘영어몰입교육’ 등 세부적인 정책을 세우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찬반 논쟁을 격화시키는 등 여론 통합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정권교체 과정에서 일부 인수위원들의 고압적 태도로 이전 정부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점령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전 인수위의 논란을 의식했던 것일까. 박근혜 당선인은 일찍부터 “현 정부를 존중하며 대립각을 세우지 말라”는 지침을 내려 불필요한 마찰을 사전에 차단했다. 동시에 ‘실무형의’ ‘작고’ ‘시끄럽지 않은’ 인수위를 꾸린다는 방침을 세웠다. 작은 인수위라는 이름에 맞게 자문위원은 단 한 명도 두지 않았다. 과거 노무현 인수위는 700명, 이명박 인수위의 경우 559명의 자문위원을 두고 도움을 받은 바 있다. 이후 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나오자 뒤늦게 자문위원 대신 88명의 전문·실무위원을 뒀으나, 전반적으로는 소극적 인수위라는 평가를 받는다.
박근혜 당선인의 경우 인수위 시절부터 ‘방콕정치’ ‘자택정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당선인은 인수위 현판식에만 참여하고 자취를 감췄다. 인수위 전체 회의에는 1번 참석했으며 각 부처 업무 보고도 따로 받지 않았다. 진행 상황은 측근을 통해 전달받았다고 한다. 4년 뒤 국정농단과 탄핵에서 문제로 지목됐던 ‘불통’과 ‘비밀주의’가 이미 인수위 때부터 조짐을 보인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우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당선 직후 바로 취임해 따로 인수위가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고 3월 18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현판식에 참석했다.
#정권 교체기마다 갈등장 된 인수위
문제는 국정철학을 세우고 새 정부의 틀을 마련해야 할 인수위가 뜬금없이 신·구 권력 갈등의 장이 될 때다. ‘용산 집무실 이전’으로 갈등을 겪고 있는 청와대와 인수위의 모습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15년 전으로 회귀한 것 같다는 평가가 잇따른다. 이에 대해 한 여당 관계자는 “최근 청와대와 인수위의 대립은 분위기뿐만 아니라 조직개편안 등 갈등 내용마저 15년 전 노무현 정부와 MB(이명박) 정부 인수위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명박 인수위는 노무현 정부와 첨예한 대립으로 각종 논란과 잡음을 야기해 ‘점령군 같은 인수위’라는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일부 인수위원의 고압적인 태도에 노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인수위는 정부와 정책의 현황과 실태를 파악하고 다음 정부의 정책을 준비하는 곳이지 당선자의 공약에 대해 찬반을 강요하는 곳이 아니며, 나아가 호통치고 자기반성문 같은 것을 받는 곳은 더더욱 아니다. 나와 정권이 심판받은 것이지 모든 정부 정책이 심판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불편함을 내비칠 정도였다.
정치권에서는 윤석열 인수위에 친이명박계 인사가 다수 포진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명박 정부를 이끌어왔던 인사들이 재등장했으니 비슷한 메시지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석열 인수위는 줄곧 ‘국민의 관점에서 볼 때 정말 일 잘하는 정부, 유능한 정부가 되고 싶다’는 메시지를 내보낸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의 ‘일하는 인수위’ 슬로건과 닮았다.
두 인수위는 부처개편안의 흐름도 닮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 당시부터 “여성부는 여성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부서”라며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웠다. 통일부도 무용하다며 외교통상부와 통일부를 통합한 ‘외교통일부’ 개편을 주장했다. 당선 직후 꾸려진 인수위는 2008년 1월 16일, 당시 18부 4처 18청인 정부 조직을 13부 2처 17청으로 축소하는 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통일부, 해양수산부, 정보통신부, 여성가족부, 과학기술부가 통폐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반대에 부딪혀 통일부 폐지는 무산됐고 여성가족부는 여성부로 그 기능이 집중되었다가 2010년 다시 여성가족부로 환원했다.
윤석열 인수위의 조직개편안 방향 역시 축소개편으로 예측된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윤 당선인의 선거 공약이었으며 대선 이후 당선인이 직접 “부처의 역사적 소명을 다하지 않았느냐”고 밝히기도 했다. 최근 공개된 인수위원 184명 가운데 여성가족부 공무원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밖에도 외교부에 통상 기능을 더한 외교통상부가 부활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특히 윤석열 인수위 외교안보 분과 간사에 이명박 정부 당시 외교통상부 2차관을 역임했던 김성한 위원이 임명된 것이 확인되면서 외교통상부 부활설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다만, 정부조직개편안이 그대로 실행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여소야대 난국을 돌파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두 인수위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권교체를 하게 됐다는 점도 닮아있다. 이 경우 야당의 협치 없이는 국정운영이 어렵다. 이명박 정부 인수위도 절반은 실패했다. 17대 국회에는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으로 있었고 대통합민주신당과 민주노동당, 민주당까지 합쳐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철학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조직개편안 거부권을 행사해 여야는 첨예한 갈등을 빚었다.
한편 청와대와 인수위 간 갈등이 깊어지면서 대선 2주가 지났지만 문 대통령과 윤 당선인의 만남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청와대는 당초 문 대통령이 윤 당선인과의 회동을 앞두고 있었으나 공공기관 인사권 문제,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 문제에 이어 청와대 집무실 이전 문제까지 파열음이 나면서 감정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황이다. 역대 대통령과 당선인이 회동까지 가장 오래 걸렸던 기존 사례는 9일이 걸린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당선인의 만찬이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