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10연패 이상 2번 세계 유일…기성 10연패 놓친 이야마 본인방 11연패 노려
기전(棋戰) 서열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본에서 최고 타이틀 기성의 교체는 일인자의 교체를 의미한다. 기성전은 우승상금만 4500만 엔(약 4억 6000만 원)으로 메이저 세계대회의 평균 우승상금 3억 원보다 많다. 하지만 많은 바둑 관계자들이 그날의 승부를 주목했던 것은 일본 일인자의 교체 여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이야마 유타 9단의 기성전 10연패(連覇) 달성 여부가 최종국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이야마는 2013년 기성전 도전기에서 장쉬 9단을 4-2로 꺾고 권좌에 오른 이래 2021년까지 9연패를 달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올해 도전기만 방어해낸다면 전인미답의 기성전 10연패 고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10연패 일보직전 이치리키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위업 달성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국은 조훈현의 16연패가 기록
이야마의 10연패 달성 여부가 관심을 모았으니 내친김에 바둑사의 연패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우선 세계 최고의 연패 기록은 조훈현 9단이 갖고 있다. 조 9단은 1977년 당시 서울신문 주최의 패왕전 타이틀을 획득한 이래 1993년까지 무려 16년간 패왕을 지켰다. 당연히 세계 최고 기록이다.
역대 2위는 중국 마샤오춘 9단의 중국 명인전 13연패 기록이다. 1990년대 전성기 이창호 9단의 유일한 대항마 역할을 했던 마샤오춘은 당연히 중국에선 최강의 자리를 지켰는데, 그는 1989년 처음 명인에 오른 후 2001년까지 중국 명인을 13년간 독점했다.
조훈현 9단의 뒤를 이어 국내 기전에서 무적시대를 구가했던 이창호 9단은 두 번의 두 자릿수 연패 기록이 있다. 첫 번째는 왕위전으로 1996년 처음 타이틀을 차지한 이래 2007년까지 12년간 타이틀을 지켰다. 두 번째는 기성전이다. 이 9단은 기성전에서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1연패를 달성했다. 한 명의 기사가 10년 이상 2개의 타이틀을 지켜온 것은 세계적으로 이창호 9단이 유일하다.
10연패 이상을 기록한 또 한 명의 기사는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치훈 9단이다. 조 9단은 1989년부터 1998년까지 일본 본인방전 10연패를 달성했다. 그전까지 일본 최고 기록은 ‘본인방전의 사나이’라 불렸던 다카가와 가쿠 9단의 본인방 9연패(1952년부터 1960년까지)였으나 조 9단이 기록을 갈아치웠다.
#타이틀전과 선수권전
프로 기사들의 연패 기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둑대회의 진행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둑대회의 방식은 다른 경기와 다르게 ‘타이틀전’과 ‘선수권전’으로 구분된다.
타이틀전은 한번 정상에 오르면 다음 대회부터는 도전자만을 상대하면 되므로 정상을 유지하기 쉬운 게 특징이다. 정상급 기사의 대국으로 흥행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단 도전권까지 가는 여정이 길기 때문에 새로운 얼굴의 출현이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선수권전은 정상급 기사들의 기득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토너먼트 방식이 보통이기 때문에 승부의 의외성과 새로운 얼굴이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선수권전의 특징이다.
과거의 기전은 한중일 모두 대부분 타이틀전으로 진행돼 왔으나, 최근엔 한국과 중국에서 세계기전이 많이 등장하면서 일본은 타이틀전, 한국과 중국은 선수권전 형태의 기전이 많아졌다. 하지만 선수권전은 한 번이라도 지면 바로 탈락이기 때문에 타이틀전에 비해 우승이 어렵다. 최근의 연패 기록이 주로 일본에서 많이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야마 유타, 기록 경신 기회는 있다
이야마 유타 9단의 기성전 10연패가 좌절됐지만 실은 이야마에겐 또 다른 카드가 남아 있다. 이야마는 기성 외에 현재 본인방전에서도 타이틀 10연패를 기록하고 있다.
이야마는 2012년 야마시타 게이고 9단을 4-3으로 꺾고 본인방에 오른 이후 2021년 시바노 도라마루 9단의 도전을 4-3으로 물리치고 10연패를 달성했다. 만일 올해 열리는 본인방전 도전기에서 방어에 성공한다면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다.
유독 본인방전에서 연패 기록이 많이 나오는 것도 흥미롭다. 다카가와 9단의 9연패, 조치훈 9단의 10연패, 이야마 9단의 10연패가 모두 본인방전에서 나왔다.
한편 일본의 통산 타이틀 획득 개수는 조치훈 9단이 75회 우승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그 뒤를 추격하고 있는 기사가 이야마다. 이야마는 현재 64개인데 여전히 연간 4~5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있어 점점 격차를 줄이는 중이다.
한국기원의 한 관계자는 “과거 국수전, 왕위전, 기성전 등 신문사가 주최하던 기전들이 사라지면서 국내에선 타이틀전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최근 대회들은 후원사가 문화사업적인 측면과 함께 마케팅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선수권전이 대세”라며 “다행히 최근엔 쏘팔코사놀 최고기사결정전이나 YK건기배 등 타이틀전 형식의 대회가 생기면서 정상급 기사들의 박진감 넘치는 본선리그나 도전기를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다양한 기전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