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달러’ 루이즈·라모스 1군서도 못 뛰어…외인투수 맹활약과 대조
이런 변화의 직격탄을 가장 크게 맞은 피해자는 각 구단 외국인 타자들이다. 대부분 타격 성적이 좋지 않고, 리그를 압도할 만한 성적을 내는 선수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뜩이나 올 시즌 한국에 처음 온 선수가 많아 적응이 필요한데, 스트라이크존까지 커졌으니 운도 따르지 않은 셈이다.
비교적 긴 호흡으로 기회를 얻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국내 타자들과 달리, 각 팀에 한 명뿐인 외국인 타자들은 즉시 전력으로 활약해야 할 책임을 안고 KBO리그에 온다. 개막 후 일정 시간이 지났는데도 부진하다면, 매 경기 생존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벌써 팬들로부터 “빨리 방출하고 대체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며 비난을 받고 있는 외국인 타자도 나오기 시작했다. 찰리 반즈(롯데 자이언츠), 로버트 스탁(두산 베어스), 드류 루친스키(NC 다이노스), 윌머 폰트(SSG 랜더스) 등 외국인 투수들이 각자 소속 팀에서 에이스로 각광받는 상황이라 외국인 타자들의 그림자가 더 짙어 보인다.
#푸이그 '침묵'하는 날 많아져
올해 가장 화려한 이름값을 자랑하는 외국인 타자는 야시엘 푸이그(키움 히어로즈)다. 메이저리그(MLB) LA 다저스에서 맹활약한 그는 당시 같은 팀에서 뛰던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과 친분이 깊어 한국 야구팬에게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빅리그 7시즌 통산 성적이 타율 0.277, 홈런 132개, 415타점.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장타력이 검증된 외야수다. 그러나 다혈질 성격, 숱한 사건·사고와 돌발행동, 팀 내 불화 등 경기 외적인 논란 탓에 미국 내 소속팀을 찾지 못했다. 키움은 “푸이그를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다”며 과감하게 100만 달러를 주고 올 시즌 새 외국인 타자로 영입했다.
실제로 푸이그는 키움 선수단에 순조롭게 녹아들었다. 홍원기 키움 감독은 “더그아웃에서 선수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고 했다. 키움 간판타자 이정후는 “운동장에서 훈련을 할 때 누구보다 진지한 선수다. 올해 팀이 우승하면 푸이그가 동료들을 미국 마이애미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정작 푸이그는 사생활이 아닌 야구로 속을 썩였다. 시범경기에서 1할대 타율로 고전했고, 좀처럼 타구에 힘을 싣지 못해 걱정을 샀다. 홍 감독이 "푸이그의 야구 기술 문제로 고민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털어놨을 정도다. 개막 직후엔 반짝 활약을 펼쳐 ‘역시 푸이그’라는 평가가 나오는 듯했다. 3경기 만에 첫 홈런을 신고했고, 4월 12일 NC전에서 만루홈런까지 터트렸다. 그러나 다음 날인 13일 NC전 3안타를 끝으로 타격 페이스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하루 걸러 하나씩 안타를 생산하더니, 점점 무안타 간격이 길어졌다. 4월 27일 한화전에서 잠시 3안타로 부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침묵하는 날이 더 많았다. 푸이그의 KBO리그 첫 29경기 성적은 타율 0.212, 홈런 3개. 키움이 기대했던 파괴력은 온데 간데 없다. 홍 감독과 키움 선수들이 푸이그의 기를 살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아직은 효과가 없다.
#구관은 명관일까, 아닐까
올 시즌 뛰는 외국인 타자 10명 중 ‘KBO리그 경험자’는 호세 미구엘 페르난데스(두산)와 호세 피렐라(삼성 라이온즈)뿐이다. 올해로 한국 무대 4년 차가 된 페르난데스는 지난해 방출 기로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KBO리그 첫 두 시즌 동안 매년 200안타에 육박(2019년 197안타, 2020년 199안타)하면서 2년 연속 최다 안타왕에 오른 ‘타격 장인’이다. 다만 한계도 뚜렷했다. 발이 느리고, 1루 수비가 썩 뛰어나지 않아 주로 지명타자로 나서야 했다. 지난해 정규시즌 타율 0.315를 기록해 이전보다 확연히 타격 페이스가 떨어진 모습도 보였다. 두산은 ‘페르난데스와의 재계약’과 ‘더 강력한 파워를 지닌 거포 영입’ 사이에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페르난데스는 결국 가을의 타격 능력으로 모든 단점을 상쇄하고 두산의 고민을 없앴다. 지난해 포스트시즌 11경기에서 타율 0.447(47타수 21안타)을 기록하면서 KBO리그 역대 7번째로 단일 포스트시즌 20안타를 넘겼다. 그 덕에 두산과 4년째 동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다시 시작된 네 번째 KBO리그 시즌도 시작이 썩 좋지 않다. 3할대 초반 타율에 머물렀고, 4월 30일 SSG전에서는 3연타석 병살타를 기록하면서 번번이 중요한 득점 기회를 놓쳤다. 올 시즌 병살타 순위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을 정도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배트 스피드가 많이 떨어진 것 같다. 타격 기술은 있는 선수인데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KBO리그 2년 차인 피렐라는 페르난데스보다 상황이 낫다. 피렐라 역시 지난해 ‘반쪽 전력’이라는 비판을 들어왔다. 발바닥에 굴곡이 적은 ‘평발’의 소유자인 그는 지난해 반복적인 발바닥 통증 탓에 수비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주루 플레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신체적 한계로 인한 어려움을 딛고 타율 286, 홈런 29개라는 준수한 타격 능력을 뽐냈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해 뛰는 자세 또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삼성은 ‘이만 한 외인은 구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피렐라와 재계약했다.
삼성의 선택은 옳았다. 피렐라 여전히 타격 능력을 뽐내는 데다, 지난해 그를 괴롭힌 부상마저 완벽하게 털어냈다. 허삼영 삼성 감독은 “지난해에는 통증 때문에 수비를 빼줘야 했는데, 올해에는 나무랄 데 없이 잘하고 있다”며 흡족해했다. 올 시즌 여러 타격 순위에서 외국인 타자들의 이름이 실종된 상황에서도 피렐라는 유일하게 타율, 안타, 득점 최상위권을 지키면서 외국인 타자의 자존심을 살리고 있다.
#100만 달러 풀베팅, 현실은 1군 실종
KBO는 야구 규약에 신규 외국인 선수 계약 시 지출할 수 있는 최대 비용을 총액 100만 달러(연봉, 계약금, 옵션, 원 소속구단에 지불하는 이적료 모두 포함)로 제한하고 있다. 올 시즌 데뷔한 외국인 타자 8명 중 이 상한액을 꽉 채워 받은 선수는 5명이나 된다. 푸이그, 리오 루이즈(LG 트윈스), 헨리 라모스(KT 위즈), 케빈 크론(SSG), 마이크 터크먼(한화 이글스)이다.
키움은 푸이그의 부진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LG와 KT는 이마저도 부러워해야 할 처지다. 100만 달러를 들여 ‘모셔온’ 선수들이 1군에서 뛰지도 못하고 있어서다. 1994년 이후 28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LG는 올해 MLB 출신 내야수 루이즈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루이즈는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지난해까지 MLB와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 LG의 루이즈가 “뛰어난 수비력과 좋은 선구안을 지닌 중장거리 타자”라고 소개하면서 팀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루이즈는 올 시즌 24경기에서 타율 0.171, 홈런 1개, 5타점으로 부진했다. 4월 29일 잠실 롯데전에서는 승부처에서 대타로 교체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상위권에 머물던 LG는 그 경기를 시작으로 롯데와의 주말 3연전을 모두 패하자 결국 루이즈를 1군 엔트리에서 제외했다. 류지현 LG 감독은 “루이즈의 복귀 시점을 지금 당장은 못박을 수 없다. 환경에 변화를 주고 머리를 식히면 다른 경기력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2군으로 내려보냈다”고 했다. 2군에서도 뚜렷한 반등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팀도 지체 없이 방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KT는 헨리 라모스의 부상 탓에 시름에 잠겨 있다. 양손 타자인 라모스는 ‘제2의 멜 로하스 주니어’라는 기대 속에 한국땅을 밟았다. MLB에선 18경기에 나서 타율 0.200, 홈런 1개, 8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지만, KT는 “라인드라이브 타구 생산 능력이 뛰어나고 선구안과 주력도 좋다”며 성공적인 KBO리그 연착륙을 바랐다. 그러나 라모스는 첫 18경기에서 타율 0.250, 홈런 3개를 기록한 뒤 4월 23일 NC전에서 상대 투수의 공에 오른발을 맞아 새끼 발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회복까지만 4주에서 6주가 걸리는 큰 부상이다. KT는 일단 “라모스만 한 외국인 타자를 구하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으로 부상이 빠르게 회복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SSG의 크론은 개막 10연승과 함께 선두로 치고 나간 팀 성적에 ‘묻어가고’ 있다. 크론은 2019년 트리플A 퍼시픽코스트리그 홈런왕(38개) 출신이고,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 도요카프에서 아시아 야구도 경험했다. 하지만 첫 29경기에서 타율 0.252, 홈런 4개로 평범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 아직은 특유의 ‘거포 본능’을 살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홈런이 능사는 아니다
외국인 타자의 영입을 결정하거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할 때는 주로 3할, 30홈런, 100타점으로 대표되는 ‘타격’ 능력이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졌다. KBO리그를 거쳐간 외국인 타자 대부분이 ‘한 방’ 있는 선수가 주로 맡는 1루수, 3루수, 코너(좌우) 외야수에 집중됐던 까닭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한화 이글스는 올해 발상의 전환으로 또 다른 외국인 타자 성공 사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화가 새로 영입한 터크먼은 MLB 통산 5시즌 동안 257경기에 나섰고, 지난 시즌에도 뉴욕 양키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으로 MLB 75경기에 출전한 왼손 외야수다. 특히 마이너리그 통산 도루 117개를 기록하면서 일찌감치 빠른 발을 인정 받았다.
실제로 올해 터크먼의 KBO리그 생존 무기는 ‘발’이다. 심우준(KT), 김혜성(키움), 정수빈(두산) 등 발 빠르기로 유명한 국내 선수들과 도루 1위를 다투고 있다. 도루를 많이 하는 외국인 타자 자체가 흔치 않은데, 첫 29경기 도루 성공률이 100%다. 같은 기간 한화의 팀 도루도 10개 구단 1위. ‘발야구’와는 거리가 멀었던 한화의 팀 컬러를 터크먼이 앞장서 바꿔 놓았다. 한화 코칭스태프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뛰라”고 주문하자 터크먼이 그 모범 사례를 몸으로 보여주며 변화를 이끌었다.
수비에서도 연일 최고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4월 26일 키움전에서 송성문의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걷어냈고, 29일 NC전에서도 전민수의 짧은 안타성 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냈다. 주루에서는 빠른 판단력과 몸을 아끼지 않는 슬라이딩으로 득점에 기여하고 있다.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감독은 “터크먼은 공격, 수비, 주루 모두 완벽한 선수”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정민철 한화 단장도 “터크먼의 적극적인 주루가 다른 선수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 같다”고 흐뭇해했다. 중심타선을 함께 맡고 있는 팀 동료 노시환은 “지금까지 본 외국인 타자 중 터크먼이 최고”라며 “파이팅이 대단하고, ‘눈 야구’도 된다. 더그아웃에서 많이 배우고 있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아직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팀이 희망을 갖고 지켜보는 타자들도 있다. DJ 피터스(롯데)는 외야 전 포지션 수비가 가능하고, 마이너리그에서 세 시즌 연속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장타력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첫 28경기에서 홈런 4개를 때려내 장타자로서의 자존심은 지켰지만, 타율이 2할대 초반에 머물고 삼진도 리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많아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닉 마티니(NC)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외야와 1루 수비가 가능한 중장거리 유형의 타자로 평가받았지만, 리그 평균 수준의 성적에 머물고 있다. 이동욱 NC 감독은 “앞으로 한 번 만났던 투수들과 다시 상대하게 되면 타격도 달라질 것”이라며 반등을 기다리고 있다.
소크라테스 브리토(KIA)는 서서히 실력 발휘를 시작했다. 4월 24경기에서 타율 0.223로 부진했지만, 5월 들어 타율 4할대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김종국 KIA 감독은 “이제 거의 KBO리그 적응을 마친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기복이 심하지 않을 스윙을 갖고 있다. 앞으로 좋은 결과가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소크라테스도 “KBO리그 모든 투수가 생소한 탓에 타격 타이밍을 잡는 데 애를 먹었다. 한 달을 보냈으니 앞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