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내정 형식 초안 발표 ‘관행’ 따르다 원칙 어겨…최종안 보낸 시간도 대통령 결재 전, 행안부도 국기문란?
#“관행대로 한 것”vs“경찰 멋대로”…행안부와 경찰, 정면충돌
시·도경찰청장급인 경찰 고위직 인사가 발표 2시간 만에 번복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논란이 커지고 있다. 경찰청은 6월 21일 오후 7시 10분쯤 경찰 내부망에 치안감 28명 규모의 보직 내정 인사를 발표했다. 내용은 국가수사본부 수사국장 등 경찰 상층부를 교체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 2시간이 지난 오후 9시 34분쯤 7명의 보직이 바뀐 2차 인사안이 올라왔다. 당초 올라온 인사명단이 최종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가 크게 주목 받는 이유는 두 가지다. 대통령 승인을 거쳐 결정되는 치안감 인사의 번복은 유례없는 일인 데다, 알고 보니 경찰 내부망에 먼저 올라온 인사안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않은 채 발표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찰공무원법에 따르면 총경 이상 경찰공무원 인사는 경찰청장의 추천을 받아 행정안전부 장관이 제청해 대통령이 임명해야 한다. 특히 치안감 이상 인사의 경우 그 권한이 작지 않은 만큼 경찰과 행안부, 대통령실이 다양한 안을 두고 사전 조율을 거쳐 협의해왔다고 한다.
경찰 입장은 이렇다. 관례대로 정부에서 명단이 내려왔고 이를 내정된 것으로 판단해 내부에 발표했는데 알고 보니 최종 버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경찰 측은 “그동안 민정수석실 등과 협의해 내정이 되면 발표를 하고 이후에 공식 절차를 밟아 인사 발령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즉, 과거 청와대에 민정수석실이 있을 때에는 민정수석실, 행안부와 경찰이 사전 조율을 통해 인사를 협의하고 최종안이 마련되면 인사 대상자의 이동 편의를 위해 내정 형태로 대통령 결재 전에 발표를 하는 게 ‘관행’이었고, 이번 인사도 그렇게 진행되었다는 말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5월 있었던 치안정감 승진과 6월 보임 등 인사 역시 이번 치안감 승진·보임 인사와 마찬가지로 대통령 재가 없이 경찰청이 먼저 발표한 뒤 대통령 재가를 사후에 받는 식으로 진행됐다.
반면 행안부는 경찰청이 대통령 결재 없이 인사를 발표했다는 입장이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경찰청이 희한하게 대통령 결재가 나기 전에 자체적으로 먼저 공지해 이 사달이 났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사 최종안은 이 장관이 해외 출장 전 이미 미리 짜놓고 갔으며 21일 귀국과 동시에 행안부 치안정책관에게 대통령 결재 준비를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안부 치안정책관도 처음 경찰청에 인사안 초안을 보낼 당시 “보고 양식에 맞춰서 대통령실과 협의해 결재를 올릴 준비를 하라”는 취지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행안부의 손을 들어줬다. 윤 대통령은 23일 출근길 “대통령 재가도 나지 않고 행정안전부에서 검토해 대통령에게 의견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인사가 밖으로 유출됐다”며 “언론에 마치 인사가 번복된 것처럼 나간다는 것 자체가 중대한 국기문란, 아니면 공무원으로서 할 수 없는 과오”라고 질타했다.
#경찰 통제안 발표→인사통보→뒤집기…사건 타임라인
문제는 3자 해명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경찰과 행안부의 해명을 토대로 이날의 타임라인을 정리하면, 이미 21일 점심 무렵부터 경찰청과 행안부 사이에 갈등의 기류가 있었다. 오후 1시 행안부 경찰 개혁 자문위원회(자문위)가 경찰 통제 권고안을 발표했고 경찰지휘부는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오후 4시쯤에는 행안부가 경찰청에 인사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했다. 당시 김창룡 경찰청장은 자문위의 경찰 통제안에 대한 대응 방안 마련을 위해 전국 경찰지휘부 화상회의를 주재하고 있었고 4시 50분쯤 행안부 자문위의 권고안은 법치주의 훼손이라는 내용의 반발성 입장문이 나왔다.
그리고 오후 6시 15분쯤 행안부 치안정책관은 경찰에 1차 치안감 인사안을 전달했다. 인사안은 7시 10분쯤 경찰 내부망과 언론에 배포됐다. 그런데 오후 8시 38분쯤 행안부 치안정책관은 ‘보도된 인사안은 최종안이 아니다’라는 연락을 해왔고 최종 인사안으로 수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경찰청은 7명의 보직을 바꾼 최종 인사안을 오후 9시 34분쯤 다시 내부망에 다시 올렸다.
행안부에 따르면 대통령의 최종 결재는 21일 오후 10시쯤에 이뤄졌다. 시간 순서대로 보자면 행안부의 수정안 역시 대통령 재가가 없는 인사 명단이 되는 셈이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대통령 결재 전 공개’가 국기문란이라면 수정안을 공개하도록 한 행안부도 국기문란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또 당초 치안정책관이 초안을 보낸 이유는 무엇인지, 전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인사가 1차 인사안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가 수정된 인사에서는 한직으로 빠졌는지 등이 설명되지 않으면서 야당은 윗선 개입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선 만큼 인사 번복 사태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작업이 불가피해 보인다.
정치권에서는 경찰 통제안을 두고 경찰과 행안부가 정면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발생한 이번 사태가 새 정부의 경찰국 신설의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높다는 해석이 나온다. 만약 경찰의 책임으로 결론 난다면 행안부의 경찰국 신설 작업도 탄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경찰 내부에서 ‘이번 논란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에 조직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