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5개월 만에 타이틀 ‘또래 중 최초’…“최정과의 16강전 포기하니 오히려 집중 잘돼”
정유진은 2006년 2월생으로 16세 5개월 만의 우승이다. 지금까지 여자기사 10대 타이틀 홀더 기록은 최정 9단의 15세 3개월로 정유진은 최정 이후 10년 만에 다시 10대 타이틀 홀더 기록을 썼다. 또 1996년생 최정 9단, 1998년생 오유진 9단 아래 세대로는 처음으로 타이틀을 맛본 기사가 됐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하다”는 정유진을 한국기원에서 만나봤다.
―축하합니다. 타이틀을 따내기까지 고비가 있었다면.
“16강전 첫 판이었던 최정 9단과의 대국도 힘들었지만 준결승전 김은지 3단과의 바둑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초반에 망해서 던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조금만 더 견뎌보자고 버틴 것이 승리로 이어진 것 같아요.”
―16강전에서 최정 9단을 꺾은 것이 올해 상반기 바둑계에서 벌어진 가장 충격적인 일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최정 9단을 물리친 소감은.
“사실 대진표가 처음 발표됐을 때 좌절했었어요. 본선에 올라 너무 기뻤는데 왜 하필 첫 상대가 최정 9단일까, 멘붕이 왔었죠. 그런데 포기하면 편하다고 막상 대국에선 집중이 잘 됐습니다. 그날 운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아요. 기억나는 장면은 최정 9단이 첫 수를 놓는데 뭐랄까,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어요. 저도 그런 게 조금 있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는데 그런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아우라였습니다.”
―바둑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일곱 살 때 집 근처 바둑학원에서 무료체험을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그곳에서 김성래 사범님에게 처음 배웠고, 5학년이 됐을 때 한종진 사범님 도장으로 옮겨 본격적인 길에 들어섰습니다.”
―도장 생활은 어땠는지.
“재밌었어요. 승부욕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남들보다 출발이 늦었는데 도장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바둑이 확 늘게 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하루는 사범님이 웬 꼬마하고 바둑을 둬보라고 해서 뒀는데 제가 져버렸어요. 한 번만 진 게 아니고 이후에도 몇 연패를 당했었지요. 저보다 세 살 어린 그 귀여운 친구가 지금은 일본으로 돌아간 스미레였어요. 그때 진 충격 때문이었는지 다음날부터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 집중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가 가장 공부도 열심히 했고, 바둑도 성장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스미레가 좋은 자극이 됐습니다.”
―최근 바둑 훈련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입단 직후인 2020년부터 국가대표 팀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시합이 있든 없든 한국기원에 나갑니다. 국가대표 팀에서는 오유진, 김채영, 조승아 사범님 등 최강자급으로 구성된 8인 리그가 있는데 이 실전대국이 무척 도움이 됩니다. 제 성적은 하위권이고요. 다른 시합에서 이기면 신이 나서 기원 여기저기 다니며 국가대표 팀에서 공부를 하지만, 지는 날엔 그냥 집으로 돌아갈 때도 있어요(웃음).”
―또래 라이벌들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선배 언니들하고 둘 때보다 더 긴장되고 집중하는 건 사실이에요. 어느 인터뷰에선 은지가 제일 상대하기 까다롭다고 했지만, 모두 쉽지 않은 상대들입니다. 각자 자신만의 강점이 있는 것 같아요. 다들 성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제부터의 승부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에 최정을 꺾었고 지난해 난설헌배에서는 오유진, 김채영을 꺾었습니다. 여자바둑 톱3를 모두 이겨본 기사는 많지 않은데.
“그냥 운이 좋아서 한 번씩 이겨봤을 뿐입니다. 자신감이 좀 생긴 것은 맞지만, 그보다 훨씬 많이 졌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타이틀을 따고 달라진 점이 있는지.
“많은 상금(웃음). 엄마에게 모두 드릴 겁니다. 그보다 세계대회에 출전하려면 국내 예선을 통과해야 하는데 거기도 랭킹 10위 안에 들어야만 출전이 가능하거든요(정유진의 여자랭킹은 현재 23위다). 그런데 타이틀 보유자는 참가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딱 1년 동안은 예선에 참가할 수 있는데 그게 제일 기뻐요.”
―본인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초중반은 조금 자신 있는데 형세판단 능력이 영…(웃음). 느슨하게 두면 바로 지는 경우가 많아서 전투형이 된 것 같습니다.”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기사가 있다면.
“신진서 9단, 최정 9단. 신진서 9단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것 같고, 최정 9단은 오랜 시간 한결같이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앞으로의 목표는.
“가장 큰 여자세계대회인 오청원배에서 꼭 우승하고 싶어요. 그리고 최정 사범님처럼 정상급 남자 기사들과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기사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