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이사 추천 절차 남아 ‘출범’ 반신반의…4년 전 방 뺀 사무실은 중견 건설사가 사용 중
9월 13일 권영세 장관은 북한인권재단 출범 첫 단추를 끼웠다. 재단 이사 2명을 추천했다. 권 장관이 추천한 북한인권재단 이사 후보는 이정훈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와 김범수 사단법인 세이브NK 대표다. 이 교수는 2016년 3월 북한인권법 제정 이후 초대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를 지냈다. 김 대표는 현재 국민의힘 경기 용인정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다.
권 장관이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 주사위를 던진 상황에서 남은 절차는 여야 원내 교섭단체의 이사 추천이다. 북한인권법에 따르면 북한인권재단 이사 정원은 총 12명이다. 통일부 장관이 2명을 추천하고 나머지 10명에 대해선 여야 원내교섭단체가 각각 5명씩 추천한다. 이사회가 구성을 마쳐야 이사 12명 가운데서 이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 이사장 선출은 북한인권재단 출범 필수조건이다.
결국 통일부 이사 추천에 정치권이 호응해야 하는 구조다. 이사회가 구성되지 않으면, 북한인권재단은 법령에 명시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북한 인권 활동을 펼치는 각종 단체들은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6년 동안 학수고대했다는 후문이다.
한 북한 인권단체 관계자는 일요신문과 만나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관련 핵심적인 목소리를 대한민국이 주도하려면 정부가 주도하는 북한 인권 관련 구심점이 필요하다”면서 “북한인권법이 공포된 뒤 북한인권재단이 그런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고 했다. 그는 “그런데 현실은 예상과 달랐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이 통과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번갯불에 콩 굽듯 출범했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출범한 뒤 임무수행에 돌입하면서 졸속 출범 논란까지 일었다. 그런데 북한인권재단은 법이 생긴 뒤 7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탄핵정국이 재단 출범할 타이밍을 허락하지 않았고, 문재인 정부에선 이사회를 구성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북한인권법은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6년 3월 3일 공포됐고, 같은 해 9월 4일 시행됐다. 2005년 처음 법안이 발의된 뒤 무려 11년을 계류한 법안이 공식적인 효력을 가지게 된 셈이다. 11년간의 계류 기간은 북한인권법을 둘러싼 정치적 시각 차이가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인권법 핵심은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비롯해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 임명, 북한인권증진자문위원회, 북한인권기록센터 설립 등을 명문화한 부분이다. 꾸준하게 국제적 이슈로 주목받는 북한 인권 문제에 있어 정부가 공식적으로 산하 단체를 설립하고 인사를 단행하는 명분이 된다. 중국과 북한을 오가며 활동했던 북한 인권운동가는 “결국 국가 재정을 투입해 북한인권재단을 출범한 뒤 북한 인권 문제 중요성을 부각하는 활동을 하는 역할을 공식적으로 규정한 것이 북한인권법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인권법이 시행된 뒤 북한인권재단에 재정이 투입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먼저 통일부가 2016년 9월 북한인권재단 사무실을 얻었다.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소재 지상 15층 빌딩 7층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북한인권재단은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2018년 6월 사무실 간판을 내려야 했다. 1년 9개월 동안 사무실만 얻어놓은 상태에서 북한인권재단 출범은 감감 무소식이었던 셈이다.
통일부 등에 따르면 북한인권재단 사무실을 얻은 뒤 1년 9개월 동안 지출된 월세 규모는 13억 원가량인 것으로 전해진다. 기타 유지비용까지 합치면 북한인권재단 사무실 운영에 20억 원 정도 예산이 쓰인 것으로 추산된다. 사무실까지 얻었는데 재단이 출범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치의 문제였다. 당시 정부여당이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과 야당 더불어민주당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측은 북한인권재단 상근이사 두 자리 중 한 자리를 야당 추천 인사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측은 재단 출범을 지연시키려는 꼼수라며 더불어민주당과 대치를 이어갔다. 사무실 월세가 세금으로 집행되는 가운데, 자리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면서 북한인권재단 출범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 사이 이른바 ‘국정농단 의혹’이 정국을 강타했고, 북한인권재단 출범은 잊히기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보수진영에선 끊임없이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 및 출범을 압박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통일부에선 북한인권재단 출범 관련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북한인권재단 간판이 달려 있던 마포구 소재 사무실은 현재 통일그룹 계열사 산하 중견 건설사가 서울사무소로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인권재단이 사무실을 뺀 지 4년이 지난 만큼, 재단 관련 흔적은 빌딩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 뒤 정부는 북한인권재단 출범에 속도를 내고 있다. 7월엔 통일부가 여야에 북한인권재단 이사 추천을 요청했다. 정치권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국민의힘은 재단 이사로 추천할 라인업 구성을 거의 완료한 단계인 것으로 전해진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재단 이사 추천을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로 미뤄놓았다고 한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북한인권재단 출범에 속도를 내라고 당부했다. 7월 22일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윤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자리에서 재단 출범 필요성이 비중 있는 논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 포기 불가 방침’을 법제화한 상황에 발맞춰 정부와 여당은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할 말을 하며 견제구를 던지겠다는 방침인 것으로 보인다. 여권 내에선 북한 인권 문제 관련 유난히 소극적인 입장을 취해 왔던 한국 정부가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토대로 ‘북한 인권 빅 마우스’가 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2017년 김정남 피살사건을 비롯해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인권 탄압 관련 이슈에 대해 우리 정부가 목소리를 내야 하며, 그 창구가 법적 근거가 존재하는 북한인권재단이 돼야 한다”면서 “북한 인권 이슈에 있어 야당과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이지만, 북한이 핵 포기 불가 의사를 밝힌 시점에 야당도 빠르게 협력해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탈북 외교관’ 출신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8월 28일 “북한인권재단이 민주당의 재단 이사 미추천으로 6년째 출범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것은 국회의 직무유기이자 자기부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태 의원은 그간 인권 문제를 지렛대 삼아 북한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해온 바 있다.
9월 14일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대통령 주변 비리를 감시하는 특별감찰관 제도를 도입함과 동시에 북한인권재단을 출범하자고 더불어민주당에 누차 제안했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은 “민주당은 북한인권재단 출범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이사 추천을 완료해 협조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