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 올라간 외국인 ‘퍼포먼스 아닌 비극의 시작’…폭 4m 좁은 골목서 사람들 몇 겹으로 깔려 151명 사망
서양 축제인 핼러윈은 한국에서 유명 영화, 만화 캐릭터나 괴물, 좀비, 악마 등으로 분장하고 나오는 날로 자리 잡았다. 서양 문화가 상대적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이태원이 핼러윈의 성지로 떠올랐다. 이날 사고도 3년 만에 마스크를 벗은 채 만난 핼러윈을 맞이하기 위해 인파가 몰리면서 비롯됐다.
이날 이태원을 찾은 시민들은 ‘올해 유독 이태원에 사람이 많았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29일 오후 9시부터 시민들이 이태원 메인 골목을 찍은 사진을 보면 사람으로 가득 차 꼼짝달싹하지 못할 지경으로 보였다. 사고가 일어난 해밀톤호텔 옆 골목, 뒷골목뿐만 아니라 대로변까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10월 30일 오전 일요신문과 통화한 30대 직장인 A 씨는 친구 3명과 함께 10월 29일 저녁 이태원을 찾았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이태원역 뒷골목 세계음식거리에 위치한 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친 뒤 거리를 돌아다니다 오후 9시경 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다.
A 씨는 “핼러윈 축제 때 이태원을 처음 와봤다. 신기한 분장들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엄청난 인파에 놀랐다. 골목골목, 음식점, 카페 등 어딜 가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저녁 먹고 방문한 술집도 1시간 이상을 기다렸다 겨우 자리를 찾았다”면서 “한국이 아니라 외국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이태원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고 말했다.
사고 당일 이태원을 찾은 시민 B 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B 씨는 “사고 발생 전 9시쯤까지 이태원에서 술을 마셨다. 오후 5시 이후부터 이미 메인 거리에는 사람이 넘쳤다. 역방향으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거스르는 순간 인파에 갇히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사진 첨부를 하며 인증 글을 올린 디시인사이드 게시판 이용자 C 씨는 “10시 14분쯤 문제의 골목에 들어가면서 사람이 엄청 많다는 걸 느꼈다. 그 골목 전까지는 걸을 만했는데 이때부터는 아예 멈춰 있고 더 가고 싶으면 비집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앞에 연예인이 있나 싶었다”고 적었다.
C 씨는 “그러다 갑자기 한 외국인 남성이 간판을 타고 올라가면서 주목받았다. 사람들은 퍼포먼스인 줄 알고 환호했다”면서 “그때부터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미는 게 아니라 군중 전체가 밀고, 반대쪽에서 밀려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외국인 남성을 봤다는 또 다른 목격자도 "다시 생각해보면 뭔가 위기를 감지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밀었다’는 얘기는 여러 목격담과 체험기에서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한 누리꾼은 “사람이 많아서 길이 막히자 어떤 사람이 ‘야 밀자. 얘들아”하면서 자기 친구들끼리 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A 씨는 9시 40분쯤 집을 가기 위해 술집을 나왔고, 큰 길로 나가기 위해 해밀톤호텔 옆 골목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초저녁보다 사람들은 더 불어나 있었다고 한다. A 씨는 골목 초입에 서서 사람들이 빠지기를 기다렸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오히려 뒤로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갇힌 신세가 됐다. A 씨는 “야구장이나 콘서트 등 아무리 붐비는 곳이라도 조금씩 걸어 다닐 수 있기 마련인데,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끼리 ‘이럴 수가 있느냐’며 웃었다”고 귀띔했다. 이어지는 A 씨의 말이다.
“그렇게 얼마를 서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밀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무리들은 ‘영차영차’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하지만 꼼짝도 안했다. 앞쪽에서 ‘하지 마’ ‘밀지 마’라는 소리들이 나왔다. 또 여기저기서 비명 같은 게 들렸다. 하지만 뒤쪽에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시 상황에선 무언가 다 홀려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태원에 거주하는 D 씨는 “한 클럽에서부터 ‘으쌰으쌰’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밀쳐냈다고 들었다. 클럽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나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임을 시도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밀쳐진 사람들이 넘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런 사고가 난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누리꾼들은 CCTV를 통해 실제로 남을 밀어서 사고를 유발한 사람이 있다면 처벌해야 한다고 분노하고 있다.
A 씨는 “뒤에서 ‘밀어’라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또 앞에서 ‘밀지 마’와 같은 비명이 들렸던 것도 다 장난인 줄 알았다. 그때 분위기가 그랬다. 모두 분장을 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살아난 게 다행이긴 하지만, 기괴스러울 뿐 아니라 공포가 느껴진다. 평생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꽉 막힌 골목, 간판으로 뛰어 올라간 외국인, ‘밀고 밀렸다’는 증언이 나오던 때 골목은 점점 마비되기 시작했다.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폭 4m 정도 비좁은 경사로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곳은 술집이 밀집해 있는 데다 이태원 메인 골목에서 나오려는 사람들과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뒤섞이는 곳이다.
2분여 뒤인 10시 24분, 소방서에 ‘사람이 깔렸다’는 내용의 신고 전화가 접수됐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태원동에서 사람 10여 명이 깔렸다’는 신고가 접수된 뒤 119 신고로 전화가 쏟아졌다. 약 1시간 동안 호흡 곤란 환자가 발생했다는 신고가 81건에 이르렀다.
당시 시민 목격담을 종합해보면 골목은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들과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대치가 계속됐다. 이때 가파른 경사가 있는 골목의 위쪽에서 누르는 힘이 세지면서 중간에 있던 사람들이 넘어졌고 순식간에 도미노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앞서 B 씨는 지나치게 꽉 막힌 골목에서 사람들이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B 씨는 “저녁때부터 꽉 막힌 골목으로 인해 사람들의 스트레스가 쌓여있었다. 이미 너도나도 조금씩 사람을 밀치는 분위기였다. 나도 밀쳐졌다. 이 분위기가 극에 달한 시점에 사고가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아직 조사 결과 등이 발표되지 않았지만, 만약 목격자들의 말과 현실이 부합한다면 다른 압사 사건과 비슷한 흐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압사 사고는 다음과 같은 흐름이라고 알려졌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몰린 곳에서 누군가 넘어지게 되면 한쪽에서 도미노처럼 쓰러지게 된다. 사고가 일어난 쪽에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뒤에서 미는 방향에서는 이를 알 수 없어 지속해서 힘이 작용하면서 순식간에 몇 겹으로 깔리게 된다. 깔린 사람은 살려달라는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질식하거나 장기 파열 등으로 사망하게 된다.
10시 30분부터 현장에 있던 사람들과 경찰, 소방관들은 가장 아래에 깔린 사람부터 차례로 빼냈지만 깔린 상태로 10분 이상이 지난 상태였다. 압박을 버티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소방 당국은 신고 접수 19분 만인 오후 10시 43분 대응 1단계를 발동하고, 10시 45분에는 119구급상황관리센터 재난 의료지원팀을 요청했다. 10시 53분에는 이태원역 인근 한강진에 임시 응급의료소를 설치해 부상자를 받았다.
이때 온라인 커뮤니티에 길거리에서 수십 명이 CPR(심폐소생술)을 동시에 받는 장면이 올라오면서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사태의 심각성에도 몇몇 시민이 소방차 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 등이 온라인상에 올라오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평소 이태원을 자주 찾는 E 씨는 “사람이 수십 명씩 죽어가는 모습에서 기괴함과 함께 비현실적인 느낌을 받았다”면서 “상황이 저런데도 노래를 틀거나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영상을 보면서 사이코패스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면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이태원 행사를 참가했다는 F 씨가 적은 글에 따르면 논란이 된 영상은 지나치게 자극적으로 편집된 영상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F 씨는 “사고 직후 대부분 음악을 껐다. 사고 직후 인근 가게에 경찰이 와서 음악을 끄게 했다. 다들 숨죽이고 사고 현장 보고 있었다”면서 “사고가 난 줄 모르고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 무개념도 물론 있지만 잘못 알려진 것도 많다”는 반박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소방당국은 오후 11시 13분에 대응 2단계를 발령하면서 이태원 일대 업소들에 핼러윈 축제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초기 약 50명 수준일 것으로 봤던 사망자는 새벽이 지나면서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30일 오전 10시 기준 소방 당국에 따르면 사망 151명, 부상자 82명으로 사상자는 233명에 달했다. 사망자는 여성 97명, 남성 54명이었고 이란,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 외국인 사망자도 19명으로 집계됐다.
많은 사망자도 충격적이지만 부상자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압사 사고는 일반적으로 치료 경과 등이 좋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한 신경외과 전문의는 “압사 사고의 경우 80% 뇌 손상이나 질식으로 사망하고 20%는 병원에 오지만 절반만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면서 “국부 손상된 근육이 너무 부어오르면서 주변 조직을 압박해 괴사 발생이 가능하다. 너무 눌려있어서 괴사한 조직으로 피가 흘러 들어가면서 추가 손상도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의료계 또 다른 관계자는 “혈액에 산소가 운반되어야 하는데, 몇백kg에 눌려서 뇌로 가는 피 순환이 안 되면 뇌졸중 뇌경색이나 다름없다. 과거 ‘햄버거 놀이’를 하다 사망한 사고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30일 윤석열 대통령은 ‘이태원 압사 참사’ 관련 긴급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윤 대통령은 “어젯밤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과 참사가 발생했다”면서 “소중한 생명을 잃고 비통해할 유가족에 깊은 위로를 드린다. 국민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서 마음이 무겁고 슬픔을 가누기 어렵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사고 수습이 일단락될 때까지 국가 애도 기간으로 정하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태원 압사 참사와 관련해 경찰재난대책본부를 꾸려 피해자 수습과 진상 규명 등에 나서기로 했다. 30일 윤희근 경찰청장은 재난대책회의를 열어 경찰청 차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경찰재난대책본부를 구성해 운영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475명에 달하는 가용 인원을 총동원해 압사 사고 진상규명에 나서기로 했다. 경찰청은 “고인들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행위, 개인정보 유출 행위 등 온라인상 허위사실 유포 행위에 엄정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일각에서는 유명 BJ 두 명이 라이브방송을 하면서 좁은 골목에 사람이 몰려 사고가 났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노컷뉴스에 따르면 경찰은 ‘현장에 유명 BJ가 온 직후 사고가 났다’는 증언도 조사해볼 예정이라고 전해진다.
이번 참사를 두고 해외에서도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참사에 성명을 내면서 “내 아내와 나는 서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보낸다”며 “우리는 한국인들과 함께 슬퍼하고 부상자들이 조속히 쾌유하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