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인파 속에서 힘껏 목청을 높이며 사람을 구하려 한 경찰이 있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행정안전부 장관이었다면? 여기는 길이 막혔으니 올라오지 말라고, 사람들이 다 내려가면 올라오라고 앞으로 앞으로, 전달해달라고 했던 시민이 있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용산구청장이었다면?
그런 마음들이 사람의 마음이지 않을까. 분명히 핼러윈을 즐기러 간 그 자리에는 그런 마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올라가고 내려가고 들어가고 나가고 함께 간 사람을 챙겨야 하고 하는 그런 상황에서는, 전체를 볼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아비규환을 정리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체 질서를 잡아야 하는 컨트롤타워는 그래서 필요한 것인데, 그날 그 리더십은 보이지 않았다.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이었다. 그리고 꽃 같은 목숨들이 숨을 쉬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은데, 현실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날들이니 내 안에 이런 ‘나’도 있다고 옷으로, 화장으로, 분장하고 변장하며 또 다른 내가 되어보는 마당이, 그 자유로운 마당이 무간지옥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꽃 같은 얼굴, 보기만 해도 튕겨나갈 것처럼 통통 튀는 젊음에 무슨 죽음이란 말인가. 삶의 의지가 충만한 몸을 버리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의 친구이고, 형제이고, 부모인 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토해낼 것인가.
죽음이 그저 두렵기만 한 것인 나이에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이제 막 자기 삶을 살겠다고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했던 자식이 ‘독립’이 아니라 아예 떠났다고 하는 사실을.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딸의 옷을 안아들고 오열하던 엄마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이하나, 어이하나, 이를 어이하나.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것은 삶의 그림자일 것이다. 나이 들수록 떠난 사람들을 배웅하는 일이 정말 중요한 일임을 깨닫는다. 떠난 사람들을 배웅하는 자리는 나도, 우리도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배우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평생 자기인 줄 알았던 몸까지 마침내 한줌 흙으로 남겨두고 떠난, 죽음의 선배들을 보면서 그 죽음의 선배들을 버려질 것들에 대해 애착을 끊어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시간이, 삶을 정리해내는 시간이 소중한 보물인 것이다.
박경리 선생이 “마지막에,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고 하셨다는 그 말씀이 심장에 박혀 있는 이유는 여생의 마지막 숙제가 평생 ‘나’인 줄 알았던 몸, ‘나’의 집이고 성소였던 몸과의 이별을 아는 자의 지혜가 거기 들어있기 때문이다. 에고가 사라진 자리에서 보편자를 경험하면 죽음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기꺼이 꺼져갈 수 있고 사라질 수 있고 마침내 죽을 수 있게 되기까지 잘 살았는데.
그런데 아직 생의 겨울이 아닌 여름이었다. 생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꽃 피워야 하는 젊음이었다. 그리고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나온 호기심 많고 열정적인 인생들이었다. 죽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을 인생들이 어처구니없이 그렇게 죽음의 기차를 타게 된 것이다. 살아야 하고, 잘 살아야 하고, 잘 존중받아야 하는 젊음이, 생에 대한 애착이 애착이 아니라 열정인 그 나이에 뒤통수를 맞듯 죽음이 덮친 것이다. 어이할 것인가, 그 설움과 기막힘을.
우리는 참 많이 울어야 할 것 같다. 소중한 우리의 아들딸들을 그렇게 떠나보낸 우리의 부끄러움 때문에. 살아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어서 뒤돌아보지 않고 훌훌 떠날 수도 없는 억울한 죽음들을 위하여. 그들이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진짜 떠날 수 있을 때까지.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