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이야기 보따리 풀며 추억 여행…금일봉 건넨 김성근 “많이 혼냈는데도 모여줘 고맙다”
2006년 정규시즌 6위로 마감한 SK는 조범현 감독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당시 일본 프로야구 지바 롯데 마린스에서 코치로 있던 ‘야신’ 김성근을 감독으로 영입한다. 김성근 감독을 만난 SK 선수단은 혹독한 훈련을 감당하면서 그해 창단 후 처음으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다.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도 2패 뒤 4연승을 기록하며 창단 8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SK 돌풍은 이듬해에도 이어졌다. 정규시즌 1위에 올랐고,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만난 두산을 상대로 4승 1패를 기록하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9년에는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9회말 5-5 동점 상황에서 나지완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2010년 절치부심한 SK는 다시 정규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4전 전승 우승을 거두며 ‘SK 왕조’ 시대를 활짝 열었다.
김성근 감독과 SK와의 동행은 2011년 중반 파국을 맞았다. 재계약 문제를 놓고 구단과 대립 상태였던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는 바람에 당시 이만수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이끌었다.
‘SK 왕조’를 이룬 선수들 중 김강민, 최정, 김광현 등은 여전히 현역에서 뛰고 있지만 남은 선수들은 모두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하거나 야구와 관련된 일에 종사한다. ‘SK 왕조’가 다른 왕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김성근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1년에 한 차례씩 모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12월 4일 인천의 한 음식점에서 2년 만에 ‘SK 왕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인해 단체 모임을 가질 수 없었던 그들은 최근 일본 프로야구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김성근 감독과 함께 맥주잔을 주고받으며 오랜만에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선 추억 여행에 빠졌다.
‘SK 왕조’ 모임의 회장인 가득염 전 코치는 김성근 감독과의 일화를 떠올리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2006시즌을 마치고 롯데에서 코치직 제안을 하자 팀을 나와 방황하던 그에게 손을 내민 이가 김성근 감독이었다고 한다. 당시 가득염의 나이는 38세.
“감독님이 전화로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요. SK 감독을 맡고 선수 구성을 하는 상황에서 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주위에서도 이렇게 은퇴하는 게 아까우니까 선수 생활을 계속 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SK로 들어갔거든요. 그런데 와, 정말 힘들었습니다. 감독님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 분이에요. 한번 말씀하신 건 꼭 지켜야 했어요. 30대 후반의 투수가 뒤늦게 새로운 팀에서 적응할 겨를도 없이 감독님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당시엔 감독님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원망으로 점철된 SK에서의 선수 생활은 우승이란 값진 결과로 기쁨을 안겨줬다. 가득염은 혹독한 훈련의 대가로 인생을 배웠다고 말한다.
“선수 때는 저만 힘든 줄 알았어요.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당시 감독님이 더 힘드셨다는 사실을요. 우린 혼자지만 감독님은 그 많은 선수들을 다 상대해야 하잖아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만치 않은 시간들이었을 텐데 선수들 앞에선 단 한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셨거든요.”
가득염에게 ‘SK 왕조’ 시절은 인생을 배운 시간들이었다. 평소 무뚝뚝하고 마음을 내보이지 않던 김성근 감독이 가끔씩 “힘들어도 참아내라”하며 툭 던지는 메시지에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김성근 감독님에 대해선 호불호가 나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감독님은 야구뿐만 아니라 인생을 가르쳐주신 분이에요. 제 입에서 절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요.”
2022시즌 ‘와이어 투 와이어’ 정규시즌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 SSG 랜더스의 김원형 감독도 ‘SK 왕조’ 모임에 일찍 모습을 드러냈다. 김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선수 생활 21년 중 10년을 김성근 감독님과 함께했다”며 오랜만에 옛 추억에 잠겼다. 김원형 감독은 20대 중반에는 쌍방울에서, 그리고 30대 중반에 SK에서 김성근 감독과 선수로 만났다.
“SK에 있을 때 김성근 감독님이 사령탑을 맡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반가웠어요. 쌍방울 시절과는 달리 저도 철이 들었고, 감독님의 훈련이 어떤 도움을 줬는지 몸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어이쿠 또 죽었다’ 싶었지만 저를 다시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가득염 선배, 조웅천 코치, 그리고 제가 투수조 고참이었거든요. 후배들 앞에서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훈련 스케줄을 소화했던 것 같아요.”
김원형 감독은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을 상대로 2패 후 4승을 거두며 우승했던 기억을 꺼내 보였다.
“당시 김성근 감독님도 지도자로 한국시리즈 우승이 처음이었고, 저도 선수로 처음 맛본 우승이었습니다. 올 시즌 SSG 감독으로 첫 우승을 해보니 2007년 감독님이 처음 우승하셨을 때의 기분이 어떠하셨을지 조금은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선수들은 지도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잖아요. 지도자는 만들어야 하는 입장이고요. 저도 ‘SK 왕조’ 시절엔 감독님을 따라갔는데 지금은 제가 이끌어야 하는 처지라 감독이 되고 나서 김성근 감독님을 더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07년 SK에서의 첫 우승과 지도자로 경험한 2022시즌 우승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네요.”
2007년 김원형 감독은 SK 주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의 투수들도 뛰어난 실력을 자랑했지만 이호준, 박경완, 김재현, 정경배, 박재홍, 정근우 등 야구 잘하는 후배들이 선배들을 믿고 잘 따랐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의 부임 첫 해부터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감독 김원형이 보는 감독 김성근은 어떤 지도자일까.
“선수 때는 잘 몰랐는데 제가 감독이 돼보니까 당시 김성근 감독님이 진심으로 선수를 위해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때는 감독님한테 서운한 점도 있었거든요. 세월이 흘러 여러 경험들을 통해 조금씩 감독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선수가 얼마나 소중한지, 선수를 어떻게 해서 이끌어가야 하는지를 뒤늦게 알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감독님을 더 존경하게 됐습니다.”
SPOTV 야구 해설을 맡고 있는 김재현 위원은 선수 시절 LG에서부터 SK까지 김성근 감독과 남다른 인연을 이어갔다. LG 시절에는 김 감독의 애제자였다면 SK에서 다시 만난 김 감독과 김재현은 불화설이 나돌 만큼 감정의 골이 깊었다. 이유는 당시 김 감독이 김재현을 우투수 플래툰시스템 요원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재현은 MVP(최우수선수)를 받을 정도로 맹활약을 펼쳤고 우승의 주역으로 떠오르며 시즌 동안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마음이 아파요. 감독님한테 감정이 남아 있을 정도로요. 그렇다고 감독님한테 속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저한테 아픔도, 기쁨도 주신 분이라고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저랑 감독님은 애증의 관계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저는 감독님을 존경합니다. 1년에 한두 번씩은 직접 뵙고 맥주마시면서 야구 이야기를 나눠요. 제가 감독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일 겁니다.”
김재현 위원은 ‘SK 왕조’만의 특별함에 대해 “아마 KBO리그에 22연승을 달성한 팀은 SK가 유일하지 않겠느냐”면서 “육체적인 고달픔과 힘듦은 존재했지만 그 과정을 이겨낸 선수들의 끈끈함이 팀워크로 나타났고, 그 팀워크가 우승으로 이어졌다”고 회상한다.
‘SK 왕조’ 모임이 시작된 배경에는 LG 이호준 코치가 존재한다. 2017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 이호준은 그 해 연말 정근우와 식사를 하다 김성근 감독을 떠올렸고, 당시 일본에 있는 김 감독에게 전화를 하게 된다.
“술을 한잔한 상태였어요. 은퇴를 해서 그런지 감독님이 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술의 힘을 빌려 전화를 드렸고, ‘SK 왕조’ 모임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죠. 감독님도 그때 그 멤버들을 보고 싶어 하셨고요. 다음 날 아침에 SK 시절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들 중심으로 연락을 취했고, 모두 감독님과 자리를 하고 싶다고 해서 모임을 만들었던 게 ‘SK 왕조’ 모임의 시작이었습니다. 해마다 모임을 갖다가 코로나19로 인해 감독님과 개별적으로만 만났었거든요. 2년 만에 다시 모인 게 오늘입니다. 감독님이 지난해 팔순이셨는데 그때 이런 모임을 갖지 못해 많이 아쉬웠어요.”
‘SK 왕조’는 은퇴한 선수들만 참석할 수 있다. 그래서 정근우, 윤길현, 채병용 등은 은퇴 후 처음으로 이번 모임에 나올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 이호준 코치는 “이 자리에 김광현만 나오면 모두 모인다”면서 “김광현, 최정 등은 현역이라 시간이 필요하고, 빨리 올 줄 알았던 김강민이 아직도 뛰고 있어 기다리는 중”이라며 웃음을 터트린다.
키움 히어로즈 박재상 코치는 ‘SK 왕조’에 대해 “나를 지금까지 야구계에 몸담게 해준 자양분”이라고 말했고, 정근우는 “SK에 이어 한화, 그리고 ‘최강야구’까지 김성근 감독님과의 인연이 계속되고 있다”면서 “감독님이 안 계셨다면 정근우란 야구선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로 감사함을 나타냈다.
SSG 채병용 코치는 ‘SK 왕조’의 아픔으로 2009년 KIA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나지완한테 끝내기 홈런을 맞았을 때를 떠올렸다.
“그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추억이기도 하고요. 지금도 ‘아, 내가 그때 다른 구종을 던졌다면 어떻게 됐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승을 놓친 후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제가 잘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경기 후 동료들이 그라운드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니까 너무 미안했어요. 김성근 감독님도 저를 믿고 마지막에 올려주셨는데 그에 보답하지 못한 죄송함이 컸습니다.”
선수 시절의 채병용은 김성근 감독의 혹사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채 코치는 단호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오히려 감독님한테 감사했어요. 투수라면 누구나 마운드에 더 자주 오르고 싶을 거예요. 제게 그런 기회를 주신 감독님이 고마웠지 제가 많은 공을 던진다고 해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감독님의 양아들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혹사라고 믿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2019시즌 후 롯데와 재계약이 되지 않으면서 팀을 나온 다음 은퇴 수순을 밟았던 윤길현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윤길현은 은퇴 후 야구 외적인 일에 몰두하다 최근 스포츠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야구 레슨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김성근 감독님 뵙고 싶어서 나왔어요. 오랜만에 뵈니까 감독님 얼굴에 주름살이 많이 생긴 것 같네요. SK는 제가 젊음을 바친 팀입니다. 가득염, 조웅천, 김원형 등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뛰며 야구의 열정을 배울 수 있었어요. 당시 훈련이 힘들 때는 도망가고 싶었는데 김성근 감독님은 그런 제게 왜 이런 훈련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도 알려주셨고요. ‘SK 왕조’ 시절의 저는 정대현 선배한테까지 가는 길을 연결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맡았습니다. 감독님이 주신 기회였어요. 오랜만에 여기 나와 감독님과 선배님들을 만나니 은퇴 후 잊고 있었던 야구인의 피가 돌기 시작하는 것 같네요.”
3시간 넘게 이어진 ‘SK 왕조’ 모임은 김성근 감독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마무리됐다. 김 감독을 모시고 서울로 동행하는 이가 김재현 해설위원이었다. 김 감독은 남은 제자들에게 맥주 한잔 더 하고 가라며 두툼한 봉투를 건네고 떠났다.
김성근 감독에게 물었다.
“감독님한테 ‘SK 왕조’는 어떤 의미인가요?”
“나한테 SK 시절은 미안함이고 그리움입니다. 칭찬받은 선수들보다 혼난 선수들이 더 많은데도 이렇게 모여서 마음을 나누니 감사하죠. 모두 좋은 지도자로, 야구인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아 고마울 따름입니다. 무엇보다 김원형을 우승 팀 감독으로 만나니 더 기분 좋네요.”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