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고 밀고 겨우 타는 아찔한 출근길에 안전대책은 ‘물음표’
국토교통부와 서울교통공사가 준용하고 있는 철도 사고 매뉴얼에는 밀집 사고와 관련한 내용이 아직까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 사람들이 붐비는 출퇴근길, 사고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안전대책은 딱히 없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서울교통공사는 출퇴근시간대 서울시 주요 혼잡역을 중심으로 안전관리 인력을 배치해 운용하고 있다. 안전관리 인력이 배치되는 시간은 오전 8시~9시 30분, 오후 6시~7시 30분이다. 공사에 따르면 지난 21일 기준으로 사당, 신도림, 서울역, 홍대입구역 등 서울시 24개 주요 혼잡역에 본사 차출 인력 232명이 안전요원으로 배치돼 있다. 그러나 안전요원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한 시민은 “처음에만 동선을 안내하며 반짝 운영하다가 지금은 구두로만 안전 관리를 해서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사람 많아 늘 걱정” 오늘도 아슬아슬한 출근길
지난 21일 오전 8시,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인 신도림역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 열차가 승객을 태우고 떠나기 바쁘게 새로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스크린도어 앞으로 길게 늘어섰다. 곳곳에서 아슬아슬한 장면이 펼쳐졌고, 매일 반복되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열차에 마지막 탑승객이 몸을 억지로 밀어 넣자 열차 안에 서 있던 승객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매일 이렇게 위험한 출근길을 경험하는 시민들 사이에서는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신도림역에서 환승해 2호선을 이용해 출근한다는 30대 중반 직장인 정규성 씨는 “사람이 많다보니 압사를 하거나 계단에서 넘어져 다칠까봐 걱정된다”고 하소연했다. 20대 초반 직장인 진 아무개 씨는 “사람이 너무 많아 내릴 역을 놓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22일 오전 8시,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의 환승역인 사당역의 출근길 모습도 비슷했다. 환승 열차를 이용하기 위해 계단을 오른 시민들은 스크린도어 앞에 이중삼중으로 줄을 섰다. 사당역에서 2호선 열차를 다섯 번이나 그냥 보내고 겨우 탑승한 적도 있다는 20대 중반 직장인 유 아무개 씨는 “사람이 꽉 찬 지하철이 흔들려서 다같이 ‘어어어’ 하면서 넘어질 뻔한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21과 22일, 실시간 차내 혼잡도 정보를 제공하는 ‘TMAP대중교통’ 앱에 따르면, 신도림역과 사당역을 지나는 열차는 대부분 ‘혼잡’ 상태였다. 지하철의 실시간 혼잡도 데이터는 ‘여유, 보통, 주의, 혼잡’ 단계로 분류되는데, 가장 높은 단계인 ‘혼잡’은 혼잡도 150% 이상일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차 내에 240명 이상이 탑승해 열차 안에서 이동이 불가능한 상태다.
#지하철 사고 86%가 교통·안전사상사고
철도안전정보 종합관리시스템에 따르면 2017~2021년 발생한 철도사고는 모두 397건이다. 이 중 일반열차(무궁화호, 새마을호 등)와 고속철도(KTX, SRT)를 제외한 도시철도에서 일어난 사고는 모두 162건이었다. 162건의 사고 유형을 보면, 도시철도 운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고인 ‘교통사상사고’가 85건으로 가장 많았고, 역내 시설 이용 중 발생한 사고인 ‘안전사상사고’는 55건이었다. 둘을 합치면 도시철도에서 일어난 사상사고의 86%가량이다. 이 외에 충돌·탈선·화재 사고 12건, 철도시설 파손사고 6건, 건널목사고 3건 등이 발생했다.
심지어 역사 내에서 승객이 넘어져 사망한 사고도 있었다. 2018년 12월 서울 지하철 우이신설선에서 이용객이 승강장에서 넘어져 사망했다. 같은 해 서울 지하철 3호선에서 승객이 승하차하다 넘어져 중상을 입는 사고도 발생했다. 지금까지 원인이 ‘압사’로 분류된 사고는 없었지만, 유동인구가 몰리는 상황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울 지하철이 위험하다는 지적은 진작부터 제기됐다. 2016년 서울시 정책 싱크탱크인 서울연구원은 ‘신종 대형 도시재난 전망과 정책방향’ 연구에서 서울시가 관심을 두어야 할 새로운 도시재난으로 ‘압사사고’를 꼽았다. 특히 지하철역, 대형집객시설 등 다중밀집장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압사사고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구를 진행한 환경안전연구실 신상영 박사는 “출퇴근길이나 행사 상황에서 사람이 한꺼번에 몰리는 지하철은 몹시 위험하고, 그로 인해 큰 사고가 날 개연성이 (이태원 참사보다) 더 높다고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토교통부나 서울교통공사는 출퇴근길 지하철과 역사 내 안전을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지하철 사고 대응 매뉴얼에는 승객 대피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이나 최근 경각심이 높아진 '압사'에 대한 대책이 빠져 있었다. 국토교통부는 지하철 및 고속철도 사고에 대비해 ‘도시철도 대형사고 위기관리 표준 매뉴얼’을 만들어 준용하고 있다. 관련된 세부 대응절차는 서울교통공사가 ‘도시철도 대형사고 현장조치 행동매뉴얼’을 만들어 관리 중이다. 그러나 100쪽이 넘는 두 개의 매뉴얼에 ‘압사’, ‘군중’, ‘밀집’, ‘출퇴근’ 등 군중밀집사고 대응에 대한 언급은 없다.
두 개의 매뉴얼은 도시철도 위기 유형을 6가지로 분류했다. △열차 충돌 △열차 탈선 △열차 및 역사 화재 △열차 폭발 △열차 침수 △터널, 선로, 역 구내에서 탈선·화재·충돌 등 복합적 재난 상황이다. 그러나 출퇴근길이나 공연·행사처럼 한꺼번에 승객이 몰려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한 대비책은 없다. 매뉴얼의 마지막에 별첨된 ‘국민행동요령(교통약자 우선)’에도 화재시 대피요령, 성인 심폐소생술 방법 등은 명시돼 있지만 행사·출퇴근길 등 과도한 인파가 몰린 상황에서 승객이 몸을 보호하는 방법이나 환승로·출구가 복잡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압사의 경우 기존 매뉴얼로 대체 가능하다고 판단해 그동안 따로 포함하지 않았다”며 “다만 최근 시위나 행사 영향으로 역사 내 인파가 몰리는 경우를 대비해 ‘무정차’ 등은 매뉴얼에 포함할 계획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 “사고 개연성 높은 지하철, 매뉴얼 개선돼야”
일요신문이 12월 1일 국토교통부와 서울교통공사에 해당 매뉴얼의 최신본을 청구해 확인한 결과 표준 매뉴얼이 개정된 시점은 2020년 10월, 현장조치 행동매뉴얼이 개정된 시점은 2022년 8월이었다. 6년 전 정책 싱크탱크의 제언에도 대응 매뉴얼엔 다중밀집사고 내용이 반영되지 않은 것이다.
서울연구원은 서울시가 준용하는 현장조치 행동매뉴얼의 경우 재난 대응조치와 재난상황에 대한 기술이 빈약한 편이라고 분석했다. 신상영 박사는 “현재 지하철 사고 대응 매뉴얼은 승객들이 재난 상황에서 질서정연하게 대피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며 “재난 상황에서 군중은 패닉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 매뉴얼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 박사는 “노후한 지하철 시설에 매일 출퇴근 인파가 몰려 사고가 날 개연성이 높은 만큼 다중안전사고에 대한 대책을 더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며 “특히 지하철역 시설물 중에서도 비좁은 통로나 출구가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국토교통부 철도안전정책과 관계자는 “압사 사고 등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만큼 전문가 TF를 구성해 매뉴얼 개정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현이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