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억 기금 출연 땐 ‘일본 논리 수용, 피해자 우롱’ 비판 불보듯…일본제철과 관계 악화 우려도
#'지원재단'은 공공기관, 사실상 정부 요청
대법원은 2018년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전범기업에게 강제징용 피해자 1인당 1억~1억 5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고노 다로 당시 일본 외무상은 대법원 판결 직후 “배상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끝난 이야기”라며 “한국 측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모든 수단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한일 외교 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2019년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제한했다. 이후 국내에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시작됐고, 일부 일본 기업은 한국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국 기업 역시 일본과의 거래가 줄어들면서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다.
정치권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내놓고 있다.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방안 중 하나는 한국 기업과 일본 기업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변제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이 참여하고, 한국에서는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수혜를 본 기업이 참여한다는 내용이다. 특히 포스코는 한일청구권 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포스코가 앞장서서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지난해 5월 인사청문회에서 “일본에게 청구권 자금을 받아서 포항제철을 짓고 여러 가지 발전을 이뤘으니까 일본에게 받은 돈으로 발전한 기업들은 우선적으로 (강제징용) 피해자한테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에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정관에 ‘일제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피해보상 및 변제’를 추가하려 하고 있다. 포스코에게 40억 원의 기금을 요청한 사실도 알려졌다. 정관 개정 및 포스코의 기금 출연이 이뤄지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포스코로부터 받은 돈으로 강제징용 피해자를 지원할 수 있는 근거와 재원이 생기게 된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은 행정안전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요청은 사실상 정부의 요청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러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관계자는 “예전부터 포스코에 기금을 요청했는데 최근에야 이슈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 입장에서 40억 원이 부담되는 수준의 금액은 아니다.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포스코홀딩스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지난해 9월 말 기준 7조 4953억 원에 달한다. 뿐만 아니라 포스코홀딩스는 지난해 1~3분기 5조 2754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증권가에서는 포스코홀딩스가 올해도 수조 원의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포스코가 섣부르게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기금을 출연하면 후폭풍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일본 정부의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배상이 끝났다’라는 논리를 수용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황명선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를 받기는커녕 보상 주체를 우리 기업으로 바꾼 엉터리 배상은 강제동원 피해자를 우롱하는 2차 가해”라며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일본 전범기업이 아닌 우리 기업의 기부로 보상하겠다고 밝힌 윤석열 정부의 황당무계한 발상을 그대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다. 일본제철이나 미쓰비시중공업 등 전범기업이 자발적으로 피해자 배상에 참여할 가능성은 낮다. 법원은 이들 전범기업에게 국내 자산 매각까지 수차례 요청했지만 이행되지 않고 있다. 강제매각 명령에도 항고를 진행하면서 버티고 있다. 이 때문에 전범기업 대신 피해자 지원에 뜻을 같이 하는 일본 기업이 참여해 대위변제 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하지만 피해자들 사이에서 대위변제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측은 “일부에서 거론되는 대위변제 방안은 의무 없는 자가 자발적 모금이나 출연을 통해 피해자한테 대신 돈을 지급하는 방식”이라며 “피해자들이 왜 가해자로부터의 정당한 배상이 아니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로부터 기부를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포스코가 기금을 출연하면 논란이 커질 수 있다.
포스코는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공식적으로 기금 요청을 하면 검토하겠다는 입장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강제징용 피해자와 관련한 공식 입장은 내지 않고 있다. 민감한 사안인 만큼 논란에 연루될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제철과의 합작법인 PNR도 압박 받아
포스코는 일본제철과의 합작법인 PNR과 관련해서도 직간접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 포스코는 2008년 일본제철과 합작법인 PNR을 설립했다. 포스코와 일본제철은 각각 PNR 지분 70%와 30%를 갖고 있다. PNR의 주요 사업은 철강 생산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의 재활용이며 2021년 매출 391억 원을 기록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법원에 일본제철의 PNR 지분 압류 후 매각을 요청했다. 법원은 2021년 말 피해자의 요청을 받아들여 PNR 지분 매각 명령을 내렸지만 일본제철은 항고장을 제출했다. 법원은 지난해 9월 항고를 기각했지만 일본제철은 지난해 12월 재항고에 나섰다. 일본제철이 항고를 반복하면서 PNR 지분 매각도 기약이 없는 상태다.
일본제철이 한국 법원의 판결을 수용하더라도 PNR 지분 30% 매각은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포스코가 PNR 지분 70%를 갖고 있는 이상 나머지 지분 30%로는 경영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PNR은 2020년 반짝 흑자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만성 적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 배당 수익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포스코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차원에서 PNR 지분 30%를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제철이 보유한 PNR 주식 234만 3294주는 액면가 5000원으로 계산하면 117억 1647만 원이다. 그러나 포스코가 법원 명령에 따라 PNR 주식을 인수하면 일본제철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일본제철 지분 1.65%를 갖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도 2021년 12월 “일본제철의 자산이 실제로 매각된다면 이미 경색된 한일관계에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