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 5차전 잊지 못해…감독 이전에 선배로서 우리 선수들에게 감사”
감독 2년 차에 맞이한 한국시리즈. 당시 홍원기 감독의 별명은 ‘오늘만 사는 남자’였다.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절묘한 투수 교체 타이밍과 대타 작전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그런 홍 감독에게 키움은 계약 기간 3년에 계약금 2억 원, 연봉 4억 원 등 총액 14억 원이란 재계약을 선물했다. 치열했던 2022년을 보내고 휴식을 통해 심신을 재정비한 홍원기 감독을 1월 10일 고척스카이돔 감독실에서 만났다.
―휴가 잘 보내셨나요? 벌써 새해고, 어느새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있네요. 지난 한국시리즈에서 인상적이었던 여러 장면들 중 하나가 인사였어요. 경기 마치면 그라운드로 나와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
“코로나19로 관중 없이 경기를 치렀잖아요. 이전에는 그 소중함을 잊고 있다가 코로나19로 경기장을 찾는 관중들이 얼마나 소중한 분들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그분들이 보내는 응원과 박수 속에서 야구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절감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할 수 있었어요.”
―지난 시즌 포스트시즌에서 가장 잊지 못 할 장면을 꼽는다면 어떤 경기가 될까요?
“한국시리즈 5차전이죠. 아마 그 경기는 패한 우리나 이긴 SSG 선수들도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SSG 선수들도 명경기를 펼쳤고, 우리 선수들도 최선을 다한 경기였습니다. 단 결과만 안 좋았을 뿐이죠.”
―한국시리즈는 1차전부터 6차전까지 정말 드라마처럼 극적이었어요.
“아무리 유명한 작가가 글을 쓰더라도 그런 드라마는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그만큼 예상을 빗나간 경기들이 펼쳐졌고,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야구계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지만 지난 한국시리즈처럼 매순간 짜릿했던 그런 경기들은 인생 경기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히어로즈 창단 때 전력분석원으로 시작해서 수비코치, 수석코치, 그리고 지금의 감독 자리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키움의 ‘가을야구’를 가장 많이 경험했을 텐데요, 그 부분이 2022시즌을 치르는 데 어떤 도움이 됐을까요?
“야구는 사람이 하는 운동이라 실수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어떻게 해야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큰 경기에선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보고 배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야구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것도 다시 깨달았고요.”
―지난 시즌 치르며 성적의 높낮이로 인해 팬들의 원망과 응원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포스트시즌에선 모든 키움 팬들이 감독의 리더십에 큰 박수를 보내더군요.
“정규시즌은 3연전을 준비하고, 6연전, 한 달을 준비하지만 포스트시즌은 한 경기의 패배에 따른 후유증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한 경기 한 경기에 모든 걸 쏟아 부어야 했습니다. 제가 지난 시즌을 치르며 자주 사용했던 단어 중 하나가 ‘시행착오’였습니다. 2021년 감독을 맡아 첫 시즌을 보내고,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치르며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거든요. 나로 인해 패한 경기를 돌아보고, 내 실수를 곱씹으면서 2022시즌의 자양분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시행착오들이 팀을, 선수들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을 것이고요. 그 부분이 2022년 포스트시즌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그리고 감독은 욕먹는 자리입니다. 물론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인내가 필요한데 팬들의 비난도, 응원도 다 감당해야 하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한현희·정찬헌 선수를 엔트리에서 제외시킨 이유가 궁금합니다.
“사실 이렇게 선수 이름을 거론하는 게 마음 아픈 일입니다. 시즌 내내 동고동락하며 팀에 많은 도움을 준 선수들이라 끝까지 함께 가고 싶었지만 내일이 없는 경기였고,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했고, 그러려면 팀 전체를 보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정을 내렸지만 그 결정을 하기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홍원기 감독은 코치로 일할 때는 선수들과 자주 대화를 나누고, 가끔은 경기 후 맥주도 한잔하면서 거리를 좁혀갔는데 감독이 되고 나선 그런 관계 유지가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여러 지도자들이 감독이 되면 왜 외롭다고 하는지 알게 됐다면서 “정말 많이 외롭습니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다시 한국시리즈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1차전 선발이 안우진이었는데 2와 3분의 2이닝 동안 2피안타 2실점을 기록하고 물집으로 조기 강판됐어요. 당시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키움이 지난 시즌을 치르고 한국시리즈까지 온 데는 안우진 선수의 지분이 엄청 큽니다. 1선발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을 이끌어왔으니까요.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은 당연히 안우진의 몫이었습니다. 그랬던 선수가 물집으로 공을 못 던지는 상황이 됐으니 엄청난 변수가 발생한 것이었죠. 그런데 선수들은 오히려 안우진 상황을 지켜보며 투지를 불태웠던 것 같아요.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1차전부터 전병우의 대타 카드가 절묘했습니다. 9회 4-5로 뒤진 1사 2루에서 대타 전병우의 투런포가 승리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10회 또 다시 동점 상황에서 전병우의 좌전 적시타로 1점을 앞설 수 있었고요.
“정규시즌을 돌아보면 전병우가 극적인 끝내기 안타나 홈런을 많이 쳤거든요. 당시 9회 공격 때는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병우를 내세웠습니다. 부디 큰 거 한 방만 치자고 빌었는데 그걸 해내더라고요. 전병우는 선수 시절의 제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뭐랄까, 주전은 아니지만 팀에 필요한 선수의 역할을 잘하고 있거든요. 감독 입장에선 이런 역할을 해주는 선수가 많을수록 팀을 이끌어가기가 편해요. 전병우가 9회 터트린 역전 투런포는 잊지 못 할 장면으로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경기를 승리하면 경기 후 어떤 기분이 들까요?
“1차전 마치고 한동안 감독실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만큼 모든 걸 쏟아 부었던 경기였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마지막 전투인 것마냥 싸웠습니다. 한국시리즈가 시작되기 전 모두 키움의 열세를 예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1차전을 잡은 건 굉장히 짜릿한 흥분을 안겨줬어요. 스포츠의 최고 감동은 의외성이잖아요. 그 의외성에 팬들이 감동하고 열광하고 희망을 갖는 것이고요. 지난 시즌 키움이 그런 의외성을 많이 보여줬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과분한 응원을 받았습니다.”
홍원기 감독은 코치 시절 원정 경기를 가면 경기 전 인근 산을 찾았다. 정신을 맑게 하고, 체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감독 되고 나선 도저히 산에 오를 체력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등산 대신 산책으로 루틴을 바꿨다. 한국시리즈 앞두고 그는 경기 전 숙소 주변을 산책하며 마음을 다잡곤 했다.
―안우진이 언제 다시 등판하는지도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결국 5차전 선발 등판해서 호투를 펼쳤는데 물집이 호전된 상태였나요?
“4차전을 앞두고 안우진이 5차전에 꼭 나가겠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더라고요. 정말 눈빛이 간절했습니다. 코칭스태프, 의료팀과 상의 후 4차전 다음 날인 휴식일에 5차전 선발로 안우진을 결정했습니다. 안우진이 호투를 펼쳤지만 SSG 선수들의 노련함과 경험에 우리가 밀렸습니다. 그런 불안감이 9회 김강민한테 쓰리런을 내주게 되었고요.”
―5차전의 패배가 6차전까지 힘겹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준우승으로 시즌을 종료했는데요, 당시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아요.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한순간에 그 운명이 갈린다는 게 패자 입장에선 비참하지만 감독 이전에 야구 선배로서 우리 선수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싶었어요. 원 없이 싸웠던 한국시리즈였으니까요.”
―한화 이글스 손혁 단장과 동기입니다. 손 단장이 키움 감독을 맡았을 때 수석코치였는데요, 오랜 시간 코치직을 맡았지만 감독 데뷔가 동기에 비해 다소 늦은 편이었습니다.
“저는 당시에도 팀과 선수들만 생각했습니다. 감독 여부는 제가 정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동안 다른 팀에서 코치직 제안도 있었습니다. 쉽게 옮기지 못했던 건 히어로즈에 대한 애착 때문입니다. 히어로즈를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제가 하고 싶어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제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다 기회를 맞이했고, 2021년 1월 뒤늦게 감독으로 취임할 수 있었죠. 감독은 많은 걸 책임져야 하는 자리더라고요. 저 혼자만이 아니라 코치들도 있고, 제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팀과 연관이 있는 터라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원정 가서 패하고 숙소로 돌아오면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사람의 감정은 날씨처럼 오락가락하는 터라 그 다음 날 이기면 전날의 아픔이 싹 가시고…. 그런 점에 이 자리의 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홍원기 감독한테 히어로즈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홍 감독은 “내 명찰이고 내 집이다. 홍원기 하면 히어로즈고, 히어로즈 하면 홍원기가 되듯이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다”라고 설명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