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주장이 강한 완벽주의자는 자기 관점이나 태도만 옳다며 그 방식을 강요한다. 그런 사람이 힘을 가졌다면? 그 경우는 약도 없다. 그 경직성과 오만이 폭력이 되어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마치 신인 것처럼 당신의 삶을 통제하려 설치는 사람을 보면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대립하면서 대항하거나 밀어내려 애쓰는가. 나는 비겁하게도 그냥 슬며시 피하는 스타일이다. 거기다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태도와 주장이 있다. 우리도 그들처럼 삶과 함께 형성된 우리의 태도와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문제가 없다고, 나아가서 옳다고 믿고 있다. 누구에게나 내로남불이 생기는 이유다. 그런데 옳다고 믿는 거기에서 고통도 일어난다. 그 고통이 성장통일 수 있을까.
오랜만에 옛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옳다고 저질러 놓은 일과 행태가 사실은 내 아집의 고집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성장은 거기서 일어난다고.
갑자기 왜 ‘아웃 오브 아프리카’였을까. ‘더 글로리’가 세계적인 화제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화면을 켰다가 그냥 돌려버렸다. 잘 쓰고 잘 만든 드라마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너무나 자극적이었다. 실제적으로 학창시절을 그렇게 보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물리적이거나 언어적인 폭력 장면들이 너무나 잔인해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젊은 날 보고 좋아했었지만 슬쩍 지나간 영화들을 시간이 있을 때 한 편씩 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아웃 오브 아프리카’였고, 그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대학을 다닐 때 나는 사랑한다면서 단호하게 결혼은 원하지 않는다는 데니스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안타까운 사랑에 목이 마른 여인, 카렌의 관점에서 영화를 읽었던 것 같다.
아프리카에 와서 농장을 경영하는 일을 하는 카렌은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고, 선한 의지도 있는 유럽의 귀족이다. 그녀는 아프리카로 들어가면서도 유럽의 가구들과 그릇들을 챙겨갈 정도로 취향이 중요한 여인이면서 또 한편에서는 원래 그들의 땅이었다며 원주민의 아이들 교육을 위해 학교도 짓는 여인이다.
그에 비해 데니스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그는 직업에 성실하다 할 수 없으나 삶에 성실하고, 책임감보다는 직관에 따라 행동하고, 카렌처럼 살지 않지만 카렌의 삶을 존중한다.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사랑하더라도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하는 존재다. 그는 카렌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들고, 카렌을 사랑하고, 마침내 카렌의 가구들이 익숙해지기까지 했지만 결혼이란 제도로 얽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카렌은 사랑하는데 왜 결혼은 싫은 거냐며 결혼으로 소유되지 않는 남자를 내쫓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가 주검으로 돌아온다. 스스로 몰던 비행기 사고다. 남자의 장례식에서 카렌의 조사가 이 영화의 백미다.
“젊은 날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젊은 날의 영광도 덧없이 지나간다. 젊음, 빛나는 그 월계관의 영화도 꽃보다 먼저 시드는구나. 주여, 이제 데니스의 영혼을 데려가소서. 당신이 우리에게 보내주었던 그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사랑했으나, 그는 우리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남자가 떠나간 후에야 카렌은 온전히 남자를 이해하며 자기 자신도 자유로워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나이가 들어야 평온함과 자유에 대한 지각이 생겨나고, 그때서야 비로소 집착이 조금씩 누그러져 온갖 지배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나이가 들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집착과 지배욕이 사랑까지도 왜곡한다는 것일 것이다. 결국 내 집착과 지배욕이 문제였음을 깨닫게 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다. 카렌처럼!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