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교와의 위험한 로맨스 ‘사약 케미’로 호평…지금은 대학로 공연 “기본으로 돌아가는 시간 필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로 배우 정성일(43)을 처음 알게 된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그를 향해 "김은숙 작가가 발견해 낸 새 얼굴"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약해 온 배우들이 안방극장을 사로 잡을 때마다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정성일을 오래도록 지켜본 팬들에게 이런 찬사는 뒷북처럼 들릴 터다. 2002년 데뷔 후 지난해 '더 글로리'로 20년간 모아온 내공을 쏟아낸 정성일은 '진흙 속 진주'가 아닌 그저 처음부터 빛나던 '진주' 그 자체였으니까.
"'더 글로리' 촬영 중간에 김은숙 작가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여쭤본 적이 있었어요. 혹시 하도영이란 인물을 쓰시면서 생각하신 이미지나 다른 배우가 있으셨냐고요. 작가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냥 너였어'. 의아했죠. 저를 대체 왜요(웃음)? 작가님이 (윤)세아 누나 때문에 '비밀의 숲 2'를 보셨는데 거기 나온 저를 보시고 '하도영은 무조건 쟤야' 하고 쓰신 거래요. 왜 하필 저였을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냥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죠(웃음)."
'더 글로리'에서 정성일이 연기한 하도영은 딱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정의된다. '나이스한, 개새끼'. 지독한 학교폭력으로 영혼마저 훼손된 여자 문동은(송혜교 분)이 마련한 복수의 길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그는 문동은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가해자 박연진(임지연 분)의 남편이다. 준재벌급의 막강한 재력을 갖추고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완벽한 가정도 소유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감정의 한 축이 무너져 내린 듯한 소시오패스적 면모를 보이는 '쎄한' 인물이기도 하다. 김은숙 작가가 처음부터 자신을 하도영으로 점찍었다고 강조했어도 의아함을 떨쳐내지 못했던 데엔 이 같은 하도영의 양면적인 모습 탓이 컸다는 게 정성일의 이야기다. "나이스면 나이스지, 개새끼는 뭘까요?" 대본을 받은 날부터 이 고민이 계속됐다며 정성일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이 수식어를 질문하실 때 항상 '나이스한'은 그대로 말씀하시면서 '개새끼'는 조심스럽게 덧붙이시더라고요, 왜지(웃음)? 하도영은 그 말처럼 양면성을 가진 캐릭터다 보니 이런 부분을 연기로 찾아내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시간이 꽤 걸렸던 것 같아요. 그래도 작가님이 명확하게 써주신 답안지대로, 대본에 하도영이 운전기사에게 와인을 주는 그 신에서 '나이스한 개새끼'라는 뜻을 제일 많이 찾을 수 있었어요. 보는 사람 입장에선 나이스하게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또 개새끼인(웃음)."
특히 국내에서 신드롬급 인기를 끈 작품이기 때문인지 '더 글로리'는 파트1이 마무리된 뒤 파트2를 기다리는 한 달여 동안 열혈 시청자들 사이에서 결말을 예측하는 글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기도 했다. 김은숙 작가가 매 신마다 심어 놓은 복선과 심지어 홍보 포스터에 들어간 의미심장한 상징까지 심도 깊은 해석도 이어졌다. 배우들 역시 시청자들의 날카로운 추리에 놀라고 감탄했지만, 정성일이 용납하지 못한 딱 한 가지 추측이 있었다고 했다. '하도영 무정자 설'이다.
"‘하도영이 무정자증이라 예솔이가 자기 딸이 아닌 걸 처음부터 알았다’는 말에 좀 당황했죠. ‘아니 내가 왜?’ 이러면서(웃음). 대체 어떤 점 때문에 그렇게 보였나…. 그리고 포스터를 보고 결말을 해석하셨던 분들이 계셨는데 저희도 (그런 상징이 담긴 걸) 몰랐었어요. 넷플릭스에서 처음부터 의도를 하고 제작했다고 하더라고요. 작가님도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열어놓고 파트1을 끝내셨던 것 같아요."
연진의 악행과 함께 자신이 사랑으로 키워낸 여덟 살 배기 딸 예솔(오지율 분)이 사실은 친딸이 아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도영이 어떤 결말을 선택할지가 동은의 복수와 함께 파트2의 가장 큰 화두였다. 사랑하는 아내가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을 속여왔다는 것도 모자라 딸의 친부는 도영이 인간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전재준(박성훈 분)이다. 이처럼 양육권을 포기한다 해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도영이지만, 그의 결정은 결국 예솔의 아버지로 남는 것이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을 택한 도영의 선택에는 그를 연기한 정성일의 아버지로서의 경험도 담겨있었다.
"저도 일곱 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애기 때부터 일하는 시간 외엔 다 육아에 집중하다 보니 애 하나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그런데 힘든 만큼 애가 커가는 걸 보면 또 정말 뿌듯하거든요. 그래서 하도영에게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어요. 그의 입장에선 자기의 모든 걸 덜어내고 대할 수 있는 생명이 바로 예솔이었을 테니까요. 드라마를 보시면 하도영이 유일하게 가장 환하게 웃을 때가 예솔이를 만날 때예요. 그 정도로 다 내려놓고 아이를 보며 웃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기른 정을 선택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게 선택의 충분한 이유가 됐을 거고요."
그런가 하면 연진의 악행을 이미 다 알고 난 뒤에도 그의 곁에 머물 것을 선택했던 하도영의 파트2 초반 태도에는 의견이 갈렸다. 동은이 '연진의 곁에 단 한 명도 남기지 않는다'는 완벽한 복수를 위해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을 알면서도 연진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동은을 더 오래 보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던 것. "하도영은 진심으로 박연진을 사랑했을까"라는 질문이 전제되는 이 해석에 대해 정성일은 사랑과 더불어 도영이 연진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의 곁에 남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아마 도영은 시청자 분들 해석대로 선택을 하진 않았을 거예요. 만일 그렇다면 동은을 보기 위해 연진을 이용하는 거니까 연진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 버리거든요. 이렇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면 그 다음 (이혼 등) 결정에 도영이 떳떳하지 못하게 돼요. 저는 앞으로의 결정에 미안함이 조금이라도 섞이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도영에겐 그저 자신이 선택한 연진이기에, 명확하게 내 실수에 대한 책임이 있을 뿐이죠. 그래서 책임을 지기 위해 떠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만일 동은이를 오래 보고 싶어서 연진이를 떠나지 않는다면 도영이가 너무 사이코패스 같잖아요(웃음)."
그렇다면 '사약 케미'로까지 사랑 받은 동은과의 감정 흐름은 어땠을까.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을 그대로 뽑아 놓은 것 같은 둘의 첫 만남부터 감정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보며 시청자들은 이들의 '위험한 로맨스'를 티 나지 않게 응원하기도 했다. 비록 동은은 도영을 그저 복수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쓰고 말았을 뿐이었지만, 도영은 어느 정도 동은에게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이 질문을 놓고 정성일은 캐릭터 하도영과 인간 정성일이 느끼는 감정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저는 두 사람의 결말, 딱 거기까지가 좋았어요(웃음). 동은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도영이란 사람을 이용의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하도영이 더 나아갔다면 이건 또 명확한 불륜이 돼 버리니까요(웃음). 인간 정성일은 상대에게 호기심이 생기고, 설레고, 숨 막히게 하는 뭔가가 생긴다면 그걸 사랑으로 느낄 것 같은데 하도영은 그런 걸 사랑으로 인지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아마 사랑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순간 바로 거기서 멈췄겠죠."
처음 출연 제의를 들었던 날로부터 대본 리딩까지 꼬박 1년, 그리고 약 7개월 동안 이어진 촬영과 완성된 작품의 완전한 공개가 이뤄진 시간이 약 2개월여. '더 글로리'의 세상에서 2년 가까이를 보냈던 정성일은 요즘 대학로에서 연극 '뷰티풀 선데이'와 뮤지컬 '인터뷰' 공연에 한창이다. 그의 오랜 팬들에게 특히 더 친숙한 무대로 돌아간 정성일은 '더 글로리' 이후로 쏟아지는 러브콜에도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말을 강조했다. 배우로서 지나온 20년 시간을 되새겨 봐도 결국은 다시 기본을 택하게 된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여전히 저는 무대가 너무 좋아요. 기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은 늘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무대 활동은 계속 할 것 같아요. 어쨌든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한 번 작품 하나로 소비했으면 에너지를 새롭게 또 채워야 하거든요. 무대는 제게 있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보금자리이자 밥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어요(웃음). 앞으로 또 어떤 캐릭터, 어떤 작품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대에서 공연함으로써 제가 배운 것들을 덧입힐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