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파워게임에 학맥 등 갈등이 윤 대통령 방미 일정 조율 문제로 폭발설…‘윤’ 인사 스타일상 다시 중용 가능성도
김성한 전 실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윤석열 대통령 최측근 참모다. 윤 대통령과 초등학교 동창으로 ‘50년 지기’이기도 한 김 전 실장은 윤석열 대통령이 검찰총장을 그만둔 후부터 외교·안보 분야 ‘가정교사’ 역할을 해왔다. 윤석열 대선캠프, 인수위에서도 외교·안보 정책을 총괄했다. 윤석열 정부 초대 국가안보실장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 전 실장을 ‘용산의 왕실장’으로 칭하는 이들도 많았다.
김 전 실장 거취를 두고 묘한 뒷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3월 12일 무렵이다. 김일범 의전비서관이 3월 10일경 자진 사퇴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알려지면서였다. ‘대통령 통역사’로도 유명한 김 전 비서관은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러브콜을 보냈던 인사다. 일본 방문(3월 16일)을 목전에 두고 외교 프로토콜의 핵심 인사가 그만두자 그 배경에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외교가에선 김 전 비서관이 대통령실 내 알력다툼에 의해 사실상 밀려난 것이란 얘기가 새어 나왔다. 김성한 전 실장이 이끄는 외교라인에 대한 반발 움직임이 반영됐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만간 김 전 실장 거취에 변화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김 전 실장에 대한 윤 대통령의 각별한 신뢰, 방일·방미라는 대형 이벤트가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확대해석일 것이란 반응이 우세했다.
하지만 3월 26일 김 전 실장이 조만간 물러날 것이란 말이 빠르게 퍼졌다. 이문희 외교비서관이 사의를 표명한 직후였다. 외교·안보 실무를 총괄했던 이문희 비서관은 ‘김성한 사단’ 중에서도 핵심으로 분류되는 인사였다. 앞서의 김일범 전 비서관에 이어 이 비서관까지 물러나자 김 전 실장이 중대한 실책을 저질렀고, 이로 인해 윤 대통령이 교체를 결심했다는 구체적인 전언이 오르내렸다.
대통령실은 김 전 실장 사퇴설을 일축했다. 3월 28일 대통령실 관계자는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둔 시점에서 외교·안보 수장을 교체한다는 게 상식선에서 맞지 않다”고 했다. 같은 날 대통령실 한 고위 인사도 기자와의 통화에서 “김 전 실장 거취 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윤 대통령 국빈 방문 후에나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김 전 실장 교체 가능성은 맞지만 시기적으론 아직 이르다는 의미였다. 외교가와 정치권에서도 비슷한 전망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3월 30일 오후 분위기가 급변했다. 대통령실 안팎에서 김 전 실장 사퇴가 곧 발표될 것이란 말이 들려왔다. 김 전 실장은 이날 오후 5시 메시지를 통해 “저로 인한 논란이 더 이상 외교와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사퇴를 공식화했다. 대통령실 관계자 역시 “김 실장이 외교와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여러 차례 피력해 고심 끝에 (윤 대통령이) 수용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김 전 실장과 대통령실 모두 자진 사퇴라고 했지만 외교가와 정치권 등에선 사실상 경질로 받아들인다. 김 전 실장이 공을 들이며 진두지휘했던 윤 대통령 미국 방문을 불과 한 달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스스로 물러났다고 하는 설명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견해가 쏟아졌다. 뭔가 공개하기 어려운 은밀한 사정이 작용을 했고, 윤 대통령으로서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김일범-이문희-김성한’으로 이어지는 사퇴 행렬의 직접적인 계기는 ‘보고 누락’인 것으로 보인다. 미국 측은 지난 1월경부터 윤 대통령 국빈 방문 시 진행할 특별 문화 프로그램을 여러 차례 제안했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묵살되자 강한 불쾌감을 내비쳤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프로그램은 팝가수 레이디 가가와 한국 걸그룹 블랙핑크의 합동 공연이다. 이 프로그램 외에 한·미 영부인이 참여하는 또 다른 행사 역시 국가안보실 일정 조율 착오로 무산될 뻔했다는 말이 나온다.
문제는 윤 대통령이 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통령실을 포함한 여권 복수 관계자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이 국가안보실의 실책을 알게 된 것은 대략 3월 5일 전후로 파악된다. 김성한 전 실장이 윤 대통령 미국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3박 5일 일정으로 출국하던 날이다. 윤 대통령은 국가안보실이 아닌 미국 현지 외교 라인을 통해 미국 측의 불편한 기류를 보고받았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비서실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들은 뒤 3월 10일경 김 전 실장을 강하게 질책한 것으로 전해진다. 3월 10일은 김일범 의전비서관이 물러난 날이기도 하다. 대통령실 한 관계자는 3월 30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민주당은 ‘블랙핑크 때문에 김 전 실장이 물러난 게 말이 되느냐’고 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면서 “윤 대통령은 12년 만에 이뤄진 미국 국빈 방문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유야 어찌됐건 국가안보실이 미국 측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했다고 판단했다. 결코 가벼운 건이 아니었다. 윤 대통령이 신뢰했던 김 전 비서관 사퇴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뤄졌다”고 말했다.
다만, 윤 대통령은 여전히 김 전 실장에 대한 재신임을 내비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 방문이라는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이를 총괄해온 김 전 실장을 경질하기엔 부담을 느꼈을 것이란 분석이다. 대통령실 안팎에서 김 전 실장을 향한 거센 비토 목소리가 봇물을 이뤘던 것도 이때부터다. 표면적으론 보고 누락 및 서투른 방미 준비 등이 거론됐지만 그동안 쌓였던 김 전 실장을 향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블랙핑크 행사’가 트리거가 된 셈이다.
우선, 그동안 대통령실 내부에선 김 전 실장 업무 스타일이 종종 도마 위에 올랐었다고 한다. 안보실 ‘칸막이’가 너무 높아 다른 부서, 특히 비서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한 편이 아니라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용산 대통령실에 근무하다 정치권으로 돌아온 한 관계자는 “비서실 그립이 약한 것도 원인이겠지만 안보실과 업무 협력이 잘 안된 적이 많았다. 보안을 이유로 들었지만, 비서실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는 반응이 많았다”면서 “김 전 실장이 교수 출신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안보실 내부에서조차 이런 목소리가 불거졌었다고 한다. 이는 김 전 실장과 김태효 1차장 간 파워게임으로 해석됐다. 김 전 실장 사퇴 이유를 안보실 내 해묵은 갈등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여기서 비롯된다. 특히 김 전 실장 측은 김태효 1차장이 주도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3자 변제안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외교가에선 ‘윤 대통령이 김 전 실장이 아닌, 김 1차장 손을 들어줬다’는 말이 나왔다.
정치권에서도 김 전 실장 교체 건의가 올라왔던 것으로 전해졌다. 안보실의 석연찮은 보고 누락을 묵과해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외교가에선 김 전 실장이 지나치게 특정 학맥을 중용한다는 불만도 고개를 들었다. 김 전 실장과 이문희 외교비서관은 모두 고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문재인 정부 때 성골로 꼽혔다가 윤석열 정부 때 다소 고전하고 있는 연세대 라인이 김 전 실장을 성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한 원로 인사의 경우 윤 대통령 측에 이렇게 조언했다고 한다. “교수 출신인 김 전 실장이 정권 초 밑그림을 그리는 데엔 적합할진 모르지만 외교 디테일엔 취약할 수 있다. 방미 일정 조율 미스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세세한 의전 부분에서 약점이 노출돼, 윤 대통령이 곤욕을 치렀다. 김 전 실장 책임론이 국민의힘에서 계속 맴돌았었다. 지금은 전문 외교 인력이 윤 대통령을 보좌해야 한다.” 후임 국가안보실장으로 발탁된 조태용 주미대사는 정통 외교관 출신이다.
3월 26일 이문희 비서관이 물러난 것도 이런 대통령실 안팎의 ‘김성한 비토 기류’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김 전 실장이 윤 대통령에게 자진 사퇴 뜻을 밝혔다. 자신의 측근들이 연이어 사실상 경질된 것에 대한 항의성 차원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고, 이는 김 전 실장의 ‘항명설’로까지 번졌다. 이에 대해 국가안보실 사정에 밝은 여권 고위 인사는 “전혀 아니다. 김 전 실장이 자신으로 인해 국빈 방문에 혼선을 빚어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라면서 “윤 대통령 역시 처음엔 만류하다가 김 전 실장 뜻을 존중해 교체를 결심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다.
“김성한 전 실장이 왜 그만뒀는지를 두고 정치권이 공방을 벌이고 있는데 다 소용 없는 일이다. 윤 대통령이 결정한 것이다. 윤 대통령만이 진짜 이유를 알고 있다. 윤 대통령은 김 전 실장을 다음 개각 때 (외교부) 장관 후보로도 생각했을 정도로 아꼈다. 다만, 보고 누락에 대해 크게 화를 냈던 것은 맞다. 여기에 미국과의 관계, 대통령실 안팎의 분위기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웬만해선 자기 사람을 내치지 않는다. 김 전 실장이 국가안보실장에선 물러났지만 다시 중용될 가능성이 높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