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피겔은 독일 연방 정보국이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주요 기관을 도·감청하는 데 사용한 4000여 개 선별 핵심단어(키워드) 목록 등의 비밀 자료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과 CIA의 정보 분석 요원이었던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 정보 당국이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비롯한 미국 동맹국의 주요 인사와 미국 주재 각국 대사관을 도청했다고 폭로했다. 당시 독일은 미국을 맹비난했다.
슈피겔이 제기한 의혹을 보면 독일도 미국을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도·감청 의혹을 제기하는 문건이 세계를 흔들고 있다. 해당 문건은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의해 최초로 보도됐다. 스노든의 폭로 케이스를 제외하면, 위의 두 가지 폭로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도·감청 의혹 대부분은 언론이 폭로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세계의 주요 국가들은 동맹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국가를 도·감청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이런 공통점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세계 주요국에서 서로에게 자행될 가능성이 있는 도·감청은 그만큼 은밀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언론이 폭로하기 전까지는 표면 위로 부상하기 힘들다. 또한 정보 전쟁에서 동맹 관계 여부는 중요치 않기 때문에 이런 공통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번에 보도된 문건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과거에 도·감청이 없었을 것이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또 은밀하게 행해지는 도·감청을 문제 삼아 미국을 비난하고, 사과를 요구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받아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폭로 문건에 등장하는 국가들, 예를 들어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아랍에미리트 등이 한결같이 폭로 문건 내용을 ‘거짓’으로 규정하며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이유 역시 대응해봤자 별 소득이 없고 자칫 잘못 대응하면 거짓이 ‘진짜’처럼 보일 위험성이 있다는 데 있다. 이뿐 아니라 대미 관계도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해당 국가들에서 야당이 해당 문제를 들고 나오며 미국과 자국 정부를 공격하고 있다는 기사 역시도 별로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외교란 여야를 초월한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외교를 자국의 정치에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불어민주당을 무조건 탓하고 싶지는 않다. 민주당이 해당 문제를 가지고 미국의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외교상 그리 나쁜 전략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는 가만히 있고 야당이 나서서 사과를 요구하는 것이 미국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미국에 압력을 가하는 합리적 외교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민주당이 대통령실 이전과 도·감청을 연결하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문재인 정권 시절에도 제3국에 의한 도·감청이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이번 도·감청이 대통령실 이전과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외교를 국내 정치에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감청 관련 진상을 규명하자는 주장은 의미 부여가 매우 힘들다. 세계 어떤 국가도 타국에 의한 도·감청의 진상을 규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스노든의 폭로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에 미국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언론에 의한 의혹 제기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도·감청을 인정하며 사과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매우 어렵다. 외교는 정권을 초월한 문제다. 외교에서 국민의 알 권리를 무조건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외교를 국내 정치의 소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신율 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