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증거 확보하고도 올 4월에야 공개수사…검찰은 기획 수사 아니라지만 ‘플리바게닝’ 의혹도
하지만 올해 초부터 검찰 안팎에서 흘러나오는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정근 전 부총장이 민주당 내에서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평과 함께, 민주당 의원 여럿이 수사군에 오를 것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검찰이 2021년 있었던 전당대회 당시 민주당 의원들을 향한 돈봉투 살포 의혹 관련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검찰 안팎에서는 “당초 기획한 게 아니었다. 수사 도중 확보된 범죄 정보를 확인하다 보니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의 녹취 파일은 JTBC를 통해 보도되기도 했다. 이 전 부총장의 휴대폰에는 엄청난 양의 전화 녹취 파일이 있었는데, 검찰이 이를 토대로 이 전 부총장으로부터 유의미한 진술을 얻어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이 검찰의 수사를 마냥 ‘정치 수사’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개인적’ 갈등에서 시작된 사건
검찰이 처음 이 전 부총장을 수사 대상에 올린 것은 2022년 8월이다. 이 전 부총장은 사업가 박 아무개 씨로부터 10억 원 안팎을 받고 청탁을 받았는데, 둘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돈’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다. 박 씨와 이 전 부총장은 서로 민·형사상 소송까지 벌였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확보된 첩보 등을 토대로 이 전 부총장을 2022년 8월 압수수색했다. 이때만 해도 검찰의 수사는 ‘이 전 부총장의 정치권 핵심을 향한 로비’를 향해 있었다. 이 전 부총장이 CJ그룹 계열사에 고문으로 취업할 때 노영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개입했다는 수사 역시 박 씨 등의 진술을 토대로 시작한 수사였다. 이 전 부총장을 구속기소한 혐의도 알선수재였다.
하지만 수사가 한창이던 2022년 가을 즈음, 검찰은 이 전 부총장의 휴대전화에서 녹음 파일을 확보하게 된다. 검찰이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 녹음 파일은 3만여 개. 이 전 부총장은 평소 휴대전화에 자동 녹음 기능을 설정해 뒀는데, 이 때문에 이 전 부총장의 휴대전화에는 약 7년 동안 통화했던 내용이 고스란히 저장돼 있었다.
이때부터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김영철 부장검사)의 수사는 ‘자신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심에서 유죄가 나온 이 전 부총장의 CJ그룹 계열사 한국복합물류 취업 특혜 의혹 사건도 녹음 파일에서 핵심 증거들이 나왔고, 6000만 원 뇌물 수수 및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민주당 노웅래 의원 사건도 이 씨 녹음 파일에서 수사가 시작됐다는 후문이다.
#송영길 “몰랐던 일” 선 긋고 있지만…
2023년 초, 검찰 안팎에서는 ‘이정근 게이트’라는 말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4월 초 검찰이 압수수색을 하며 공개수사에 나선 것이 바로, 2021년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이다.
2021년 5월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 과정에서 송영길 당대표 후보 측 캠프에서 9400만 원을 조성해 현역 의원과 당내 인사들에게 살포한 것인데, 검찰은 녹취파일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돈줄’ 역할을 한 강래구 한국감사협회장을 포착했다. 최근 강 회장을 불러 돈의 출처와 흐름도 이미 파악했다고 한다. 당시 이정근 전 부총장은 송 전 대표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송 전 대표 측 캠프에서 활동했다.
검찰은 이 전 부총장이 강 회장의 통화에서 “송영길 당대표 후보가 ‘(강)래구가 돈 많이 썼냐’고 묻더라”는 취지로 말하는 내용이 담긴 녹음 파일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민주당 현역 의원 여럿을 수사 리스트에 올려놓고 있다. 이 전 부총장을 만나 의원들에게 전달할 돈봉투 관련 정황에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는 윤관석·이성만 의원, 송 전 대표 보좌관 박 아무개 씨 등 9명을 피의자로 입건했다.
송 전 대표는 “정말 몰랐던 일”이라고 선을 긋고 있지만, 검찰은 본인 캠프 소속 인사의 불법 정치자금 관여 정황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송 전 대표도 수사한다는 방침이다.
#“완벽한 수사 협조는 아니지만…”
민주당이 압수수색 후 5일 동안 입장을 내지 못하다 사과를 한 사건이었지만 검찰 역시 공개수사를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2022년 이 전 부총장 휴대전화를 포렌식하면서 증거들은 확보했지만, 검찰이 곧바로 수사에 착수하지 않은 것은 ‘수사 협조’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녹음 파일이 나온 뒤에도 이 전 부총장은 한동안 돈봉투 의혹을 부인한 것. 그런데 최근까지 민주당이 이 전 부총장의 사건에 대해 ‘개인적 일탈’이라며 선을 긋자, 마음을 바꿔 검찰 수사에 조금씩 협조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온다.
익명의 검찰 관계자는 “완벽한 수사 협조는 아니지만, 처음과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것은 맞다”고 귀띔했는데 일각에서는 이 전 부총장 역시 검찰의 협조가 필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3월 23일과 4월 12일 이 전 부총장은 사업가 박 씨에게 10억 원대 금품을 받은 혐의(알선수재)로 결심과 1심 선고 공판이 있었는데 이때 검찰은 이 전 부총장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법원은 검찰 구형보다 높은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검찰 구형보다 법원의 양형이 높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수사 협조의 대가로 이 전 부총장에게 검찰이 플리바게닝(미국식 유죄협상제도·검찰 수사에 협조하는 대신 양형 등에서 선처를 받아내는 것)을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지점이기도 한다.
특수 수사 경험이 많은 검사 출신 변호사는 “진행 중인 사건의 핵심 진술을 줄 수 있는 인물이라면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도록 양형을 약하게 하는 것도 검찰이 할 수 있는 전략 가운데 하나”라며 “징역 3년은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형량 아니냐. 그런데 정작 법원이 4년 6개월을 줬다는 것은 법원이 엄벌을 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이례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이에 대해 검찰과 이 전 부총장 측은 “플리바게닝은 국내에 제도도 없고, 하지도 않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검찰 안팎에서는 이 전 부총장의 휴대전화 속 녹취파일에 대해 이 전 부총장이 본격적인 진술을 시작한다면 ‘이정근 게이트’가 터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앞선 변호사는 “정치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돈’이고 검찰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도 정치권 등 권력의 비리를 파헤칠 때”라며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추진했던 민주당으로부터 돈 관련 비리를 찾아낸다면 검찰의 필요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니냐. 이정근 게이트로 수사를 이어나가는 것도 얼마든지 검찰 수뇌부에서 고민해볼 만한 카드”라고 내다봤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