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크게 낮춘 ‘패키지 계약’이 발단…납기 지연 속 디테일 변경 둘러싼 갈등이 결정타, 법적 공방 가능성
#‘패키지 계약’ 불만 누적됐나
차세대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는 신규 IT 기술을 접목하면서 기존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엎는 작업이다. 시장과 고객 분석부터 시작해서 개발·구축, 테스트 및 수정을 거친다. 수백억 원에서 수천억 원까지 소모하는 대규모 사업인 까닭에 사업 파트너 선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한화시스템은 AIG손보·미래에셋생명·서울보증·보험개발원·캐롯손보 등 금융보험 부문의 IT시스템 구축·운영을 진행했다. 과거 풍부한 경험은 흥국생명의 차세대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나왔다. 결국 한화시스템은 2021년 9월 LG CNS를 제치고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다.
그런데 지난 4월 18일 돌연 흥국생명이 프로젝트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갈등의 발단은 계약의 형태가 ‘패키지 계약’이었던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SI(시스템통합) 업계에 따르면, 흥국생명급 규모의 회사가 차세대 시스템을 구축할 경우 통상적인 계약금 수준은 600억~700억 원 정도로 책정된다. SI 업체가 고객사의 업무 패턴을 분석한 후에 이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을 해주려면 상당한 기간과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화시스템과 흥국생명 간의 차세대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 계약은 390억 원 규모였다. 한화시스템이 독자 개발한 차세대 보험코어 솔루션 ‘와인(W1NE)’을 완성형 형태의 패키지로 제공하면서 흥국생명이 이에 맞춰 업무 패턴을 수정하는 형태를 제안한 것이다.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는 패키지 모델 제안이 수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개발 일정에 예기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한화시스템은 일찍부터 같은 한화그룹의 금융계열사인 한화생명의 차세대 시스템 구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개발이 늦어지면서 2022년 2월부터 가동하려던 한화생명의 차세대 시스템 오픈이 같은 해 9월까지 밀렸다. 한화생명에 적용된 시스템을 패키지로 따와서 적용키로 했던 흥국생명 차세대 시스템 오픈 역시 덩달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도리 없이 기다리던 흥국생명은 지난해 3월 한화시스템이 납기를 맞출 수 없다고 정식으로 요청하자 계약 일자를 올해 12월 31일까지 연장하는 데에 합의했다.
계약기간 내내 흥국생명의 디테일 변경 요청이 거의 수용되지 않았다는 점도 불만을 가중시켰다. 이번 계약과 관련해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패키지 계약을 맺은 탓에 디테일한 수정 요청들을 반영하는 데서 문제가 생겼다. 흥국생명이 요청한 수정 사항에 대해 한화시스템이 계약서에 명시된 범위를 벗어난 요구라고 거듭 거절했다”고 말했다. 갈등이 지속되자 흥국생명은 자사의 요청이 계약서에 명시된 과업 범위를 벗어났다는 근거를 정리해 문서로 제출해달라고 한화시스템 측에 요구했다. 그런데 한화 측에서 근거 문서를 가져오지 못했고 이 점이 결정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빌미를 줬다는 것이다.
앞서의 관계자는 “흥국생명 쪽에서는 가뜩이나 사업이 지연된 데다 협업이 원활하지 않아 불만이 컸다. 수정 요청 사항들이 대부분 누락되면서 나중에 차세대 시스템이 오픈돼도 업무에 지장이 상당할 것으로 판단해 결단을 내린 셈”이라고 말했다.
#책임 소재 법정에서 가려질까
현재 흥국생명과 한화시스템 간 관련 계약은 아직 완전히 파기된 상태는 아니다. 조율의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대로 계약이 파기될 경우 한화시스템 입장에서는 보험업무용으로 개발한 와인의 판매 다각화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흥국생명은 흥국생명대로 차세대 시스템 오픈 시점이 더 늦어지는 상황이 불가피하다.
다만 추가적인 조율에 실패하고 계약 해지가 확정될 경우 법적 공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흥국생명 측에서 아직 중도금을 지급하지 않은 시점에 계약 해지를 통보했기 때문에 한화시스템이 지금까지의 시스템 구축비용 대부분을 책임진 상태다. 한화 측은 손실 추정액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 해지가 확정될 경우, 소모된 비용의 일부라도 돌려받겠다는 입장이다.
한화시스템은 흥국생명의 차세대 시스템 구축 요건 정의가 불명확해 사업이 지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SI 업계 한 관계자는 “고객사의 수정 요청을 다 수용하면 분석 업무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고 개발 기한을 맞추기 까다로워진다는 문제가 있다”며 “개발자 상주기간이 늘어나면 비용이 늘어날 수밖에 없어 낮은 가격에 계약을 맺은 한화시스템 입장에서도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화시스템이 책임 소재 입증에 대한 부담을 지고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SI 업계 다른 관계자는 “애초에 고객의 요구 사항이 사업 초반부터 명확하게 정의돼 그 요구 사항에 기반해 사업 금액이 책정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고객사의 갑작스러운 요청이 추가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화시스템이 흥국생명의 요구 사항마다 추가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 상세 내역을 정리해 기존에 계약된 과업 범위를 넘어서는지 여부를 증명하지 못하면 법정에 가서도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보탰다.
이와 관련, 흥국생명 관계자는 “상대방 사정에 의해 6개월을 연기했음에도 저희가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모습으로 시스템 구축이 완료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고 말했다. 한화시스템 관계자는 “올해 12월 구축완료 기한을 맞출 수 있다는 입장임에도 흥국생명이 계약해지 통보를 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한화시스템은 흥국생명의 주장을 검토 후 법률적·계약적 대응을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