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지도부와 문재인 정부 동시 타격 형국…플리바게닝 의혹 속 이정근 측 녹음파일 유출 검사·기자 고소
프랑스 파리 그랑제콜 ESCP(경영대학원)에서 방문교수로 활동하던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4월 24일 귀국했다.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을 둘러싼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수사가 ‘2021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으로 번진 뒤 송 전 대표가 의혹 핵심 인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안팎에선 송 전 대표 귀국을 종용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송 전 대표는 귀국 전 파리 현지 기자회견을 통해 “검찰이 소환도 하지 않는데 귀국해야 하나 고민도 했다”면서 “이 사건(돈봉투 살포 의혹)이 주요 쟁점이 되고 연일 언론에 보도돼 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제가 이곳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송 전 대표는 “당에 누를 끼친 책임을 지겠다”면서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고 오늘(4월 22일)부로 민주당을 탈당하고자 한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제가 귀국하면 검찰은 저와 함께했던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고 바로 저를 소환해주길 바란다”면서 “검찰 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4월 24일 송 전 대표가 귀국한 지 하루 만에 검찰은 송 전 대표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검찰은 2021년 3월부터 5월 사이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을 비롯해 현역 의원인 윤관석·이성만 의원, 강래구 전 한국수자원공사 감사 등이 전당대회에서 송 전 대표를 당선시키려는 목적으로 국회의원·대의원 등에 9400만 원을 살포했다는 혐의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부총장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촉발된 수사가 민주당 전당대회를 둘러싼 돈봉투 의혹으로 확전되자 야권 내부에선 우려들이 쏟아졌다. 검찰 수사 종착역이 송 전 대표가 아닐 것이란 불안감도 그중 하나다.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은 일단 송영길 지도부를 겨냥하는 수사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선 ‘마당발’로 통하는 이 전 부총장 녹음 파일이 문재인 정부 실세들에게로 튈 가능성이 거론된다. ‘개인 일탈’로 여겨졌던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돌고 돌아 송영길 지도부, 문재인 정부를 동시에 타격하며 민주당을 초토화하는 형국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검찰이 녹음파일 3만 개가량을 확보했다고 하는데,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검찰만 아는 것 아니냐”면서 “검찰이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 한 개의 인형 속에 여러 개 인형이 겹겹이 들어가 있는 인형) 같은 수사 방식을 통해 계속해서 사건을 확장해 나가는 방식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고 했다.
복수의 검찰 인사에 따르면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 이외에도 사업 및 취업 청탁 관련 민원, 2022년 지방선거 관련 논의 등이 담긴 파일에서 수상한 부분들이 발견된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에선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을 둘러싼 플리바게닝 의혹을 제기하며 검찰 수사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나섰다. 플리바게닝은 범행 자백을 전제로 형량을 협상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플리바게닝은 국내에 공식적으로 도입된 제도는 아니다. 하지만 넓게 보면 피고인이 수사에 협조할 경우 이런 부분을 구형량에 참작하는 일련의 흐름을 플리바게닝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민주당은 이 전 부총장이 2022년 9월 구속된 뒤부터 검찰 출정조사 빈도가 높았다는 점을 플리바게닝 근거 중 하나로 꼽는다.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3월 14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10억 원대 금품수수·알선수재에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까지 있으면 (징역) 5년 정도를 구형해야 마땅한 것으로 보는데 3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집행유예를 내달라는 의미로 봤다”면서 “이 전 부총장이 수사에 협조했을 것”이라고 했다.
3월 19일 박성준 민주당 대변인은 “검찰과 관계에 있어서도 이정근 씨의 말, 법원의 1심 판결을 보면 플리바게닝을 한 내용들이 나오고 있지 않느냐”면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앞선 3월 1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옥곤 부장판사)는 정치자금법 위반 및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알선수재 혐의로 기소된 이정근 전 부총장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했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3년 형량보다 가중된 형량으로 판결이 내려져 법조계 관심이 쏠렸다.
한 검찰 출신 법조계 관계자는 “검찰 구형 형량보다 법원 판결 형량이 더 가중된 상황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면서 “심플하게 보자면 법원이 검찰보다 죄가 더 무겁다고 판단한 것인데, 법원이 죄질을 더 무겁게 본 것인지 검찰이 죄질을 조금 더 가볍게 본 것인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검찰은 법원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다. 구형된 형량보다 더 높은 형량이 선고됐음에도 항소 카드를 꺼낸 셈이다. 검찰은 법원이 이 전 부총장 알선수재 혐의 일부를 무죄로 판단한 것과 관련해 법리적 오해를 다투기 위한 차원으로 항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통상적 구형 기준에 맞춰 구형했으며 수사 편의는 전혀 없었다”고 했다. 플리바게닝 의혹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항소심에서도 검찰은 1심에서 내린 이 전 부총장 구형량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전 부총장 법률대리인은 “사실을 얘기하지 않으면 구형보다 중형을 선고받은 1심처럼 큰 낭패를 볼 수 있다”면서 “이 전 부총장에게도 플리바게닝 여부를 물었지만 ‘그런 적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검찰과 이 전 부총장 측 모두 플리바게닝 의혹에 대해 부인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이 전 부총장 측은 돈봉투 의혹 수사 검사와 관련 녹음파일을 보도한 기자를 고소했다. 검찰이 이 전 부총장 휴대전화에서 발견한 녹취파일을 언론에 유출했다는 취지였다. 이 전 부총장 법률대리인은 4월 28일 성명불상 검사를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JTBC 보도국장과 기자들을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각각 서초경찰서에 고소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