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 대상 선정과 지원책 모두 실효성 부족 지적…정부는 ‘주거 안정성’ 피해자들은 ‘보증금 반환’ 입장차
#‘바늘구멍’ 기준 누가 통과하나
인천시 미추홀구 숭의동에 있는 한 아파트. ‘여기는 깡통 전세 사기 피해 아파트입니다’ ‘사회적 재난 현장에서 경매 장사하는 당신도 가해자’ ‘내부박살 입찰금지’라고 쓰인 현수막과 호소문이 곳곳에 나붙어 있다. 아파트 창문과 기둥, 건물 출입구와 벽면에도 경고문이 빼곡히 붙어 있다. 이 아파트는 101동과 102동에 100여 세대가 입주해 있는데 이 중 95세대가 전세사기로 피해를 입었다. 이 아파트는 이미 지난해 6월에 경매에 부쳐진 상태다.
아파트 입주민인 30대 A 씨 역시 지난해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부평 피해지원센터와 법원, 경찰청을 쫓아다니며 피해구제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지난 4월 27일 오후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A 씨는 “10개월을 노력했는데 대책이 너무 실망스럽다. 정부 대책에 따르면 구제받을 수 있는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정부가 4월 27일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을 발표했다. 특별법의 지원 대상은 △대항력을 갖추고 확정일자를 받은 임차인 △임차 주택에 대한 경·공매 진행 △면적·보증금 등 고려한 서민 임차주택 △수사 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 존재 △다수 피해자 발생 우려 △보증금 상당액 미반환 우려 등 6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한다.
문제는 6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하기가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수준이라는 점이다. 미추홀구에서는 ‘건축왕’ 남 씨에게 피해를 입은 가구 수만 2800세대가 넘는다. 그런데 법원에서 인정받은 피해 가구 수는 163세대뿐이다. 남 씨 일당이 이자를 내지 못하기 시작한 시점인 2022년 1월 이후에 신규 계약한 사람들만 명확하게 사기죄 피해에 해당된다고 본 탓이다. 아파트 입주민 B 씨는 “명확히 사기죄가 성립돼서 남 씨를 구속시킨 163세대만 ‘수사 개시 등 전세사기 의도 존재’ 요건에 해당이 되는 거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피해자 분도 이 기준에는 해당이 안 된다”고 말했다.
미추홀구 피해자 중에는 고령자, 기초수급자, 새터민, 중국인 등 취약계층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전입신고와 확정일자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인중개사만 믿고 계약을 하는 바람에 피해를 입었지만 도리 없이 지원 대상에서 누락됐다. 면적과 보증금 규모에 따라 지원 대상에서 누락될 우려도 있다. ‘다수’ 피해자 발생 우려, 보증금 ‘상당액’ 미반환 우려 등의 표현이 모호한 까닭에 불안에 떨고 있는 경우도 상당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B 씨는 “사기친 사람이 소유한 건물에 살고 있고 내 보증금이 들어가 못 받는 상황이면 피해자로 인정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6개 중에 하나라도 해당이 안 되면 구제를 못 받는데 지나치게 기준이 빡빡하고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김병렬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은 “지금 여기는 초상집이나 다름없다. ‘와 된다’ ‘해준대’ 이런 분위기가 아니고 ‘이건 우리는 해당이 안 될 거 같은데’ ‘이건 뭐야’ 다 이런 분위기”라고 말했다.
#우선매수권·금융지원 모두 실효성 부족
정부의 지원책에도 맹점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지원 대상에 한해 경매로 나온 피해 주택의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우선매수권은 경매로 나온 물건이 낙찰됐을 때 피해자가 해당 금액을 내고 우선적으로 매수할 수 있는 권리다. 이 경우 낮은 이자로 경락잔금 대출(경매에서 낙찰받은 물건을 담보로 진행되는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금융지원도 이뤄진다. 추가 대출을 받을 여력이 없거나 매입의사가 없는 피해자는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 우선매수권을 양도할 수 있다. 이 경우 시세의 30~60% 수준의 임대료를 내고 공공임대로 장기 거주할 수 있게 된다. 거주안정성은 보장되는 셈이다.
문제는 우선매수권이 피해자가 경매에 낙찰된 최고가로만 매입이 가능한 제도라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경매꾼들이 몰려들어 낙찰가액을 올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의 A 씨는 “남 씨 일당이 경매로 나온 물건을 다시 주워가고 있다. 법원 경매에 가보면 걔네 자회사에서 막 6명씩 나와서 입찰에 달려드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B 씨는 “이들은 시세를 높여 놓는 게 유리하기 때문에 낙찰가액을 올리면서도 저희 보증금까지는 변제가 안 되는 애매한 금액을 부를 가능성이 높다”며 “이 경우 우선매수권 어드밴티지는 아예 사라지고 정말 최악의 상황이 된다. 경매꾼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해주는 방안이 나오길 바랐는데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금융지원 기준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경락잔금으로 지원해주기로 한 저금리 대출 지원을 받으려면 부부합산 소득이 연 7000만 원 이하여야 한다. 긴급생계비 지원 대상인 1인 가구 소득 기준은 월 156만 원 이하다. 김병렬 부위원장은 “파트타임으로 일해서 버는 돈이 월 156만 원 수준인데 이 경우 전세대출 받아서 들어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부부합산 7000만 원 기준도 너무 낮아서 의미가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LH 매입의 4가지 충족 요건에 해당되는 아파트는 찾을 수가 없다. 그야말로 탁상행정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부와 피해자들의 입장 차이로 인해 촉발된 문제라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는 피해자들의 주거 안정성에 초점을 맞춘 반면 피해 임차인들은 묶인 보증금을 돌려받길 원하기 때문이다. 송승현 도시와경제 대표는 “정부 입장에서는 예산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지원 대상을 넓히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게다가 나라에서 저리로 대출해주고 우선매수권도 폭넓게 부여해주면 오히려 악성 임대인들이 악용할 수 있다”며 “형평성과 실효성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문제이고 하반기부터 전세사기 피해가 더 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무작정 요구를 다 수용해줄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특별법의 취지에 맞게 더 과감하고 쉽게 법안을 손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 소장은 “세금을 직접 투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10년 동안 무이자로 대출을 내주고 2년 동안 발생하는 사건의 최우선 변제금을 2배로 확대해주는 방식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 피해자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민 기자 hurrym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