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산 일곱 번째 맞대결 성사…8이닝 무실점 양현종 ‘판정승’
하지만 훌륭한 라이벌은 단순한 '적'으로 남지 않는다. 호적수와 벌이는 선의의 경쟁은 한 명의 선수를 성장시키는 최고의 자양분이다. 오랜 기간 라이벌로 묶여 서로를 의식하다 보면 어느새 진한 동지 의식까지 생긴다.
팬들 역시 라이벌끼리 펼치는 정면승부에 가장 열광하고 환호한다. 두 선수 사이에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이야기와 역사가 존재한다면 더 그렇다. 동갑내기 왼손 에이스 김광현(SSG 랜더스)과 양현종(KIA 타이거즈)의 맞대결이 프로야구를 뜨겁게 달군 이유다.
#8년 만에 성사된 '광현종' 매치
프로야구 10개 구단은 매주 월요일 낮 12시에 주중 3연전 첫 경기 선발 투수를 공개한다. KIA와 SSG가 5월 9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리는 두 팀의 시즌 3차전 선발 투수로 각각 양현종과 김광현을 예고하자 순식간에 뜨거운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김광현과 양현종은 2007년 함께 프로에 데뷔한 동기생이다. 김광현은 SK 와이번스(현 SSG) 1차 지명을 받았고, 양현종은 신인 2차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KIA에 호명된 특급 유망주였다.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성장했고, 10년 넘게 국가대표 원투펀치로 활약했다. 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도 대표팀 투수 최고참으로서 마운드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김광현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2년), 양현종은 텍사스 레인저스(1년)에서 메이저리그(MLB) 무대를 경험한 뒤 지난 시즌 나란히 복귀하기도 했다.
당초 이들의 선발 등판은 하루 차로 어긋날 가능성이 컸다. 원래 로테이션대로라면 김광현은 화요일인 9일, 양현종은 수요일인 10일에 등판했어야 했다. 그러나 앞선 주말 전국에 내린 비가 이들의 빅매치를 만들어내는 오작교 역할을 했다.
양현종은 4월 28일 잠실 LG 트윈스전에 등판한 뒤 5월 4일 광주 롯데 자이언츠전 선발 투수로 예고됐다. 그런데 이날부터 나흘간 KIA의 경기가 비로 순연되면서 양현종의 등판 날짜도 9일까지 밀렸다. 양현종은 계획에 없던 열흘 휴식을 취하고 다시 홈 구장 마운드에 오르게 됐다. 반면 SSG는 실내구장인 고척스카이돔에서 주말 3연전을 치른 터라 모든 경기를 빠짐 없이 소화했다. 김광현은 4월 27일 LG전과 5월 3일 KT 위즈전 등판을 마친 뒤 5일 휴식 로테이션을 그대로 지켜 9일 선발 투수로 나섰다. 그렇게 8년 만의 '광현종' 맞대결이 성사됐다.
김광현과 양현종은 이 경기 전까지 총 여섯 차례 정규시즌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맞붙었다. 신인이던 2007년 5월 25일 인천 경기에서 김광현이 5이닝 6실점(4자책점)으로 패전을 안고, 양현종은 1이닝 1실점을 기록한 게 그 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둘 다 주목받는 유망주에 불과했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각 팀 간판 투수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들은 2008년 10월 3일 광주 경기에서 두 번째 맞대결을 한 뒤 5년 만인 2013년 8월 13일 인천에서 다시 만났다. 이후에도 2014년 4월 18일(인천), 2015년 9월 21일(인천)과 26일(광주)에 세 차례 더 선발 맞대결을 했다. 마지막 등판 성적은 양현종이 6이닝 2실점, 김광현이 5와 3분의 1이닝 5실점이었다.
맞대결 성적도 팽팽했다. 이들이 함께 등판한 6경기에서 두 팀은 3승 3패로 맞섰고, 둘 다 2승씩을 따냈다. 2014년까지는 김광현이 2승 1패를 기록해 무승 2패의 양현종보다 우세했지만, 2015년 9월 열린 두 경기에선 양현종이 2승을 모두 챙기고 김광현에게 2패를 안겨 균형을 맞췄다. 이뿐만 아니다. 두 투수는 이 경기에서 자존심 대결 외에 나란히 특별한 기록에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경기 전까지 양현종이 통산 160승, 김광현이 통산 151승을 쌓아 KBO리그 역대 최다승 3위와 5위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둘 중 승리 투수가 되는 쪽은 이 순위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양현종은 2위 정민철(161승), 김광현은 4위 이강철(152승)에 각각 1승 차로 따라 붙었던 상황이어서다.
#양현종이 김광현에 판정승
기대 속에 막을 올린 둘의 대결은 홈팬의 응원을 등에 업은 양현종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양현종은 8이닝 6피안타 1볼넷 10탈삼진 무실점으로 올 시즌 최고의 피칭을 했다. 그가 8이닝을 던진 건 2020년 10월 18일 잠실 LG전 이후 933일 만이다. 한 경기 두 자릿수 탈삼진도 2020년 9월 4일 롯데와의 부산 더블헤더 1차전(10개) 이후 977일 만의 기록이었다. 시즌 평균자책점도 2.63에서 1.97로 좋아졌다.
승리도 챙겼다. 양현종은 KIA가 3-0으로 앞선 9회초 마무리 투수 정해영으로 교체됐고, 정해영은 3-0 승리를 무사히 지켰다. 양현종은 통산 161승번째 승리를 따내면서 정민철과 함께 KBO리그 통산 최다 승리 공동 2위에 올랐다. 반면 김광현은 6이닝 6피안타 6탈삼진 3실점으로 퀄리티스타트를 하고도 패전 투수가 돼 아쉬움을 삼켰다. 이로써 통산 7회 벌어진 두 투수의 맞대결에서 양현종은 3승 2패, 김광현은 2승 4패를 기록하게 됐다. 양현종의 3연승이다.
경기 초반엔 팽팽했다. 양현종이 먼저 1회를 가볍게 막았다. 2사 후 3번 김강민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최정을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그러자 김광현 역시 삼자범퇴로 1회를 끝냈다. 둘은 2회도 무실점했고, 3회엔 나란히 병살타를 유도하면서 빠르게 이닝을 마무리했다.
승부는 사실상 4회에 갈렸다. 4회초 등판한 양현종은 최주환과 김강민을 연속 삼진으로 잡았다. 최정의 안타로 맞은 2사 1루에선 오태곤을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뒤 이어 4회말 마운드에 오른 김광현도 첫 타자 김선빈을 유격수 땅볼로 잡았다. 그러나 다음 타자 최형우에게 볼넷을 내주며 고비가 찾아왔다. 결국 2사 후 변우혁에게 체인지업을 던지다 좌월 2점 홈런을 맞았다. 김광현은 5회말에도 선두 타자 한승택을 삼진으로 돌려 세웠지만, 박찬호에게 우전 안타와 2루 도루를 잇달아 허용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어 다음 타자 류지혁에게 던진 4구째 슬라이더가 좌전 적시타로 연결돼 추가 실점했다.
그 사이 양현종은 무실점으로 버텼다. 4회와 5회 외야수들의 아쉬운 수비로 나온 실점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6회초 처음으로 선두 타자(추신수)를 볼넷으로 출루시켰지만, 또 한 번 최주환과 김강민을 연속 삼진 처리하고 불을 껐다. 김광현은 6회말을 삼자범퇴로 막고 선발 투수로서 제 몫을 한 뒤 7회부터 불펜 박민호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투구 수는 85개였다.
7회까지 공 90개를 던진 양현종은 8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에이스의 재등장에 광주의 홈팬들이 열광했다. 그는 1사 후 추신수에게 다시 우전 안타를 내줬지만, 다음 타자 최주환이 수비 시프트를 뚫기 위해 번트를 시도하다 아웃돼 한숨을 돌렸다. 2사 1루에서 정명원 KIA 투수코치가 올라가 교체 의사를 물었지만, 양현종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초구에 김강민을 중견수 플라이로 잡고 완벽한 마침표를 찍었다.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는 양현종의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으로 가득찼다. 김종국 KIA 감독도 "양현종이 에이스답게 8이닝을 완벽하게 틀어막으며 팀 승리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역대 최다승 공동 2위에 오른 것을 축하한다"고 박수를 보냈다.
#'광현종'은 라이벌보다 동반자
양현종은 경기 후 김광현에 대해 "우리는 '라이벌'이라기보다 야구를 오랫동안 같이 한 '동반자'에 가까운 사이"라고 표현했다. 1988년 동갑내기인 둘은 광주동성고(양현종)와 안산공업고(김광현) 재학 당시부터 '동급 최강' 투수들로 주목 받았다. 17년간 프로의 세계에서 함께 버티며 많은 역사를 쌓았다. 물론 라이벌전에 대한 주목도가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다. 양현종은 "우연히 로테이션이 겹쳐 선발 맞대결을 펼쳤는데, 마지막 대결일 지도 모르니 이번에 꼭 이기고 싶었다"고 털어놓으면서도 "투수는 상대 타자들과 대결하는 건데, 이렇게 둘이 주목받는 경기는 사실 나나 광현이 모두에게 부담스럽다. 앞으로는 더 이상 대결하지 않고 나도 이기고, 광현이도 이기면 좋겠다"고 솔직한 속내를 밝혔다.
다만 앞으로 김광현과 양현종의 선발 맞대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건 아니다. 김종국 KIA 감독은 "이번 대결을 일부러 만든 게 아니듯, 둘의 등판 순서가 맞게 된다면 언젠가 또 하게 되지 않겠나"라며 '순리대로' 가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일부러 둘의 맞대결을 피하기 위해 로테이션을 조정할 생각은 없다는 얘기다. 김 감독은 오히려 "맞대결을 하니 김광현과 양현종 모두 투구 집중력이 올라가는 것 같다"며 '라이벌 효과'의 긍정적인 면을 찾았다.
둘은 3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후배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 정상급 선발 투수다. 경험과 노련미가 빛나는 피칭으로 타자들을 요리하면서 '살아 있는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팀 감독들은 젊은 선발 투수들에게 "양현종과 김광현의 경기를 유심히 보면서 완급조절을 배우라"고 충고한다. 양현종은 "이제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광현이도, 우리 둘 다 부상 없이 꾸준히 오래 야구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래야 젊은 선수들의 기량도 더 올라올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양현종은 이제 또 다른 이정표에 도전한다. 앞으로 선발승 5개를 추가하면, 송진우가 보유하고 있는 역대 최다 선발승(163승) 기록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송진우는 현역 시절 선발승 163회와 구원승 47회를 더해 KBO리그 역대 최다인 통산 210승을 쌓아 올렸다. 양현종은 161승 중 2승을 제외한 159승을 선발승으로 기록했다. 그는 "최다승이라는 목표는 너무 멀리 있어서 너무 먼 앞날의 이야기 같다. 천천히, 게으르지 않게 꾸준히 운동해야 할 것 같다"며 "아무래도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항상 자신감을 갖고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