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막말 및 친명 알박기 논란 휩싸이며 9시간 만에 사의…친명-비명 내홍 가속, 이재명 체제 위기 심화
6월 5일 이재명 대표는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당 쇄신 전권을 쥐게 될 혁신기구 수장을 지명했다. 이래경 사단법인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이 민주당 혁신위원장으로 발탁됐다. 이 대표는 “새로운 혁신기구 명칭과 역할 등은 모두 혁신기구에 전적으로 맡길 것”이라면서 “지도부는 혁신기구가 마련할 혁신안을 존중하고 전폭적으로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민주화 세력 원로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그는 1973년 서울대학교 금속공학부에 입학했지만 민주화운동 활동으로 두 차례 제적됐다. 1996년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민주진영 내에선 김근태계로 분류돼 왔다.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후원회장 직을 맡기도 했다. 사단법인 다른백년은 김근태계 인사들이 김 전 상임고문 별세 이후 의기투합해 출범한 사단법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이사장은 2014년엔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새정치연합을 창당할 당시 합류하기도 했다. 2019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경기도지사 재임 당시 2심 당선무효형을 받았을 때 민주화 세력 원로인 함세웅 신부가 추진했던 ‘이재명 지키기 범국민 대책위원회’에 이름을 올린 뒤부터는 친명계로 분류돼 왔다.
이 대표 입에서 이래경 이사장 이름이 거론된 뒤 당 안팎에서 거센 폭풍이 불었다. 우선 당내에선 ‘친명 알박기 논란’이 불거졌다. 친명 성향의 이 이사장이 혁신 전권을 쥐게 된다면, 이재명 지도부가 혁신위에게 전권을 맡기는 의미가 퇴색된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면서 이재명 지도부 혁신 진정성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비명계를 중심으로 흘러나왔다.
외풍도 만만치 않았다. 이 이사장이 과거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언급했던 ‘어록’들이 회자됐다. 2023년 2월 10일 이 이사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천안함 사건은) 미국 패권 세력이 조작한 자폭 사건”이라는 취지 글을 올렸다. 중국 정찰풍선이 미국 영공에서 격추된 사건을 설명하며 ‘천안함 자폭설’을 언급했다.
이래경 이사장은 “자폭된 천안함 사건을 조작해 남북관계를 파탄 낸 미 패권세력들이 이번에는 궤도를 벗어난 중국 기상측정용 비행기구를 마치 외계인 침공처럼 엄청난 국가위협으로 과장해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면서 “골빈 한국 언론들은 이를 받아쓰기 바쁘다”고 했다.
비판이 거세지자 이 이사장은 혁신위원장으로 지명된 지 약 9시간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사의 표명문’에 따르면 이 이사장은 “시민 한 사람으로 민주당 변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에 일조하겠다는 일념으로 혁신기구 책임을 어렵게 맡기로 했다”면서 “논란 지속이 공당인 민주당에 부담이 되는 사안이기에 혁신기구 책임자 직을 스스로 사양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사인(개인)이 지닌 판단과 의견이 마녀사냥식 정쟁 대상이 된 것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이는 한국 사회 현재 처한 상황을 압축하는 사건이라는 것이 제 개인적 소견”이라고 했다. 그는 “간절히 소망하건대 이번 일을 심기일전 계기로 삼아 민주당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치로 나아갈 길을 인도할 적임자를 찾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이사장이 사의를 표명하면서 더불어민주당 혁신기구는 다시 표류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 이사장이 지명되기 전까지 혁신기구 출범 과정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당내 우려가 많았다. 혁신위원장 인선, 혁신기구 권한 등을 놓고 친명과 비명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가 ‘이래경 카드’를 꺼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그 불똥은 고스란히 이 대표에게로 옮겨 붙었다. 이 대표는 혁신 진정성과 리더십이 동시에 공격받으며 사면초가에 빠졌다는 분석이다.
혁신기구 출범은 5월 14일 6시간에 걸친 더불어민주당 쇄신 의원총회에서 결의된 내용이다. 쇄신 의원총회는 최근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둘러싼 돈봉투 의혹, 김남국 의원 가상자산 거래 논란 등에 대한 돌파구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마라톤 회의였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의원총회 이후 재창당 각오로 근본적 반성과 본격적 쇄신에 나설 것”이라고 약속했다. 민주당은 ‘근본적 혁신’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전당대회 투명성 및 민주성을 강화하고 정치혁신 방안 준비를 위한 당 혁신기구 설치 방침을 결정했다.
당 혁신기구 설치 계획은 발표됐지만, 설치 추진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의원총회 이후 3주 동안 혁신기구는 닻을 올리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친명계와 비명계는 혁신기구 권한 등을 두고 줄다리기를 거듭했다. 혁신기구에 전권을 부여할지 여부를 두고 의견이 팽팽했다. 비명계는 새 혁신위원장에 전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친명계는 전권 혁신위가 이재명 리더십을 흔들려는 시도라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혁신 방향성에 대한 갈등도 있었다. 친명계는 권리당원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대의원 폐지 또는 비중 축소’를 외쳤다. 권리당원 권한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비명계는 이를 친명계의 세력 강화 노림수로 받아들이며 반대했다. 비명계는 혁신 방향으로 ‘팬덤정치 청산’을 거론했다. 소수 강성 지지층에 의존할 경우 향후 전국단위 선거에서 중도층이 민주당에 등을 돌릴 것을 우려하는 취지였다. 이 대표 지지세력인 ‘개딸(개혁의딸)’을 염두에 둔 스탠스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6월에 혁신위를 본격적으로 띄운다는 계획을 천명했다. 그리고 6월 5일 이래경 다른백년 명예이사장을 지명했다. 당내 일각에선 “이 대표가 묘수를 냈지만, 그것이 악수이자 자충수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비명계가 주장하는 ‘전권 혁신위’를 받아들이면서도 친명 성향이 엿보이는 위원장을 지명하는 묘수가 결과론적으로 이 대표 리더십을 흔드는 트리거가 됐다는 의미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이 이사장이 9시간 만에 사의를 표명하면서, 이재명 지도부는 다시 한 번 혁신위원장 인선 작업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면서 “이번 논란을 계기로 당 지도부 선택의 폭이 상당히 줄어들 수 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계파색이 옅으면서도 친명과 거리가 있는 인사를 택하려면 사실상 원외 비명계 인사로 후보 범위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면서 “여기다 이 이사장 지명을 하면서 ‘전권 혁신위’를 한번 거론했기 때문에 이 방침을 무르기에도 정치적 부담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명계 내부에선 이 이사장을 선임한 이재명 대표 및 지도부의 ‘혁신 진정성’을 의심하는 기류도 고개를 들었다. 비명계 의원들 사이에선 “형식상으로만 전권을 혁신위에 넘기고, 실질적 전권을 이 대표가 지속적으로 행사하려 했던 것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재명 지도부를 향한 ‘인사검증 시스템 부실 논란’도 부상했다. 이 이사장을 추천한 루트는 ‘민주당 원로그룹’으로 전해진다. 이 이사장과 가까운 운동권 출신 원로들 이름이 오르내린다. 비명계는 당의 쇄신 키를 잡게 될 혁신위원장에 대해 기초적인 검증조차 이뤄지지 않은 부분과 더불어 이 대표의 인재풀에 대해서도 문제를 삼는다. 당내 일각에선 이 대표가 최측근 만류에도 혁신위원장 지명을 밀어붙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새로운 추진 동력을 마련하려던 ‘이재명 리더십’에 여러모로 큰 걸림돌이 출몰한 형국이다.
정치평론가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이래경 논란’과 관련해 “현충일을 앞두고 현충일 정신과 정반대인 인물을 검증 없이 지명했다가 국민 지탄을 받고 물러나게 된 사건”이라면서 “이재명 체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사안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채 교수는 “쇄신과 혁신 등 민주당에서 나오는 변화의 목소리는 궁극적으로 내년 총선 공천 및 선거 결과에도 직간접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서 “이런 사태가 반복될수록 민주당 내부에서 계파갈등을 비롯한 내홍이 격화할 수 있고, 비명계를 중심으로 ‘이재명 퇴진론’ 목소리가 더욱 부각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