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는 KT, KT는 NC, NC는 롯데에 약해…키움은 SSG 상대 1승 8패 고전
천적의 원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객관적인 전력이나 순위와 무관할 때가 많아서다. A 팀을 상대로 천하무적이던 팀이 B 팀을 만나면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1위 팀이 꼴찌 팀에 유독 힘을 못 쓰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설명이 불가능하니 원인도 모르는 게 당연하다. 소위 한번 '말리면' 끝. 천적 관계는 철저히 상대적이다.
#KT가 미운 롯데
올 시즌에도 천적 때문에 고생하는 팀들이 있다. 롯데 자이언츠는 5월까지 승승장구했다. 당시 1위 LG 트윈스와 2경기 차, 2위 SSG 랜더스와 1경기 차가 났다. 두 팀과 함께 '3강'으로 불렸다. 그러나 6월 들어 월간 성적 최하위(이하 6월 22일 기준)로 처지면서 성적이 급락했다. NC 다이노스에 3위 자리를 내줬고, 1위 SSG와 8경기 차까지 벌어졌다. 그 변곡점은 6~8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KT 위즈와 홈 3연전이었다.
롯데는 KT에 이 3경기를 모두 내주고 4연패에 빠졌다. 외국인 투수 찰리 반즈와 댄 스트레일리, 국내 에이스 박세웅이 선발 등판했는데도 당시 최하위권이던 KT에 내리 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수원으로 자리를 옮겨 열린 20~22일 3연전도 KT에 스윕당해 올 시즌 상대 전적에서 3승 9패로 밀리게 됐다. 스트레일리-나균안-이인복이 차례로 선발 등판했지만 KT 타선을 막지 못했고, 롯데 타선은 KT 마운드에 밀려 3일 연속 2점씩만 뽑는 데 그쳤다. 이제 롯데는 올 시즌 남은 KT전 4경기를 다 이겨도 상대 전적 열세로 시즌을 마쳐야 하는 운명이다.
롯데는 특히 KT 국내 에이스 고영표에게 맥을 못 췄다. 고영표는 올 시즌 롯데전 4경기에 선발 등판해 평균자책점 0.93을 기록하고 있다. 그가 올 시즌 거둔 6승 중 절반인 3승이 롯데전에서 나왔다. 이달 두 번의 스윕패 중심에도 고영표가 있었다. 고영표는 6일 경기에서 7이닝 1실점, 21일 경기에서 7이닝 1실점(비자책)으로 호투해 롯데 타선의 손발을 묶었다.
롯데가 그렇게 뒤로 처지는 사이, KT는 롯데를 발판 삼아 6월 성적 1위로 도약했다. 5월 종료 시점에 11.5경기였던 롯데와 KT의 격차는 두 번의 스윕 시리즈가 끝난 뒤 3경기로 줄었고, 두 팀은 어느덧 치열한 5강 싸움을 펼쳐야 하는 경쟁자 사이가 됐다. KT가 원망스러운 롯데에 유일한 위안이 있다면, NC전에서 5승 1패로 앞서 있다는 거다. 반대로 NC는 롯데의 '천적' KT전에서 5승 1패를 거둬 롯데에 내준 승수를 고스란히 회수했다. 세 팀이 서로 물고 물리는, 절묘한 먹이사슬이다.
#삼성과 키움도 천적 있다
삼성 라이온즈도 '전자 라이벌' LG 때문에 고난을 겪고 있다. 올 시즌 LG와 맞대결 9경기에서 1승 8패로 밀린 탓이다. 올 시즌 전체 패배 중 LG전 비중이 약 5분의 1에 달한다. 4월 7~9일 잠실 3연전에서 싹쓸이 패배를 당하면서 이후 6연패까지 이어졌고, 5월 12~14일 대구 3연전에서도 1승 2패로 밀렸다. 당시 12일 열린 3연전 첫 경기에서 4-0으로 이긴 게 올 시즌 유일한 LG전 승리다. 삼성은 6월 13~15일 잠실 3연전에서도 다시 LG에 스윕 패를 헌납했다. 13일은 1-2, 14일은 2-3으로 연속 1점 차 패배를 당했기에 더 큰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삼성은 아직 KIA전에서도 5전 전패로 승리가 없다. 8패를 안긴 LG에는 못 미치지만, 남은 KIA전 11경기에서 반전을 꾀해야 시즌 내내 천적 관계가 고착화하는 걸 막을 수 있다. 두 팀에 도합 13패를 당해 하위권으로 처진 삼성은 결국 6월 22일 키움 히어로즈전 패배로 최하위까지 내려갔다. 삼성이 순위표 맨 아랫자리로 처진 건 2018년 5월 14일 이후 1865일 만(10경기 이상 치른 시점 기준)에 처음이다.
다시 5위 싸움에 뛰어든 키움도 올 시즌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상대였던 SSG에 1승 8패로 밀리고 있어서다. 개막 후 SSG전 8연패를 당하다가 세 번째 시리즈 마지막 날인 6월 4일 인천 경기에서 4-3으로 천신만고 끝에 첫 승을 올렸다. 승패 수만 보면 키움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 같지만, 정작 경기 내용은 그렇지 않아 더 속이 탄다. 8패 중 5패가 1점 차 승부, 3패가 2점 차 승부였다. 만날 때마다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도 뒷심 부족으로 아깝게 무릎을 꿇었다는 의미다. '천적'의 불가사의한 마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키움은 지난 시즌에도 SSG에 5승 11패로 밀려 한 시즌을 어렵게 풀어갔다. 올해 역시 SSG 징크스에서 탈출하는 게 순위 경쟁의 중요한 숙제다.
#한해 농사를 망치는 천적
물론 과거에도 이보다 심각한 먹이사슬이 존재했다. 특정 팀을 상대로 한 시즌 1승 이하를 거둔 사례는 지난해까지 총 7차례 나왔다. 초창기 프로야구의 최약체 팀으로 꼽혔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전무후무한 특정팀 상대 전패 기록도 갖고 있다. 삼미는 프로야구 원년이던 1982년, 그해 한국시리즈 우승팀이던 OB(두산의 전신)와 16번 맞붙어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 후 1986년 청보 핀토스가 삼성전 1승 17패, 1993년 태평양 돌핀스가 해태(현 KIA)전 1승 17패를 각각 기록했다. 또 1999년에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두산에 1승 1무 16패, 2003년에는 롯데가 KIA에 1승 1무 17패로 각각 밀리면서 바닥을 쳤다. 2003년 당시 롯데 선수였던 조성환은 "광주 원정을 떠날 때는 버스에 타는 것도 싫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2016년의 롯데와 2018년의 LG도 NC와 두산에 나란히 1승 15패로 호되게 당했다. 특히 롯데와 LG는 천적 한 팀 탓에 한 해 농사를 그르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가 있다. 이전까지 특정 팀 상대 1승 이하의 성적을 올렸던 팀들은 그해 팀 전체 승률이 4할을 넘기지 못했다. 대부분의 팀에 열세였고, 천적이 아니었어도 가을 잔치는 꿈꾸기 어려웠다.
반면 2016년의 롯데는 승률 0.458, 2018년의 LG는 0.476으로 각각 시즌을 마감했다. 5할에 꽤 근접한 4할대 중반의 승률이다. 다른 팀들과 대부분 대등한 승부를 했고, 상대 전적에서 앞선 팀도 적지 않았다. 특히 롯데는 2016년 통합 우승팀 두산이 그해 상대 전적에서 유일하게 앞서지 못한(8승 8패) 팀이었다. LG 역시 2018년 4위 팀인 넥센(현 키움)을 상대로 11승 5패로 좋은 승부를 했다.
당시 두 팀의 전체 성적에서 NC전과 두산전 전적만 삭제해도 승률 5할이 넘는다. 8승 8패만 했어도 5강 싸움이 가능했다. 그러나 5강 희망을 품고 상승세를 탈 때마다 번번이 '천적'을 만나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두 팀 다 8위로 내려앉아 포스트시즌과 멀어졌다.
과정도 좋지 않았다. 롯데는 2016년 시즌 두 번째 맞대결이었던 4월 17일 경기에서 8-5로 이긴 뒤 NC전 14연패로 시즌을 끝냈다. 롯데 에이스 브룩스 레일리와 NC 에이스 구창모가 맞붙었던 9월 25일 경기가 연패 탈출 기회였지만, 0-1로 아쉽게 졌다. 얄궂게도 NC는 그해 롯데전에서 유일하게 10승 이상을 올렸다. 사실상 롯데를 딛고 정규시즌 2위까지 올라선 거나 다름없다.
LG는 더 치명적인 내상을 입었다. 잠실구장을 나눠 쓰는 '한 지붕 라이벌' 두산에 일방적으로 당했기 때문이다. 다른 팀엔 다 져도 두산전만큼은 이기길 바라는 게 LG팬의 마음인데, 2018년 LG는 정반대 길을 걸었다. 첫 맞대결부터 내리 15연패 해 시즌 내내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LG는 결국 시즌 마지막 대결이던 10월 6일 경기에서 3-1로 이겨 삼미 이후 36년 만의 첫 특정팀 상대 전패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났다. LG 선발 차우찬이 9이닝 동안 공 134개를 뿌리면서 4피안타 7탈삼진 1실점으로 완투승을 올려 마지막 자존심을 세운 일등공신으로 활약했다. 당시 LG 소속이던 채은성(현 한화)과 양석환(현 두산)이 5회 연속타자 홈런으로 힘을 보탰다.
#천적이 생기는 이유
천적과 대결이 더 괴로운 이유는 단순히 1패를 안기 때문만은 아니다. SSG와 매 경기 1~2점 차 승부를 하고도 8패를 안은 올해의 키움처럼, 유독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경기가 꼬여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많아서다. 과거 특정팀에 호되게 당했던 한 선수는 "순조롭게 이길 것 같던 경기가 갑자기 잘나가던 마무리 투수의 블론세이브로 뒤집히거나, 평소에는 보기 어려웠던 황당한 실책 같은 게 나와서 승리를 내주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던 경기를 놓칠 때는 팀이 두 배의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정 베테랑 타자에게 유독 약한 한 투수도 "평소에는 내 피칭에 집중해서 던지지만, 천적 타자가 나오면 내가 아닌 상대를 먼저 생각하다 내 페이스를 잃는다. 그러다 그 선수에게 한 방 맞으면 평정심이 흔들려서 이후 다른 타자들과 승부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증언했다.
애초에 천적은 왜 생길까. 대부분 '첫 단추'에서 결정된다는 게 많은 야구인의 증언이다. 한 시즌 첫 맞대결에서 겪은 불운이 시즌 끝까지 이어지는 팀이 많다는 의미다. "야구는 멘탈 스포츠"라는 격언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특히 투수들에게는 데뷔전의 기억이 향후 프로 생활의 명암을 가르기도 한다. 데뷔와 동시에 KBO리그를 평정했던 류현진(토론토 블루제이스)이 그랬다. 그는 한화에서 뛸 때 LG전에 유독 강했다. 개인 통산 99승 가운데 LG전에서만 20%에 가까운 19승을 따냈다. LG전 30경기 평균자책점이 2.45. 역대 정규이닝 한 경기 최다 탈삼진(17개) 기록과 7번의 완투(완봉 3회 포함)를 포함해 의미 있는 여러 기록을 LG전에서 쌓았다. LG 입장에서는 악연 중의 악연인 셈이다.
이 모든 게 류현진의 프로 데뷔전부터 시작됐다. 류현진은 고졸 신인이던 2006년 4월 12일 잠실 LG전에 처음 선발 등판해 7⅓이닝 3피안타 10탈삼진 무실점으로 '괴물 투수'의 등장을 알렸다. 처음 보는 신인 투수에게 호되게 당한 LG는 그 후로 꾸준히 류현진에게 승리를 헌납했다.
류현진이 떠난 뒤 KBO리그 에이스 자리를 물려받았던 SSG 김광현도 그랬다. 그는 데뷔 시즌인 2007년 5월 13일 광주 KIA전에서 6이닝 무실점으로 인상적인 첫 승리를 신고한 뒤 수년간 'KIA 킬러'로 이름을 떨쳤다. 통산 152승 중 KIA전 승리가 24승으로 가장 많고, 평균자책점도 2.93으로 한화전(2.80) 다음으로 좋다. 김광현이 완투한 8경기중 3경기가 KIA전이었고, 완봉승도 한 차례 해냈다.
외국인 투수 중에서는 더스틴 니퍼트와 삼성의 천적 관계가 가장 유명했다. 니퍼트는 두산에서 7년(2011~2017년), KT에서 1년(2018년)을 뛰면서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통산 100승 고지를 밟은 장수 외국인 투수였다. 그는 한국에서 올린 102승 중 5분의 1에 가까운 20승을 삼성전에서 쓸어 담았다. 삼성전 평균자책점도 2.38로 다른 팀 상대 성적보다 월등하게 좋다. 통산 평균자책점(3.59)보다 1.21점이나 낮을 정도다. 니퍼트는 2015시즌 부상으로 100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6승을 올리는 데 그쳤지만,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1위 삼성 타선을 완벽하게 제압해 정규시즌 3위 팀 두산의 역전 우승을 일궜다. 니퍼트는 그 활약 덕에 2016년 두산과 재계약에 성공했고, 삼성 타자들은 일제히 탄식을 터트렸다는 후문이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