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아시아 포럼’의 키노트 스피커(Keynote Speaker, 주제·대표강연자)로 초청받아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키워가는 K콘텐츠의 경쟁력과 전망에 대해 강연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갖게 됐다. 영화 ‘기생충’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이후 전세계에서 한국 콘텐츠가 차지하는 위상은 확고해졌다. 앞으로도 한국 콘텐츠의 약진은 계속될 거라는 전망과 함께 강연을 마쳤다. 많은 청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고 자평한다.
3일 동안 공식 일정을 마치고 아내와 함께 짧은 일정이나마 남부독일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프랑크푸르트를 시작으로 하이델베르크, 바덴바덴, 슈투트가르트, 퓌센, 콘스탄츠를 돌아본 뒤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오는 1000km가 넘는 자동차여행이었다.
유서 깊은 남부 독일을 렌터카를 이용해서 여행하는 것은 역사 깊은 유적지와 독일 소도시의 면면을 살피는 의미가 있었다. 동시에 독일이 자랑하는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경험하는 묘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아우토반(AUTOBAHN)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 된 독일이 자국 경제부흥을 이루고자 개발한 세계 최초 고속도로 네트워크다. 지정된 구간에 한해서는 속도 제한을 두지 않는 말 그대로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다.
한국, 미국, 캐나다 등지를 자동차로 여행해본 나는 100km/h에서 120km/h 사이 속도 제한이 있는 고속도로만 경험해봤다. 속도가 무제한인 고속도로는 경험해본 적이 없는 터라 남부 독일 자동차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한편으론 설레고 한편으론 두려웠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소형 SUV를 빌려 여행을 시작한 뒤,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순간 설렘보다는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아우토반을 달리면 달릴수록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에서도 나름의 원칙이 있고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차량이 내 뒤에 다가오고 있으면 고가의 슈퍼카든 아니든, 스펙이 하이엔드급의 차든, 아니면 자존심이 센 운전자의 차든 간에 모두 추월선을 내준다는 점이었다. 뒤차도 거의 대부분 앞서가는 차가 자신보다 속도를 내지 않고 있어도 상향등을 켠다든가, 경적을 울리는 대신 차분히 자신의 존재를 앞차가 인지해서 주행선으로 비켜가도록 인내해줬다. 이런 무언의 원칙이 아우토반에 존재했다. 모든 운전자들이 이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보다 빨리 안전하고 잘 달릴 수 있는 차가 뒤에 있다면 주저 없이, 두말없이 추월선에서 주행선으로 자리를 비켜줬다. 주행선이 비어있다면 굳이 추월선으로 들어서는 일 없이 자신의 역량만큼 자신의 능력만큼 갈 길을 가는 것이 아우토반의 무언의 원칙이었다. 아우토반 위에서 이 원칙은 철저히 지켜진다는 점을 몸소 체감했다.
나는 386(586)세대다. 우리 세대는 조국 민주화에 기여했고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경제 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은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도 믿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세대가 언제까지 추월선에 있으면서 다른 세대를 선도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내 차가 어떤 차인데? 내 차의 스펙이 얼마나 화려한데? 내가 얼마나 운전을 잘하는 사람인데”라는 요소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나보다 경험이 적고, 나보다 더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운전자가 운전하는 새로운 형식 차들이 내 뒤에 추월선으로 진입했으면 우리는 두말없이, 주저 없이 뒤차에게 추월선을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조건적으로 모든 386들이 추월선을 양보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명성으로, 왕년의 추억으로,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과 독선으로 추월선에 머물면서 원활한 흐름을 막지는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선배들에게 그랬듯이 이제 우리보다 더 잘 달리고, 더 안전하게 달리고, 그리고 우리 모두를 목적지에 무사히 달리게 할 수 있는 후배들에게 추월선을 내어주고 우리는 그저 묵묵히 주행선을 달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동연 영화제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