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예쁜 아티스트’ ‘누군가의 기적’ 꿈꿔온 대학생…사망 계기로 범죄 피해자 보호 제도 개선 움직임
꽃다운 나이, 남은 어른들에게는 의미 있는 과제를 건네고 별이 되었다. 혜빈 씨가 세상을 떠나자 곳곳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비록 가족의 곁은 떠났어도, 혜빈 씨는 생전 바람대로 누군가의 기적이 될 수 있는 씨앗을 남겨 두었다.
#"예쁜 내 딸, 우리 혜빈이"
"우리 혜빈이는 잘 버티고 있어요. 저희들도 견뎌내고 있답니다. 기자님, 앞으로도 꼭 목소리를 내주세요."
지난 8월 24일 혜빈 씨의 가족이 기자에게 보낸 메시지다. 일주일 전 일요신문과 만났을 때 가족들은 줄곧 '국가다운 국가'를 강조했다. 불과 약 2주 입원한 비용이 약 2300만 원에 달해 정부 지원을 촉구하면서도, 단지 혜빈이뿐 아니라 서현역 사건 모든 피해자와 앞으로 또 나올 수 있는 희생자들에게 국가가 버팀목이 돼 줘야 한다는 메시지였다(관련 기사 [인터뷰] '서현역 흉기난동' 뇌사 20대 부모 "피해자 연대해 서로 위로 되길").
진심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도 가족들은 메시지 등을 통해 이를 강조했다.
"계속 걱정돼서 말씀드려요. 혜빈이 개인보다는 사회와 구조의 개선, 더는 같은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 마련 필요성을 꼬집어 주셨으면 해요."
그러다 지난 8월 28일 늦은 밤, '혜빈이가 잘 버티고 있다'고 한 지 꼭 나흘 지난 이날 다른 문자가 도착했다.
"혜빈이 조금 전에 떠나보냈습니다."
곧장 수원 아주대병원으로 달려가 보니 부모는 세상의 전부를 잃은 듯 무너져 내린 모습이었다.
"혜빈이, 예쁜 내 딸, 우리 혜빈아…."
사람 한 명 없이, 꺼진 조명 아래 어둡기만 한 장례식장의 한 구석진 곳에서 혜빈 씨의 어머니는 딸이 가장 좋아했던 너구리 인형을 껴안고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목이 메여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기자는 물론 다른 친척들마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표정으로 연신 딸의 이름을 되뇌일 뿐이었다.
2003년 7월 9일 경기 성남에서 태어난 김혜빈 씨. 조금 늦게 결혼한 엄마 아빠의 귀중한 외동딸로 아낌없는 사랑을 받아온 덕분에 친구는 물론 학교와 학원 및 친척 등 누구든 미소를 짓게 만드는 소녀였다.
혜빈 씨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그녀를 소설 속 빨강머리 앤처럼 '상냥하고 귀여운' 수다쟁이로 "만나면 대화가 끊이지 않는 아이"라고 떠올린다.
부모한테도 '가슴에 솟아나는 아름다운 꿈'을 펴온 대학생 딸이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사랑해 동물이나 각종 캐릭터를 그려 벽에 붙여 놓기도 했고, 밝게 웃으며 엄마 아빠에게 "선물이야!"하며 쥐어주곤 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 미대생의 꿈을 갖게 돼 재수 끝에 예술대에 입학하면서 기쁨에 펄쩍 뛰며 행복해하던 얼굴이 부모 기억에는 아직도 선명하다.
혜빈 씨 소셜미디어(SNS)의 본인 소개란에도 '아티스트'라는 표현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실제로 그림뿐 아니라 연기에도 소질이 있어 훗날 뮤지컬 무대에도 서길 꿈 꿨고, 글 솜씨도 좋아 엄마와 같이 글을 쓰고 이를 엮어 그림책도 내려고 했다.
따뜻한 마음씨에 주변 모두가 그녀를 응원했다. 혜빈 씨 SNS에는 이런 글도 있다.
"고비 때마다 좋은 어른들이 있어줘서 감사하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그 분들이 나의 구원이었듯, 나도 누군가에게 기적처럼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다."
엄마 아빠는 그런 혜빈 씨가 몹시 든든했다.
애어른처럼 어찌나 생각이 깊은지 혜빈 씨는 부모에게 손 벌리기를 꺼려했다. 맞벌이에 혹 정성을 다하진 못한 게 아닐까 우려하는 부모님에게 '걱정 마시라'는 듯 성인이 되어선 학원 아르바이트 등으로 자기 삶을 만들어 나아갔다.
부모는 "이제 대학도 한 학기밖에 안 다녔지만 학교든 학원이든 친구들한테도 인기가 많은 아이였다"며 "구김살이 없고 늘 해맑아서 엄마 아빠를 걱정시킨 적도 없는 그런 우리 딸이었다"고는 울음을 삼켰다.
독하게 재수해 보란 듯이 성과를 거두었듯 사고 뒤 수술을 받으면서도 힘겨움을 이겨 내는 것 같았다.
혜빈 씨가 입원한 뒤 친언니처럼 종일 그녀를 지켜온 사촌언니는 "병원에 올 때부터 상태가 워낙 안 좋긴 했지만, 경과 등을 지켜본 의료진들이 '어려서 그런지 굳건히 잘 버텨내고 있다'기에 모두가 희망을 품었다"면서 차마 말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변화한 세상, 간절한 소망
혜빈 씨가 세상을 떠나며 사회 곳곳에서는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학 친구들과 이웃주민들이 일제히 나섰다. 혜빈 씨와 유사한 범죄 피해자 보호 및 지원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서명운동을 통해 서현역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성남시와 경기도 등 지자체의 조속한 지원책 마련, 범죄피해자 보호법에서 규정한 '중복지급 금지 원칙'을 개정해 동시 수령이 가능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고 있다.
실제 혜빈 씨 가족은 지자체에서 적정한 지원을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경기도와 성남시 가운데 한 곳만 선택해야 하는 규정이 대단한 골칫거리였다. 신청 절차도 복잡하고 제출해야 할 서류도 산더미였는데, 결과적으로 지원은 받지 못했다.
검찰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이는 범죄피해자 지원센터를 통해 5년에 5000만 원만 가능하다. 한 해 1500만 원 수준이다. 혜빈 씨 가족에 보름도 안 돼 청구된 약 2300만 원과 비교하면 허무한 액수다. 이 역시 다른 지원금과 중복수령이 안 된다.
혜빈 씨 학우들인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의 학생회는 "묻지마 범죄 가해자의 부당한 감형, 거의 없다시피 한 지자체의 제도적 지원은 또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사회 문제이자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라며 "천문학적 병원비 해결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는 것도 방법이지만, 우리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를 이야기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학생회는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지하1층 입구에 혜빈 씨 추모공간을 조성하기도 했다. 9월 11일까지 운영한다.
지역사회에서는 조례를 추진한다. 국민의힘 소속 이기인 경기도의원은 지자체 차원에서 마련할 수 있는 지원책 신설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이상동기 범죄 방지 및 피해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대표발의해 올 9월 심의를 앞두고 있다.
해당 조례안은 이른바 '묻지마 범죄' 등 이상동기 범죄 피해자를 위한 원스톱 지원센터를 설치해 상담과 법률 서비스 및 의료비 지원 등을 돕는 게 핵심이다. 범죄 예방을 뼈대로 한 치안 활동 강화 등도 당연하다. 관련 기관들의 예산편성 및 인력배치가 필요해 경기도와 자치경찰 등의 '통 큰 결단'이 관건으로 꼽힌다.
이기인 의원은 "무고한 시민을 비롯한 국민들을 향한 이상동기 범죄인 이른바 '묻지마 범죄'는 특별한 동기와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조례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최원종이 일으킨 이른바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의 사망자는 2명이다. 혜빈 씨와 같이 최원종 차에 치인 60대 이희남 씨도 사고 발생 사흘 만인 8월 6일 결국 숨을 거뒀다. 뿐만 아니라 흉기에 찔려 크게 다치는 등 무고한 피해자도 12명이다.
제도 개선 등으로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까. 혜빈 씨 가족들은 "피해 예방과 지원에 관한 법을 정비하고 선례를 만들어 더는 서현역 및 신림동 사건과 유사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사회가 변화하길 간절히 소망한다"는 말을 남겼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