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 ‘범천’ 역으로 펼친 명불허전 카리스마…“액션 신, 체력 걱정했지만 ‘더 할 수 있겠다’ 싶어”
신작으로 오랜만에 기자와 마주한 배우 허준호(59)의 얼굴에는 쑥스러움과 설렘의 빛이 번갈아가며 감돌았다. 가장 최근 인터뷰가 영화 ‘모가디슈’(2021)였지만,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으로 진행됐던 것이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아있었다고 했다. 긴 시간 동안 얼굴을 마주하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다시 주어졌다는 것이 행복할 뿐이라는 그는 인터뷰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범천의 얼굴은 특수분장도 있고, 나중에 CG로 덧입힌 것도 있고 그랬어요. 저는 다 맡기는 편이라서 범천의 외형은 설정에 정해진 그대로 따랐죠. 제가 이전에도 그렇게 긴 가발을 쓴다든지, 특수분장을 많이 하는 비슷한 역할들을 꽤 했거든요. 멜로 배우가 아니다 보니까(웃음). 멜로 배우들 보면 막 카페에서 멋지게 촬영하던데 저는 동굴에서 구르고 있잖아요(웃음). 하지만 그런 것에 많이 익숙해져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귀신을 믿지 않지만 귀신같은 통찰력을 가진 가짜 퇴마사 천박사(강동원 분)가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강력한 빙의 사건을 의뢰 받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에서 허준호는 신령이 되고자 하는 비뚤어진 욕망을 가진 악귀 범천을 맡아 천 박사에 맞서는 열연을 펼쳤다. 카리스마 넘치는 허준호 본연의 얼굴에 아주 약간 거친 색을 덧칠했을 뿐인데도 스크린을 온전히 장악하는 악귀가 완성됐다. 범천의 등장만으로 이야기에 묵직한 무게감이 실릴 정도니, 그를 연기한 허준호에게 아낌없는 찬사가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허준호 본인은 작품을 보고 나서 아쉬움이 더 짙게 남았다고 했다.
“마지막 범천의 시퀀스가 너무 아쉬웠어요. 촬영 때는 감독님 요구대로 해서 다 오케이가 난 상황이었는데, 후반 CG 작업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범천을 묶은 사슬이 붉게 달아오르잖아요? 연기할 때 저한테 그게 뜨겁다란 얘기를 안 해주신 거예요(웃음). 사슬은 불에 달궈지고 있는데 연기하는 제 얼굴엔 불이 없는 거죠. 사슬에 묶였다는 압박감에 대한 리액션이지 뜨거움을 표현하지 못한 게 참 아쉬웠어요.”
배우의 아쉬움은 미흡한 연기에서부터 출발한 자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관객들을 만족 시켜주지 못했다는 데서 온 괴로움이기도 했다. “요즘은 영화 티켓 가격이 1만 원이 넘는데, 관객들이 그 돈을 가져와서 영화관에 들어가기까지 또 4~5시간 동안 소중한 시간을 보내야 하잖아요. 그 시간과 돈을 저한테 주시는 건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디테일을 살려서 연기하는 것뿐이거든요. 그러니 그거 하나 놓친 게 너무 아쉬울 수밖에요”라며 씁쓸해 하는 그는 ‘천상 연기자’였다.
그런 그가 ‘천박사 퇴마연구소: 설경의 비밀’ 출연을 결정하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사실은 도망가고 싶었다”며 조심스레 귀띔한 그는 예순을 바라보는 자신이 과연 강동원과 맞붙는 강렬한 액션 신을 소화해 낼 수 있을지를 가장 우려했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체력이었죠(웃음). 주변에선 다 ‘해! 왜 안 하려고 해?’하면서 추천해주시는데 제 몸은 또 제가 제일 잘 알잖아요. 체력의 한계를 알고 있다 보니 과연 이 액션을 해낼 수 있을지 우려가 되더라고요. 좋은 배우들을 데려다 놨는데 나 하나가 너무 느려서 다른 배우들을 방해하면 어떡하나…. 그런데 한 번 해보니까 ‘어, 더 할 수 있겠는데’ 싶은 거예요(웃음). 예전과 달리 요즘 촬영 기법은 하나씩 계산해서 찍어주시는 건데, 이렇게만 하면 내가 체력관리를 더 잘해서 다음에 또 좋은 액션을 할 수 있겠단 욕심이 생겼죠.”
그러면서 함께 합을 겨룬 젊은 배우들에게 엄지를 치켜들기도 했다. 이번엔 강동원, 앞서 ‘모가디슈’에서는 조인성의 액션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영광(?)을 언급하며 허준호는 “역시 액션은 이렇게 길쭉길쭉 큰 사람들이 해야 한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강동원과는 서로 ‘말 없는 동지’들이 뭉쳐 함께 자장면을 먹으며 스크린 골프를 치러갔던 뒷이야기도 덧붙였다.
“동원이는 그냥 팔만 뻗어도 예뻐요, 진짜로. ‘모가디슈’의 인성이, 우리 ‘천박사’의 동원이같이 큰 애들이 하는 액션은 팔도 다리도 쭉쭉 뻗어서 너무너무 예쁘더라고요. 저도 크지 않냐는 말씀을 해주시는데, 저는 옛날에나 큰 키였지 지금은 아니죠(웃음). 사실 제가 또 일할 때 연기에 집중하느라 정말 말이 없는 편인데 동원이도 말을 잘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 그러다가 ‘안 되겠다, 우리 골프 치러가자!’하고 제가 먼저 다가갔던 거죠(웃음). 동원이도 골프를 좋아해서 다행이었어요.”
‘모가디슈’ 촬영 때도 조인성, 구교환 등 젊은 배우들에게 직접 커피를 타 주며 선후배 사이의 벽을 먼저 허물었던 허준호는 현장에서 자신의 모토가 ‘귀찮은 사람 되지 않기’라고 했다. 1986년 데뷔해 40년 가까이 배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대선배인 만큼 별다르게 뭔가 하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가 후배들에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다는 게 허준호의 이야기다.
“저는 현장에서 군림하지 않는 사람, 그림자 같은 사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다들 선배는 불편하잖아요. 안 친한 선배랑 5분 이상 같이 계실 수 있으세요? 전 못 해요(웃음). 그래서 저도 후배들이랑 있으면 제가 먼저 빨리 떠나주려고 해요. 아무래도 남들이 저한테 좀 다가오기 힘든 얼굴이라고, 불편한 얼굴이라고 하니까(웃음). 특히 악역을 맡을 때는 제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다른 배우들과 조금 더 거리를 두는 편이에요. 요전에 드라마 ‘왜 오수재인가’를 할 때도 남주인공을 맡은 배우 분과 촬영이 끝나는 날까지 얘기를 안 했다니까요. 다 끝나고 나서야 다가가서 안아주고 그랬죠(웃음).”
현장에서 ‘굳이 힘주지 않는’ 선배이자 배우로 남으려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이 순간이 그에게 있어서는 기적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라고도 강조했다. 2007년 드라마 ‘로비스트’ 이후 약 9년여의 공백기를 가졌던 허준호는 다시 돌아온 현장에서 여전히 그를 찾아주는 감독들과 대중들이 있다는 사실에 매일 감사하는 나날을 보내왔다고. 호사가들이 흔히 말하는 제2의 전성기가 아니라 제2의 삶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새로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60대를 눈앞에 둔 지금도 20대 같은 욕심과 열정이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전 지금의 삶이 좋아요. 공백기 전의 삶은 다 잊어버렸거든요(웃음). 어떻게 보면 지금 제가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죠. 우리는 흥행 사업이잖아요. 배우는 팔려야 하고, 작품은 흥행이 돼야 하는데 이렇게 돌아와서 아직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래서 게을러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해요. 그리고 여전히 욕심도 많고요. 20대부터 60대까지 살아보니 마음에 여유만 조금 생겼다뿐이지 욕심은 여전해요. 이번 ‘천박사 퇴마 연구소’도 액션을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장 컸죠. 현역에서 액션으로 뛰는 50대 후반 배우가 별로 없잖아요. 앞으로도 또 액션 역할을 주시면 저는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