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두 번째 불명예, 사법부 수장 장기 공백 전망…16명 임명 강행 윤 정부에 대한 야권의 경고 의미도
#35년 만에 국회 문턱 못 넘어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됐다. 10월 6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 결과 총 투표 의원 295명 중 찬성 118표, 반대 175표, 기권 2표가 나왔다. 임명동의안 가결 요건인 출석의원 과반(148명)에 30표 부족했다.
대법원장 후보자가 국회에서 인준 부결된 건 35년 만이다. 이 후보자는 신임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부터 자질 부족, 부동산 투기 및 농지법 위반, 비상장주식 미신고 및 배당금 수령, 아들의 김앤장 특혜 인턴, 식민사관 역사관, 성인지 감수성 부족 등 뭇매를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서울대 법대 시절부터 인연이 있고, 판사와 검사가 된 뒤에도 술자리를 함께했다는 ‘친분’이 알려지면서 사법부 독립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9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치러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이 후보자는 “법을 몰랐다” “송구하다”고 말하며 논란을 자초했다.
민주당은 10월 4일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사실상 부결시키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어 6일 국회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를 열어 ‘부결’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윤영덕 원내대변인은 “홍익표 원내대표는 이 후보자가 사법부 독립을 지키고 고위공직자로서 직무 수행하는 데 있어 능력·자격 등 여러 문제가 있는 후보라는 민주당 의원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당론 부결을 제안했다”며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참석 의원 전원 일치 의견으로 당론 채택부결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균용 후보자는 국회 임명동의안 표결을 하루 앞둔 10월 5일 입장문을 통해 “국민 여러분이나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에서 보시기에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면 이 기회를 빌려 송구하다”며 “부디 후보자에게 대법원장 직위의 공백을 메우고 사심 없이 국가와 사회 그리고 법원을 위해 봉직할 기회를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읍소했지만 싸늘한 민주당 여론을 돌리진 못했다.
#공백 두 달 이상 이어질 듯
국회가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킴에 따라 사법부 수장 공백사태는 장기화될 전망이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지난 9월 24일 퇴임하고, 이 후보자 임명 동의 절차가 지연되면서 대법원장 공석은 열흘 넘게 이어지고 있다. 국정감사 등 국회 일정상 공백은 두 달 이상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힘은 대법원장 공백사태 책임을 민주당에 떠넘기고 있다. 윤재옥 원내대표는 표결에 앞서 열린 국정감사 대책회의에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이 후보에 대한 일부 논란이 있었으나 인준을 부결시킬 정도의 사유는 아니었다”며 “민주당이 수권 태세를 갖춘 공당답게 국민을 위해 이 후보자 인준안을 통과시켜 대법원장 공백사태를 하루빨리 해소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임명동의안 부결 결과가 나오자 국민의힘은 본회의를 퇴장해 의총과 규탄대회를 차례로 열고 “사법 공백 야기시킨 민주당은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전주혜 원내대변인은 “민주당은 권순일 전 대법관처럼 이재명 대표를 무죄로 만들어줄 ‘방탄 대법원장’을 원하는 것인가”라며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를 자신들이 발아래 두려는 반헌법적 행위를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민주당은 부결 책임을 인사권자인 윤석열 대통령에게 물었다. 윤영덕 원내대변인은 “윤 대통령의 불통 인사가 자초한 결과”라며 “윤 대통령은 사법부의 수장의 품격에 걸맞은 인물을 발탁하라는 입법부의 평가를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반박했다. 국민의힘을 향해서도 “‘윤석열 정부 발목잡기’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며 “대법원이 윤석열 정부를 지원하고 뒷받침하는 곳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누군가 발목을 잡았다면 그것은 바로 윤석열 정부”라고 꼬집었다.
국민의힘 한 전직 의원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임명 과정에서 논란이 없었느냐. 아파트 다운계약서 작성 등 도덕성 문제가 있었지만, 사법부 공백을 우려해 대승적으로 인준해줬다. 이균용 후보자 역시 의혹이 인준을 부결할 정도는 아니었다”며 “민주당이 임명동의안 부결까지 끌고 간 것은 윤석열 정부 발목 잡는 것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반면 민주당 재선 의원은 “이균용 후보자는 개인 비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또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제대로 해명도 하지 못했다. 판사가 ‘법을 잘 몰랐다’는 답변이 말이 되느냐”며 “더욱이 대법원장으로 자질이 부족했다. 전국 법원장 평가에서도 최하위권을 계속해서 받았는데, 사법부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심지어 대법관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대법원장에 지명될 수 있었느냐. 그래서 윤 대통령의 친분에 따른 ‘코드 인사’라는 말이 나오는 거다. 사법부의 독립 차원에서 당연히 부결시켜야 했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이번 이 후보자 임명 부결을 두고 윤석열 정부 견제 차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야권 한 전략통의 말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된 고위공직자가 벌써 16명이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나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도 임명을 강행할 것으로 보인다. 법안도 마찬가지다. 국회가 올린 양곡관리법·간호법은 이미 거부권을 행사했고, 노란봉투법·방송3법은 행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는 정부가 필요한 법안은 국회를 거치지 않고 시행령 개정을 통해 하고 있다. 국회와 야당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다. 이에 국회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임명할 수 있는 대법원장을 통해 국회의 존재감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임명동의안 표결 전날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행 후보자는 인사청문회 하루만 버티자는 생각이었는지, 여러 의혹에 자료 제공도 하지 않고 제대로 된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결국 막판에는 청문회장을 퇴장해 줄행랑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으켰다”며 “이러한 윤석열 정부 인사들의 태도가 이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당론 채택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윤석열 대통령 선택은?
대법원장 후보자가 국회에서 인준 부결된 전례는 지난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가 유일하다. 약 35년 만에 대법원장 후보자가 낙마한 것이다.
1988년 초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7월 정기승 전 대법관을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는 군사정권에 협력하며 출세한 대표적 인사라는 지적이 나왔다. 민변은 성명을 통해 “정 후보자는 유신시대와 대한민국 제5공화국 치하에서 사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시국사범 재판 등에 부당한 간섭을 일삼는 등 정치권력의 의도에 직·간접으로 협조해 온 허울 있는 인물”이라며 “재야 법조인들의 압도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동의를 요청한 것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사법부를 손아귀에 장악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드러낸 폭거”라고 비판했다.
여소야대 국면이었던 국회는 총 투표 의원 295명 중 찬성 141표, 반대 6표, 기권 134표, 무효 14표로 정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부결시켰다. 과반에 7표 모자랐다. 헌정 사상 처음 대법원장 후보자가 국회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순간이었다. 이날 표결에서 야당인 평민당과 민주당은 당론에 따라 소속 의원 131명 전원이 백지투표하면서 기권했다. 다만 여당인 민정당과 공화당에서도 3명의 기권표와 4명의 반란표, 14명의 무효표가 나왔다.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 부결로 정치적 타격을 입은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결국 이일규 전 대법관을 대법원장 후보자로 다시 지명했다. 이 대법관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대에도 정권 눈치를 보지 않고 시국·공안사건에서도 대법관으로 소수의견을 내는 등 소신을 지킨 판결로 법조계 안팎에서 신망이 깊었다. 이 대법관은 사법부 독립이 보장돼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걸고 대법원장직을 수락했고, 국회에서도 임명동의안을 가결시켰다.
정가에선 윤 대통령이 이균용 후보자 대신 대법원장 후보자로 어떤 인물을 지명할지 관심이 집중된다. 이 후보자 임명안 부결 소식이 전해지자 대통령실은 “반듯하고 실력 있는 법관을 부결시켜 초유의 사법부 장기 공백사태를 초래해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을 향해선 “국민권리를 인질로 잡고 정치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 직후 이뤄진 통화에서 “이재명 대표 구속 영장이 기각된 후 전투 모드로 돌입한 민주당이 실력 행사에 나선 것 같다”면서 “민주당이 이 후보자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당론으로 정하지 않아 내심 가결을 예상했었다. 본회의 직전 친명 강경파들이 당론으로 부결을 밀어붙였고, 이재명 체포동의안 때 당론을 따르지 않았던 일부 의원들이 곤욕을 치렀던 상황과 맞물리면서 일제히 부결에 표가 몰린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민주당 또 다른 관계자는 “대법원장은 국회 동의 없이 임명할 수 없다. 이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정기승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한발 양보해 사법부 독립을 강조한 이일규 대법관을 선택했다”며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1년 반이 지나도록 국회와 야당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후보자 부결에 대해서도 대통령실은 민주당을 비판하고 있다. 윤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처럼 새로 대법원장 후보자 지명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겠느냐”고 반문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