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연쇄폭행 사건 화장실·엘리베이터가 범죄공간으로…CCTV 늘리고 귀갓길 안전망 확충 등 노력 필요
걸그룹 출신 배우 전효성 씨가 2021년 여성가족부가 만든 영상에서 했던 말이다. 당시 일부 누리꾼들은 과장된 발언이라며 악의적인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전 씨의 말이 과장이 아닌 현실임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나 최근 경기도 수원에서 발생한 연쇄폭행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들은 자신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집으로 가는 길에 당한 재앙이다.
불안함을 느낀 사람은 전효성 씨뿐만이 아니었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2년 성폭력 안전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 2명 가운데 1명은 ‘집에 혼자 있을 때 낯선 사람이 올까 두렵다’고 답했다. 같은 조사에서 성추행 피해를 경험해본 적 있다고 답한 여성들은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에서 피해를 경험한 비율이 월등히 높았다. 최근엔 여러 사건들로 인해 주거공간의 엘리베이터도 여성들에게 위험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다. 모든 일상 공간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낯선 남성과 엘리베이터 타는 것 무서워”
일요신문이 만난 2030 여성들은 귀갓길이 무섭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경기도에 사는 20대 여성 최 아무개 씨는 “거주지가 직장과 거리가 있는 편인 데다 인적이 드물어 밤길에 항상 두려움에 떤다. 친구들이 SNS로 ‘묻지마 범죄’ 게시물을 자주 보내주는데 혹시 내가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 집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20대 여성 임 아무개 씨는 “수원 연쇄폭행 사건에 대해 듣고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남성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면 불안해서 혼자 의심하곤 한다. 내리고 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상대방을 의심해 죄송한 마음이 든다. 으슥한 화장실 역시 경계심 탓에 들어갈 수 없다. 밝은 가로등이나 잘 작동하는 CC(폐쇄회로)TV가 많아 항상 안심할 수 있는 귀갓길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20대 여성 김 아무개 씨는 “매번 새로운 범죄 뉴스를 접할 때마다 경계심을 갖게 되는 장소와 공간이 늘어가는 것 같다. 늦은 귀갓길, 허름한 상가 화장실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장소에서도 언제든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CCTV 같은 치안 도구는 범죄자들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현장에 배치되는 경찰을 늘리고 건전치 못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대한 감시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20대 여성은 “신당역 살인 사건 전에는 불법 카메라를 걱정해 공용화장실 사용을 꺼렸는데, 요즘에는 더 심한 일을 걱정하면서 못 가고 있다. 한번은 노란 옷을 입은 분들이 밤늦게 집에 데려다 준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성 안심귀가 스카우트였다. 이러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수원 연쇄폭행 현장 찾아가보니
10월 5일 오후 9시 50분쯤 화성시 봉담읍 한 상가 여자화장실에 침입한 남성이 10대 여성의 목을 조르고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고등학생 A 군(16)으로 과거에 성범죄를 저지른 전력이 있으며 촉법소년이 아니어서 형사처벌이 가능한 상태다.
A 군의 묻지마 폭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일 오후 9시 5분쯤, 수원시 권선구에 위치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A 군은 10대 여성의 목을 조르고 폭행했다. 불과 45분가량 지난 9시 50분쯤, A 군은 인근의 또 다른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10대 여성의 목을 조르고 폭행해 기절시켰다. A 군은 기절한 여성을 비상계단으로 끌고 나온 뒤 휴대전화를 훔쳐 달아났다.
A 군은 10월 7일 오후 12시 30분쯤 수원역 인근 PC방에서 체포됐다. 경찰은 A 군이 범행 과정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정황도 발견, 추가 혐의를 적용해 10월 9일 구속했다. 결국 16일 경기 수원서부경찰서는 강간미수, 강간상해, 강도, 성폭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를 받는 A 군을 검찰에 구속 송치했다.
아직 A 군의 범행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이 강간미수, 강간상해 혐의를 적용한 점을 미루어봤을 때 성범죄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경찰 관계자는 미성년 피해자 보호와 2차 가해 방지를 위해 구체적인 범행 사실을 밝힐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직접 A 군의 행적을 쫓아봤다. 먼저 찾아간 화성의 상가 화장실은 스터디카페 바로 앞에 위치해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 수 있는 위치였다. 수원 아파트 두 곳은 모두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심지어 마지막 범행이 이뤄진 아파트는 1000세대가 넘는 대단지로,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지나다니는 주민들에게 쉽게 발각될 수 있었던 환경이다. 비교적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상 공간이 범행 장소로 활용됐다.
첫 번째 폭행이 발생한 화성 봉담읍 상가와 두 번째 폭행이 발생한 수원 아파트는 11km 정도 거리에 있다. 두 범행은 거의 정확히 24시간 만에 발생했다. 두 번째 폭행과 세 번째 폭행은 45분가량의 시간차가 있다. 두 장소의 거리는 6km, 대중교통을 타면 30분 정도 걸렸다. 수사가 조금 더 신속하게 이뤄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이 범죄를 예방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경찰이 범행 장소를 특정해서 사전에 대기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일상 공간에서 연이은 이상동기 범죄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경찰이 내놓는 대책은 순찰 강화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연달아 발생하는 ‘닮은꼴’ 범죄들
수원 연쇄폭행과 유사한 범죄로는 부산 돌려차기 사건이 있다. 2022년 5월 부산시 한 오피스텔에서 귀가하는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이현우 씨(31)는 대법원에서 강간살인미수로 징역 20년이 확정됐다. 이 씨는 피해 여성을 이른바 돌려차기 등으로 마구 때려 의식을 잃게 만들었다. 이어 실신한 여성을 성폭행할 목적으로 CCTV 사각지대에 끌고 갔으나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쳤다.
경호업체 직원 출신인 이 씨의 폭행으로 당시 피해자는 외상성 두개내출혈과 오른쪽 발목 마비 등의 상해를 입었다. 이 씨는 성폭행 혐의는 부인했으나 범행 당시 현장 경찰관에 따르면 피해자의 바지가 내려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피해자는 2023년 6월 “가해자가 자신의 주소를 알고 있고 출소 후 보복을 예고한 상태”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7월 3일에도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30대 남성 B 씨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 한 아파트에서 귀가하는 20대 여성을 뒤쫓아 목을 조르고 폭행했다. B 씨는 여성에게 “죽기 싫으면 따라오라”고 협박한 뒤 비상계단에 끌고 가 폭행을 이어갔다. 비명을 들은 주민의 신고로 현장에서 달아난 B 씨는 4일 뒤인 7월 7일 경찰서에 자진 출석했다.
간음약취(간음 목적 약취 유인죄) 미수 혐의로 구속 송치됐던 B 씨는 피해자를 강간하려 했던 혐의가 추가로 확인돼 강간미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강간미수죄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는 간음취약미수에 비해 형이 무겁다.
이틀 후인 7월 5일 경기도 의왕시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20대 남성 C 씨는 의왕시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함께 있던 20대 여성을 주먹과 발로 무차별 폭행했다. C 씨는 성폭행까지 시도하다 주민에게 발각돼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해당 여성은 갈비뼈 골절 등의 부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 조사 결과 C 씨는 피해자와 같은 동에 사는 주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범행 직전 C 씨는 남성이나 여성이 여러 명이 탄 엘리베이터는 그냥 보내며 10분 넘게 성폭행 대상을 찾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C 씨는 현재 강간치상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C 씨 변호인에 따르면 C 씨가 평소 군대에 가지 않는 여성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9월 18일 서울 마포구에서는 30대 남성이 일면식 없는 20대 여성을 성폭행하기 위해 현관문 앞까지 쫓아가 목을 조르고 바지를 벗겼다. 당시 피해 여성 집에 친구가 있어 성범죄는 미수로 끝났다. CCTV를 통해 4시간 만에 체포된 이 남성은 10월 11일 강간미수, 주거침입죄로 구속 기소됐다.
네 사건과 수원 연쇄폭행 사건의 공통점은 일상 공간에서 발생한 폭행 사건이라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사건들이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모방 범죄가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된다. 일상 공간이 범죄 공간으로 대두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성들이 내 집 앞에서도 경계심을 놓을 수 없는 상태로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공동주택의 자체적인 범죄 예방 조치가 필요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경찰은 지난여름부터 신림역과 서현역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한 뒤 다중 밀집 지역에 경찰관을 집중적으로 배치하는 특별치안 활동에 나섰다. 하지만 아파트나 오피스텔과 같은 공동주택 내부는 이러한 치안 활동 범위를 벗어난다.
#CCTV가 만능은 아니다?
공동주택 내부의 방범 대책으로는 CCTV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노원구 상계동과 의왕 아파트 사건 범행 장소 두 곳에 모두 CCTV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아파트 복도와 계단 등은 사생활 침해 우려 등으로 CCTV가 없는데 두 사건 다 이 점을 노린 것으로 분석된다(관련기사 아파트에서 또…‘부산 돌려차기’ 닮은꼴 노원·의왕 현장 가보니). 부산 돌려차기 사건 가해자 역시 CCTV가 없는 곳까지 피해자를 끌고 갔다. 가해자들이 CCTV를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고, CCTV 설치를 늘리고 노후한 CCTV를 교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CCTV가 범행 자체를 막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범행 발생 뒤 용의자를 찾는 데 도움을 줄 뿐 실질적으로 피해를 막지는 못한다. 공동주택 엘리베이터 대부분에 CCTV가 설치돼 있지만 용의자들은 앞의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 버젓이 범행을 저지른다.
일각에서는 엘리베이터 문을 투명화하거나 CCTV로 비명 소리를 감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오윤성 교수는 “지엽적 대책일 뿐이다. 비용 자체가 추산되지도 않았지만 민간 보안과 관련된 비용을 누가 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또한 해외에서도 엘리베이터 문을 투명화한 사례가 없어 하나의 아이디어라고 보면 좋을 것”이라면서 “모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투명화하거나 비명 소리를 감지하는 CCTV를 설치하더라도 범죄를 전부 예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여성 대상 범죄가 하루이틀 일도 아니고 이따금 엘리베이터 내 범죄가 발생한다고 해서 범죄 트렌드가 바뀌었다고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귀갓길 안전망 확대하는 지자체와 경찰
현재 여성들의 안전한 귀갓길을 위한 제도로는 여성안심귀갓길, 여성 안심귀가 서비스 등이 있다. 지자체는 자체적으로 여성 안전망 확충에 나섰다. 10월 16일 경기도 성남시는 사업비 총 3500만 원을 투입해 여성안심귀갓길을 지역 내 5곳에 추가 조성했다고 밝혔다. 여성안심귀갓길에는 CCTV, 보안등, 비상벨 등이 설치된다.
이외에도 서울시 도봉구는 2022년에 이어 올해도 스마트 보안등을 200개 이상 설치했다. 스마트 보안등이 설치된 구역에서 보행자가 앱을 통해 긴급 신고를 하면 도봉구 통합관제센터와 관할 지구대로 즉시 신고된다. 10월 11일 서울시 은평구는 여성 안심귀가 서비스를 확대 운영한다고 밝혔다. 여성 안심귀가 서비스는 평일 늦은 밤에 귀가하는 여성들을 위해 안심귀가 스카우트들이 주거지까지 동행해 주는 서비스다.
경찰 역시 치안 역량 부문에서 변화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윤희근 경찰청장은 10월 12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최근 이상동기 범죄가 연이어 발생함에 따라 일상의 안전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경찰의 대응 역량을 높이는 노력과 함께 전 사회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함을 깊이 실감하게 됐다”며 “일선 현장의 치안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경찰 조직을 재편하겠다”고 밝혔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