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명? 4000명? 증원 규모는 발표 미뤄…의협도 필수의료 확충 긍정적, 정부 관련 예산 삭감 뒷말
#18년째 묶여 있는 의대 정원
10월 15일 비공개 고위 당정협의회에선 의대 입학정원 확대가 논의됐다. 필수 의료인력 부족, 지방의료 공백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이날 회의가 끝난 후 2025학년도 대학입시부터 의대 정원을 1000명 이상 늘리는 방안이 도입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일부 언론에선 4000명까지 증원하는 파격적인 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도 했다.
6월 발의된 필수의료법에 따르면 필수의료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직결된 분야로서 적절한 조처를 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할 수 없거나 심신에 중대한 위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의료서비스’를 말한다. 응급의학과 등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의사 수 자체가 부족해 필수의료 의사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OECD 보건통계 2023’에 따르면 한국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6명으로 집계됐다. OECD 평균인 3.7명보다 낮은 수치다.
그럼에도 의사 공급이 늘지 않았다. 의대 정원은 2006년부터 18년째 3058명으로 묶여 있다. 2023년 1월 보건복지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추산한 결과에 따르면 2010~2018년 평균 진료량을 유지했을 때 2035년 국내 의사 수는 9654명에서 1만 4631명까지 부족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의대 정원을 늘리지 않으면 심각한 의사 부족 현상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의정감시센터 국장은 “‘응급실 뺑뺑이 사건’과 ‘아산병원 간호사 사망 사건’을 보면, 수도권 대형병원들조차 필수 의료 인력을 다 갖추고 운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수도권에 의사 부족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은) 전국 각지, 각 분야의 현장에서 (의사) 부족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여론은 긍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경제신문이 여론조사기관 넥스트리서치에 의뢰해 10월 17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1.1%가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했다. 반대한다고 밝힌 이들은 18.4%에 그쳤다(10월 16일 실시, 표본오차 95% 신뢰수준 ±4.4%포인트).
정치권에서도 모처럼 한목소리가 나왔다. 10월 18일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의대 정원은 2006년 이후 3058명으로 무려 18년 동안 묶여있는 동안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사망사고가 반복되고 있고, 지방 의료도 붕괴위기에 처했다. 노인 인구도 크게 늘어 의료수요가 폭증하고 있다”며 “현재와 미래 국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해 의사 수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했다.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도 같은 날 “(의대 입학정원 증원에) 원칙적으로 찬성한다.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붕괴를 막고 의료 지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민주당은 ‘공공의대’와 ‘지역의사제’ 도입을 요구했다. 이는 농촌과 어촌 등 의료 취약 지역과 비수도권 지역의 의료를 담당하는 의사인력을 육성하도록 지원하는 제도다. 이 제도 안에서 육성된 의사들은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지역에서 근무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부터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려 했지만, 의사단체와 당시 야권 반대에 부딪혀 도입하지 못했다.
#의사들 실력행사 머뭇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이 알려지자 대한의사협회 등 의사단체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10월 17일 대한의사협회는 의사협회 회관에서 ‘의대 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 의료계 대표자 회의’를 열고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의사협회는 입장문에서 “정부가 의대정원 확대 정책을 일방적으로 강행할 경우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강력히 저항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우봉식 의료정책연구원장은 10월 17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우 원장은 “필수의료 분야는 저수가 및 법적책임에 대한 부담 등으로 젊은 의사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있다”며 “오진에 따른 형사처벌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인력 대란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우 원장은 “의사 수가 많아지면 과잉 경쟁이 일어나 의사들도 생존을 위해 진료량을 더 늘릴 것”이라며 “건강보험 재정 적자가 더 커지고 국민이 내는 보험료도 올라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의사협회의 의료정책연구소가 2023년 2월 발간한 ‘필수의료 활성화를 위한 정책 방안 연구’를 보면 국민들도 의료수가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에 따르면 국민들은 과도한 업무부담(39.1%)과 낮은 의료수가(19.2%)를 필수의료의 문제로 지목했다.
의사들은 의료수가(58.7%)와 더불어 법적 보호 부재(15.8%)를 원인으로 꼽았다. 2021년 3월 의사협회가 2013~2018년 영국과 한국 의사의 업무상중과실치사상죄 판례를 비교한 결과 한국 유죄 판결은 670건, 영국은 130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의대 증원에 반대하는 이들은 필수의료 분야의 의사들이 수술에서 사고가 날 때마다 고소당하면서 부담감을 가지게 되고, 이 부담감에 짓눌린 의사들이 떠나면서 인력 부족 현상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번엔 의사협회 등이 문재인 정부 시절 의사 총파업이나 의대 동맹휴학 등의 초강경 대응에 나서기는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의대 증원에 대한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의대 증원을 반대한다고 밝힌 광주 소재 의과대학 재학생은 “일단은 적당한 (의대 입학정원) 증원은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흐름인 것 같다”며 “여기서 또 파업하면 의사 이미지는 완전히 안 좋아진다”고 했다. 그는 지금과 2020년 의료 총파업 당시의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때는 팬데믹으로 업무량이 너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의료계와 아무런 논의 없이 갑자기 공공의대 정책을 냈기 때문에 엄청난 분노가 있었다”고 말했다.
의대 증원을 반대한다고 밝힌 서울 소재 대학병원 전문의도 “교수들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의사) 커뮤니티나 과 사람들은 (의대 증원에 대해) 화를 많이 낸다”며 “젊은 의사들이 좀 더 관심이 많고, 나이 든 의사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문재인 정부 의료 총파업 때) 참여했다. (지금은) 의사협회장이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며 “(총파업이 결의되면) 집행부를 봐서 나갈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필수의료 예산 2년 연속 삭감
10월 19일 윤 대통령 주재 ‘필수의료 혁신 전략회의’가 끝난 다음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진행한 브리핑에 따르면 정부는 지방국립대 의대와 정원 규모가 작은 지방 의대의 의대생 선발 인원 확대를 추진한다. 지방 의대 학생을 뽑을 때 지역인재특별전형 선발 비율을 지속적으로 확대한다. 현재 비수도권 6개 권역에 속한 의대·한의대 등은 입학 정원의 40%(강원·제주 20%)를 해당 지역 출신 학생을 뽑도록 의무화돼 있다. 보건복지부는 이 비율을 50% 이상으로 유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수도권 병원에 배정하는 전공의(인턴·레지던트) 비율도 현행 40%에서 50%로 늘린다.
정부는 민주당 등 야권이 주장하는 공공의대나 지역의사제처럼 일정 기간 지역근무 의무를 강제하는 정책은 추진하지 않을 방침이다. 대신 지역·필수의료분야에서 의사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 의료기관에 지급하는 수가를 인상하고 지원금을 강화하는 등의 방안을 시행할 계획이다. 박민수 복지부 2차관은 “한 연구에 따르면 특정 지역 출신 학생이 그 지역 의대를 졸업하고 그 지역에서 수련하는 경우 지역에 남을 확률은 85% 이상”이라며 “가급적 자발적으로 지역에 거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나가는 데 방점을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의대 입학정원 증원 규모는 밝히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10월 19일 충북대학교에서 ‘지역완결적 필수의료 회의’를 주재하며 “지역·필수의료를 살리고 초고령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의료인력 확충과 인재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이 발언은 지방 의대 중심으로 파격적인 의대 증원 방침을 유지겠다는 윤 대통령의 의지로 풀이된다.
구체적인 증원 인원을 발표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김민하 평론가는 “대통령이 직접 숫자를 말하게 되면 물러날 수 없게 된다”며 “(노동 개혁도) 69시간을 말하는 바람에 다 뒤엉켰다. 그래서 대통령이 무언가 파격적으로 하고 싶다는 의지가 있어도 좀 유연하게 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조언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의협은 10월 19일 입장문을 내고 “필수의료 확충 방안 마련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더욱 커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정부의 필수·지역의료 위기 극복을 위한 적극적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필수의료 보장으로 국민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고무적”이라며 한층 누그러진 태도를 보였다.
정부의 의지와는 별개로 정작 이와 관련된 예산은 삭감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정춘숙 민주당 의원실, 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 시사IN 등이 함께 분석한 ‘2024년도 예산안 및 기금운용계획안 사업설명자료’에 따르면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 사업 예산이 1511억 1500만 원에서 1416억 500만 원으로 약 6.3% 감소했다.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 사업은 중앙정부가 지역거점공공병원의 예산을 보조해 지역의 필수·공공의료체계 구축 기반을 마련하도록 지원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에 대한 예산은 문재인 정부에서는 2022년 약 1703억 원까지 확대됐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2023년 1511억 원, 2024년 1416억여 원으로 2년 연속 감소했다. ‘의료인력 양성 및 적정 수급관리’ 사업에 배정된 예산도 2023년 320억 5900만 원에서 2024년 291억 4300만 원으로 29억 1600만 원 삭감됐다.
10월 19일 복지부는 브리핑에서 예산안에 대해 “필수의료 지원과 관련해 1년 동안 약 1조 원 규모의 수가가 추가 투입될 예정이다. 필요하다면 추가 재정 지원도 가능하다. 지방 국립대 병원의 R&D 투자에 대한 예산도 확보해 나가고 있다. 예컨대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된 ARPA-H 프로젝트 등을 통해 필수 의료 확충에 대한 과제를 지방 국립대 은행에서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정부 부처 사이의 혼선도 논란을 낳고 있다. 10월 19일 머니투데이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무전공·자율전공 입학생이 의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공개된 뉴시스 인터뷰에서도 “모든 우수한 아이들이 다 의대로 쏠린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2년 후 (전공을) 선택하게 기회를 준다면 (의대) 쏠림 현상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같은 날 저녁 대통령실의 반박이 나왔다. 이도운 대통령실 대변인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윤석열 정부에서 대학 입시는 학생과 학부모가 수긍할 수 있는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며 “이 장관이 언급한 자율전공 입학 후 일부 의대 진학 허용은 우리 정부에서 전혀 검토되지 않았고, 그럴 계획조차 없다”고 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