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롤렉스는 여전히, 1995 아오모리 소주는 4분의 1로 증발
LG는 롯데 자이언츠, KIA 타이거즈와 함께 KBO리그 3대 인기 구단으로 꼽힌다. 전신 MBC 청룡 때부터 서울을 연고로 삼았던 터라 특히 수도권 지역에 팬이 밀집돼 있다. LG의 한국시리즈 상대가 KT 위즈로 결정되고 입장권 예매가 시작되자 말 그대로 '티켓 구매 대란'이 벌어졌다. 30년 가까이 기다려온 우승의 여정을 현장에서 '직관'하고 싶은 팬들의 열정이 휘몰아쳤다. LG의 한 관계자는 "잠실구장 관중석이 2만 3750석 밖에 안 되는 게 이럴 땐 아쉬울 지경"이라고 짐짓 푸념하기도 했다.
#티켓 대란이 벌어졌다
KBO가 한국시리즈 1~5차전 티켓 판매를 시작한 건 11월 6일 오후 2시였다. 인터파크 웹사이트와 ARS·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1인당 최대 4매까지 구매 가능했다. 그러나 정확히 시간을 맞춰 접속한 이들에게도 티켓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예매 개시와 동시에 대기자 명단이 10만 명을 넘어섰다. 중앙테이블 좌석과 내야석은 순식간에 동나 "구경도 못 해봤다"는 이들이 많았다. 늦은 시간까지 혹시 취소표가 나올까 예매 사이트를 들락거린 팬이 부지기수였고, 그나마 남아 있던 시야 제한석도 모두 팔려 나갔다. KBO는 1차전 시작 5시간을 앞두고 "입장권 2만 3750장이 매진됐다"고 밝혔다.
예견됐던 결과다. 인터파크 관계자는 "그동안 자사에서 예매를 진행했던 한국시리즈와 비교해도 3~4배 이상 관심도가 높았다. 늦은 밤까지 취소표를 잡으려는 팬들의 접속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각 경기별로 3만 명이 넘는 대기열이 발생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잠실 1·2차전뿐 아니라 수원에서 열리는 3·4차전 수요도 높았다. KT위즈파크 개장 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경기가 열리는 날이라 KT 팬들에게도 의미가 컸다. KT는 202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당시엔 코로나19 여파로 경기 일정이 너무 미뤄진 탓에 전 경기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치렀다. LG 팬들과 KT 팬들 모두 예매 대란에 '참전'했다. 한 30대 여성팬은 "오픈 시간에도 접속했다가 실패하고, 오후 11시 30분에 원하던 자리는 아니었지만 취소된 표 2장을 간신히 구매했다"며 "암표상들이 미리 많은 표를 가져가는 게 문제다. 암표 단속을 한다는데 처벌이 가능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로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중고거래 사이트로 몰려들었다. 원칙적으로 개인간의 거래 및 입장권 전매는 금지되어 있다. 정가보다 높은 금액을 얹어 판매하는 것도 불법이다. 주최 측의 권한으로 예매 취소나 강제폐기(압류) 등의 조치도 가능하다. 하지만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한국시리즈 입장권을 팔거나 사려는 글로 가득했다. 심지어 가격은 정가의 3~5배 수준에 달했다. 가장 저렴한 그린지정석 정가가 3만 원인데, 10~13만 원선에 '매물'이 나왔다. 내야 더그아웃 바로 위 구역에서 볼 수 있는 블루지정석은 정가는 7만 원이지만, 30만~35만원에 거래됐다. 예매 시작 7분 뒤인 오후 2시 7분에 "정가 4만 5000원짜리 네이비지정석을 15만 원에 판매한다"는 글이 올라왔고, 금세 판매가 완료됐을 정도다. 인터파크는 암표상들이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티켓을 사들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비정상 경로를 이용한 티켓 대량 구매 가능성을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지만, 실효는 크지 않다. 과거 전문 암표상들의 전유물이었던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제는 일반인도 클릭 몇 번에 싼 가격으로 손쉽게 구매할 수 있어서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 예매로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은 현장 판매분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매표소 앞에 줄을 서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기대감마저 사라진 지 오래다. 1차전날 오후 2시부터 매표소 앞에서 기다렸다는 한 50대 남성팬은 "MBC 시절인 원년부터 LG를 응원했다. 한국시리즈를 목빠지게 기다렸다"며 "온라인 거래 물량이 많은데, 오히려 악용되는 것 같다. 예전처럼 현장판매분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 같은 예전 골수 팬들은 더욱 표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탄했다.
#구단주도 입고 온 유광점퍼
만원 관중이 든 한국시리즈 1차전 관중석은 온통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뒤덮였다. 29년 만의 우승을 염원하는 LG 팬들이 번쩍번쩍 빛나는 유광점퍼를 입고 3루 쪽 관중석까지 점령했기 때문이다. 잠실야구장 인근 도로는 야구장을 찾는 팬들의 차량 행렬로 마비됐고, LG 응원 도구인 노란색 수건과 머플러는 빠르게 동났다.
특히 LG 팬들에게 '가을 야구'의 상징과도 같은 유광점퍼는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소매가 번쩍거리는 이 점퍼는 무척 두꺼워서 쌀쌀한 바람이 부는 한국시리즈 기간에 입기에 충분하다. LG의 한 관계자는 "작년 한 해 유광점퍼 판매량의 150%가 지난달까지 이미 완판됐다.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또 그만큼의 수량을 추가 제작했는데, 이 물량들 역시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며 "지난해 대비 300%의 매출을 바라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LG 선수들이 입은 유광점퍼는 프로스펙스 제품으로 정가 24만 9000원 상당의 고가 제품이다. 프로스펙스 마크가 없는 레플리카 제품도 최저 11만 5000원은 줘야 살 수 있다. 그런데도 LG 구단 상품을 판매하는 인터파크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다. 그만큼 LG팬들에게는 단순한 '굿즈' 이상의 의미가 있다. LG가 마지막으로 왕좌에 오른 1994년, 선수단은 유광점퍼를 갑옷처럼 입고 가을의 더그아웃에서 환호했다. LG가 긴 암흑기를 통과하던 2000년대에는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는 옷'으로 불리면서 한 맺힌 서사를 쌓았다. LG 선수들은 여전히 "포스트시즌에 나가겠다"는 약속을 "팬들이 유광점퍼를 입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로 대신하곤 한다.
LG 트윈스 구단주인 구광모 LG그룹 회장도 이날 구단 최고의 '히트 상품'인 유광점퍼를 목 끝까지 채워 입고 잠실구장에 나타났다. 경기 시작 1시간 전 미리 야구장에 도착해 구단 관계자들을 격려했고, 김인석 LG스포츠 대표·차명석 LG 단장 등과 나란히 중앙지정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했다. 경기 도중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경기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박수를 치기도 했다.
구 회장은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1990~2007년), 구본준 LX그룹 회장(2008~2018년)에 이은 LG 야구단의 3대 구단주다. 2018년 회장 취임 이후 야구장에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회장 취임 전에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함께 종종 야구장을 찾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은 LG그룹 계열사 임직원들이 구 회장과 함께 야구장에 와 응원에 동참했다.
#롤렉스의 주인은 누가 될까
LG가(家)의 야구 사랑은 유명하다. LG는 럭키금성 시절이던 1990년 MBC 야구단을 인수해 'LG 트윈스'라는 이름의 야구단을 창단했다. 이후 선수단을 물심양면으로 전폭 지원해 첫 시즌부터 단숨에 우승팀 반열에 올려 놓았다. 특히 초대 구단주인 구본무 선대회장의 애정은 차고 넘쳤다. LG가 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이듬해 그룹명을 야구단의 이름인 LG로 바꿨다. 또 구단주를 역임하는 동안 매년 수차례씩 직접 경기장을 찾아 야구단을 응원했다. 해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진행한 LG 스프링캠프를 방문해 선수단을 격려했고, 경남 진주 단목리에 있는 외가로 LG 선수단을 초청하는 '단목 행사'를 열어 우승 기원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지난 2018년 5월 20일 구 선대회장이 숙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LG 선수 모두가 유니폼 소매에 검은색 근조 리본을 달고 검은 양말을 무릎까지 당겨 신은 채 경기에 나선 이유다.
그 후 3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올해 한국시리즈에서도 구 선대회장이 남긴 '우승 유산'이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다.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게 돌아갈 롤렉스 시계다. 고인은 1997년 해외 출장을 떠났다가 LG의 세 번째 우승을 기원하면서 롤렉스 손목시계를 구입했다. 당시 돈으로 8000만 원 상당의 고가였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금장 시계였다. 구 선대회장은 이 손목시계를 구단에 전달하면서 "다음 한국시리즈 MVP에게 이 시계를 선물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끝내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26년간 LG 구단 금고 속에 잠들어 있던 이 시계는 지난해 '주인 맞이'를 위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차 단장이 직접 들고 롤렉스 매장을 방문해 내부 청소와 광택 수선을 맡겼다. 시계는 새 것처럼 말끔해진 모습으로 구단으로 돌아왔다. 이제 오랫동안 찾지 못한 진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LG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모두 이 시계의 존재와 무게감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있다. 지난 2021년에는 시즌 초반 단체로 일명 '롤렉스 세리머니'를 하며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경기 중 결정적인 활약을 한 선수가 왼쪽 손목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면서 기쁨을 표현하는 동작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서로에게 지나치게 우승에 대한 부담을 주는 것 같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래도 그 시계를 마음속에서 '진짜로' 지워버린 선수는 아무도 없다. 모두 "롤렉스 시계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뛴다. 가격 때문이 아니다. LG 야구단의 역사와 전통이 서린,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을 손에 넣을 기회라서다. LG 주장이자 '종신 LG맨'을 선언한 오지환은 한국시리즈 미디어데이에 대표 선수로 참석해 "그 시계는 꼭 내가 받고 싶다. 나에게 '주장 직권으로 어떤 선수에게 주겠느냐'고 물어도, 내가 갖고 싶다"며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LG가 바라는 건 하나 더 있다. 구 선대회장이 남기고 간 아오모리주로 우승 축배를 드는 것이다. 고인은 1994년 오키나와 스프링캠프를 방문했다가 회식 자리에서 지역 특산주인 아오모리 소주를 마셨다. "올 시즌 우승을 하면 이 술로 다시 건배를 하자"고 제의했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그러자 이듬해인 1995년 다시 술독 3개에 담긴 아오모리 소주를 사왔다. "다음 우승 때 또 마시자"며 보관했다. 그러나 술독을 싸놓은 종이가 누렇게 변한 지금까지 그 술을 마시지 못했다. 항간에는 술이 다 증발돼 사라져 버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LG 관계자는 "오랜 시간이 지나 술의 양이 많이 줄어든 건 사실이다. 그래서 몇 년 전에 세 통에 있던 걸 하나로 모았고, 4분의 1 정도 남아 있다"며 "우승하게 되면 술을 마실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