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주 52시간 유지하되 일부 업종 60시간 적용 여지…양대 노총 ‘답정너’ 설문조사 비판 목소리
#근로시간 유연화, 일부업종 적용할까
11월 13일 고용노동부는 국민·근로자·사업주(기업인) 총 6030명을 대상으로 한 ‘근로시간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난 3월 근로시간 개편 방안 발표 이후 약 8개월 만이다. 노동부는 △근로시간 개편 방향 △현행 주 52시간제(법정 40+연장 12시간)에 대한 인식 △근로시간 실태 등을 중심으로 설문을 구성해 조사하고, 그 결과를 분석했다고 밝혔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현행 주 52시간제와 같이 1주 12시간 연장근로 총량은 유지하되, 1주 단위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서 근로자 41.4%, 사업주 38.2%, 국민 46.4%가 동의했다. 비동의 비율보다 10%p 넘게 높다. 또 주 52시간제에 대해 국민의 48.2%가 ‘장시간 근로 해소에 도움이 되었다’고 답한 반면, 54.9%는 ‘업종·직종별 다양한 수요 반영이 곤란하다’고 응답했다.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를 일부 업종·직종에만 적용하자는 방안에 대해서 근로자 43.0%, 사업주 47.5%, 국민 54.4%가 동의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에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확대해야 하는지 근로자에게 질문한 결과 △제조업(56.4%) △건설업(25.7%) △숙박·음식점(18.6%)이 꼽혔다. 직종으로는 △설치‧정비‧생산직(32.0%) △보건‧의료직(26.8%) △연구‧공학 기술직(22.2%) 순이었다.
특정 주에 52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있다면, 최대 근로시간 제한 한도를 △주 60시간 이내 △64시간 이내 △64시간 초과 △모르겠음 중 택하게 한 문항에선 근로자 75.3%, 사업주 74.7%가 ‘주 60시간 이내’를 택했다.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정부가 일부 업종을 선별해 근로시간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근로시간 개편을 재추진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성희 고용노동부 차관도 이날 브리핑에서 “설문조사 결과를 수용한다” “현행 주 52시간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업종·직종에 한해 노·사가 원하는 경우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1주로 한정하지 않고 선택권을 부여하는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연장근로에 부정적
이번 설문조사에 따르면 사업주 85.5%는 현행 근로시간 규정으로 인해 애로사항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답했다. 애로사항을 경험했다고 답한 사업주는 14.5%에 불과하다. ‘현행 근로시간 제도에서는 갑작스러운 업무량 증가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항목에 그렇다고 답한 사업주도 33%에 그쳤다.
추가 소득을 위해 연장근로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근로자는 41.7%, 아니오는 58.3%였다. 연장근로를 원하는 이들도 주 52시간제를 선호했다. 연장근로 의향자의 현행 최대 주간 의향 근로시간은 52시간 이내가 55.7%로 과반을 차지했다. 52시간 초과 근로 의향자는 39.7%인데, 이마저도 정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점을 전제로 했다.
집단 심층면접조사(FGI) 결과에 따르면 ‘더 일하는 만큼 정말 길게 쉴 수 있냐’라는 점이 근로시간 개편에 회의적인 가장 큰 이유로 꼽혔다. 실제 인터뷰한 근로자 다수가 긴 휴가 사용은 본인 업무 부담으로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더 일할 가능성은 높아지는데, 더 쉴 수는 없겠구나라고 결과적으로 생각한다고 연구자들은 분석했다.
일부 면접자들은 개편안이 도입되면 필연적으로 근무시간이 증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주 52시간도 연장근무 상한 시간이 지켜지지 않는데, 주 상한 근무시간이 공식적으로 증가하게 된다면 매주 근무 가능한 시간이 공식적으로 상회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최근 몇 년간 장시간 근로를 안 하는 분위기가 사업장에 자리 잡았는데, 주 69시간 근무 등의 언급이 나오면서 장시간 근로로 회귀하는 분위기가 나타날까봐 걱정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면접자는 “월이나 분기 관리 단위에 찬성하되 (근무시간) 상한을 낮췄으면 좋겠다. 휴식을 좀 더 부여한다든가 근로시간을 낮춘다든가 어떤 확실한, 어떤 감독 장치가 필요하다”며 “휴가가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못 쓰는 직원들이 많다. (개편안으로) 바뀌었을 때, 과연 더 높아진 상한 시간까지 일하는 주가 있으면서 다른 쪽에서 휴식이나 휴가 같은 권리를 과연 보장받을 수 있을까? 그런 부분에 대한 의구심이나 우려를 해소해 줄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제도적 장치를 같이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동계에선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두고 ‘답정너’라며 비판했다. 11월 13일 한국노총은 “제대로 된 설문조사를 하고자 했다면 설문지 작성 단계에서부터 노사단체의 충분한 의견을 들어 조사의 내용, 방식, 대상 등을 결정해야 했다. 설문지 곳곳에 정부가 원하는 답을 받기 위한 의도된 질문이 보인다”며 “개선 방향에도 동의할 수 없다. 특정 시기에 주 52시간을 초과해서 일할 필요가 있다면 현행법상 탄력근로시간제나 선택근로시간제를 활용하면 된다”고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날 민주노총도 “정부가 언급한 제조업과 건설업, 설치‧정비‧생산직, 보건‧의료직, 연구‧공학 기술직 등은 대표적인 장시간 노동 사업장이다. 장시간 노동을 늘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장시간 노동을 줄여야 할 업종과 직종들이다. 한국은 연평균 근로시간 1901시간으로 OECD 상위 5위”라고 꼬집었다.
#근로시간 개편 과정 되짚어보니
윤석열 대통령은 제20대 대선 후보 시절이던 2021년 7월 19일 매일경제 인터뷰에서 “게임 같은 거 하나 개발하려고 그러면 정말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주 120시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거센 논란이 일자 윤 후보는 “유의하겠다”며 진화에 나섰으나, 대선 승리 이후 주 52시간제 개편을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 1호 법안으로 택하며 의욕을 드러냈다.
2022년 7월 근로시간 개편을 위해 전문가로 꾸려진 미래노동시장연구회(연구회)가 출범했다. 그해 12월 연구회는 ‘노동시장 개혁방향’ 권고문을 발표하며 정부에 제출했다. 권고문에는 주 최대 69시간을 가능토록 근로시간 제도를 개편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자 경영계 의견만 수렴하고, 노동자를 대표하는 양대 노총과 단 한 차례도 대화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3월 6일 고용노동부는 연구회 권고문을 바탕으로 근로시간을 유연화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주 52시간제 관리 단위를 현행 1주일에서 △1개월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늘리는 것이 핵심이다. 현재 주당 12시간으로 제한됐지만, 개편안을 적용하면 주당 최대 69시간까지 근무할 수 있다. 추가 노동시간을 마일리지처럼 적립한 뒤 필요할 때 휴가로 사용할 수 있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기존 연차휴가와 결합하면 한 달(짜리) 장기 휴가 사용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계뿐만 아니라 청년 세대까지 반발하고 나섰다. 3월 9일 ‘MZ세대’ 노조로 불리는 새로고침 노동자협의회는 “연장근로 관리 단위 확대에는 근로조건 최저기준을 상향해온 국제사회의 노력과 역사적 발전을 역행 내지 퇴행하는 요소가 있다”며 “다른 나라보다 공휴일이 많은데도 평균 근로시간이 긴 이유는 연장근로 상한이 높고 연장근로를 자주 하기 때문이다. 주 52시간제로 기대했던 취지의 안착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정부 개편안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결국 3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은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는 건강 보호 차원에서 무리라고 생각한다”며 “MZ 근로자와 노조 미가입 근로자, 중소기업 근로자 등 노동 약자와 폭넓게 소통할 것이다. 국민을 위한 제도를 만드는 데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충분히 숙의하고 민의를 반영하겠다”고 개편안 수정을 지시하며 한발 물러섰다. 이에 정부는 6∼9월 국민 60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집단 심층면접조사(FGI)를 진행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