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현 원장 조직 장악 한계 곧 대통령 인사 실패 평가…엑스포 유치 허위보고 못 가려내 ‘정보력 부실’ 비판도
국정원이 된서리를 맞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신임하던 김규현 국정원장이 전격 경질됐다. 11월 26일 윤석열 대통령은 국정원장을 비롯해 1차장, 2차장도 물갈이했다. 1차장엔 홍장원 전 영국공사가, 2차장엔 황원진 전 북한정보국장이 임명됐다. 김규현 전 국정원장 빈자리는 후임자가 물색될 때까지 홍장원 1차장이 대행할 예정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김 전 원장은 원장 취임 이후 원훈을 교체했다. 기존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이라는 원훈을 대체한 건 과거 중앙정보부 시절 원훈이었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원훈이다. 그러나 새로 바뀐 원훈과 달리 국정원은 양지에서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인사 파동 때문이었다.
2022년 10월 조상준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이 임명 4개월 만에 돌연 사임했다. 검찰 출신의 조 전 실장은 윤석열 대통령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인사였기에 의구심이 증폭됐다. 2023년 6월엔 1급 간부 7명에 대한 인사가 대통령 재가 이후 번복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윤 대통령이 국정원 특정 간부가 인사에 깊숙이 관여한 정황을 포착한 뒤 인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1급 간부 인사가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전해졌다.
김규현 전 국정원장 핵심 측근이었던 A 씨가 인사 전횡 의혹 중심에 부상했다. A 씨는 2022년 9월 1급 인사와 2022년 11월 2, 3급 인사 때도 깊숙이 관여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인물이다. 국정원 내부에선 A 씨가 이른바 ‘왕실장’이라 불리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대통령이 재가 이후 번복했던 국정원 1급 인사 명단에도 A 씨 이름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현직 당국자들은 김 전 원장이 사실상 조직 장악에 실패한 것으로 본다. 김 전 원장은 서울대 치의예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한 독특한 이력 소유자다. 전직 정보 당국자는 “김 전 원장은 국정원 ‘박힌 돌’이 아니라 외교 관료 라인에서 ‘굴러온 돌’이었던 셈”이라면서 “정치인이 아니라 관료에 가까운 인사였기 때문에 조직을 장악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당국자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경우엔 ‘정치 9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면서 “이런 특징을 살려 조직을 장악해나가는 면모가 있었다”고 했다. 그는 “박지원 전 원장은 국정원 내부에 ‘호남 라인’을 확실히 구축해놓고 조직 장악에 나섰다”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박지원 전 원장은 여우 같은 부분이 있다. 조직을 장악할 능력이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김규현 전 국정원장의 경우는 조직 장악을 못했다. 조직 장악에 실패했다는 정황은 명확하다. 국정원장이 뭘 하나 하면 조직 내부에서 다 덤비지 않느냐. 국정원장이 조직 장악을 못한 것이 모든 인사 파동과 구설수 원인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을 들여다보면, 대통령의 국정원장 인사 실패로 바라볼 수 있다.”
또 다른 정보 당국자는 “윤석열 정부 들어 인사 파동이라는 키워드로 휘감긴 국정원 내부 문제는 사적인 감정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서 “정부가 교체되는 시기에 내부에서 서로 지나간 사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복수에 나서면서 국정원 내 파벌이 생겨난 것”이라고 했다. 이 당국자는 “박지원 전 국정원장 시절 요직에 인사 발령된 간부들과 전 정부에서 잠시 밀려났던 간부들 사이 파벌이 형성된 양상”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핍박받았던 간부들이 복수의 칼날을 갈던 와중에 그 복수심을 응집해줄 구심점이 국정원장이 아니라 국정원장 측근 A 씨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인사 전횡 문제가 ‘양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부 갈등이 격화했고, 조직 내부 기밀에 가까운 정보들이 뼈 발라지듯 공개되기 시작했다. 지금 언론 보도를 조금만 찾아봐도 국정원 각 조직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지 리서치가 가능한 정도다. 정보기관인데 비밀이 없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 정보기관에서 활동했던 익명 관계자는 “지금 국가정보원은 국가정보누수원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을 정도”라면서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아도 내부 정보에 대해 거의 모든 내용들이 보도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예전 에이스라 불리던 대북 및 국내파트 요원들은 전 정부에서 이미 국정원에서 다 옷을 벗은 상황”이라면서 “지금은 ‘도토리 키재기’처럼 문재인 정부에서 중용받은 그룹과 중용받지 못한 그룹이 내부 알력 다툼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월등한 실적이 있는 간부도 없고, 수사권도 없으니 내부에서 서로 상대방의 흠을 찾는 데 국정원 업무력이 낭비되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국정원 요원들은 김정은이나, 김정은이 새끼 쳐 놓은 간첩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요원들끼리 눈을 부라리고 서로의 흠을 찾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대공 수사권이 없어진 뒤 ‘외부의 적’이 사라지니 내부 권력다툼이 극심해졌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장이 조직 장악을 못하니 내부 상황이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다.”
2030 국제박람회(엑스포) 유치전에서 드러난 정부 정보력 및 판단력 부재 또한 국정원이 제 기능을 못한 데서 비롯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앞서의 전직 정보 당국자는 “엑스포 유치전에서 대통령이 엉뚱하게 발에 땀을 낸 것”이라면서 “외교 라인 혹은 엑스포 유치 관련 TF 라인 등에서 ‘역전할 수 있다’는 허위보고가 올라온 셈인데, 이럴 경우 국정원이 제대로 된 정보를 바로잡아주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당국자는 “대통령이 신임하던 외교라인에서부터 희망고문이 시작됐고, 여기서 국정원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서 “각국에 파견돼 있는 국정원 직원들은 주재국 의도를 파악했어야 했고, 허위보고를 가려냈어야 하는데 집안싸움으로 바쁜 탓에 이런 중요한 일들이 뒷전으로 밀려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탈리아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역부족’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총리 등 주요 인사가 최종 브리핑에 참가하지 않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는 외교와 정보 라인이 제대로 가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역전할 수 있다는 보고에 대통령부터 정부 민간이 합동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은 아무런 필터링을 하지 못했다. 국민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야말로 참담한 성적표가 들어 있었다. 외교의 무능 이면에 정보의 무능이 있었던 셈이다.”
베테랑 정보 요원 출신은 “세상에 이런 정보기관이 어디 있느냐”면서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는 것이 정보기관 철칙”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꾸 이런 식으로 외부에 정보기관 인사에 대한 잡음이 일고, 조직 내부 사정이 새어나가는 부분은 국정원이 가지고 있는 정보기관 권위 자체를 희석시키는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차기 국정원장 하마평엔 군 출신 김용현 대통령 경호처장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조태용 국가안보실장과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차출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조 전 실장과 김 1차장은 ‘외교통’으로 분류된다. ‘외교통’ 김규현 전 국정원장이 조직 내부 교통정리에 실패한 상황에서 군 출신 국정원장이 ‘내부 기강잡기’엔 더 적합하지 않겠냐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는 추측도 나온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