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 발언에 갑론을박…‘위성정당 금지법’도 무용지물, ‘병립형 회귀’ 전망 우세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1월 28일 본인의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통해 선거제 개편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이 대표는 “만약 내년 총선에서 우리가 1당을 놓치고 과반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지금은 국회에서 어느 정도 막고 있지만 국회까지 집권여당에 넘어가면 지금 이 폭주와 과거로의 역주행을 막을 길이 없다”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에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더 나쁜 세상이 되지 않게 막는 것도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됐다. 선거는 승부인데 멋있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현실의 엄혹함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병립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 의석수와 관계없이 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수를 배분하는 방식이다. 21대 총선에서 처음 시행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수가 전국 정당 득표율보다 적을 때 비례대표로 모자란 의석수의 50%를 채워주는 방식이다. 준연동형 도입은 지역구에서 당선되기 어려운 ‘다양한 정책과 이념에 기반한’ 군소정당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됐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거대 양당이 비례대표용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그 취지는 무력화됐다. 그러다 보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손봐야 한다는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동안 이재명 대표는 위성정당에 부정적 입장을 고수해왔다. 21대 총선을 앞둔 2020년 3월 민주당의 비례연합당 참여에 대해 “공학적으로 볼 때 이 방법(위성정당)이 비례의석 획득에 도움이 된다”면서도 “국민이 심판하는 경기에서 꼼수를 비난하다가 그 꼼수에 대응하는 같은 꼼수를 쓴다면 과연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반대 목소리를 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는 “위성정당 창당으로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를 살리지 못한 데 대해 당의 후보로서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린다”며 ‘표의 등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 개혁, 비례대표제 확대, 비례대표제를 왜곡하는 위성정당 금지’ 등을 정치개혁 분야 공약으로 제시했다. 더 나아가 민주당은 이 대표가 당대표로 선출된 2022년 8·28 전당대회에서 “정치공학이나 선거의 유불리, 앞으로의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정치개혁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전 당원 결의안도 발표했다.
그런데 이번에 이재명 대표가 사실상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회귀를 시사하는 발언을 하면서 당이 뒤숭숭하다. 친명계 의원들은 이 대표 의견에 힘을 더했다. 진성준 의원은 11월 29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윤석열 정권의 무능과 역사적인 퇴행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 게 국민적 요구”라며 “그것과 정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선거 제도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임하겠다는 건 용납이 어렵다”고 강조했다.
반면 비명계 진영에선 이 대표를 향해 날 선 비판을 내놨다. ‘비명계’가 주축이 된 모임인 ‘원칙과 상식’은 11월 29일 입장문을 통해 “선거제 퇴행은 안 된다”며 “한낱 기득권 지키겠다고, 국회의원 배지 한 번 더 달겠다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국민의힘 이겨보겠다고 결의 따위, 약속 따위 모른 체하면 그만인가”라고 꼬집었다.
조응천 의원은 11월 30일 YTN라디오 ‘뉴스킹 박지훈입니다’에 출연해 “(이 대표는)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반드시 정치개혁을 이뤄내겠다고 수시로 약속했다”며 “그런데 22대 총선을 앞두고 불리하다는 이유로 병립형으로 회귀할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결국 약속을 뒤집는 것이다. 약속과 명분을 지켜야 한다. 소탐대실”이라고 비판했다.
정의당 역시 병립형으로 회귀해선 안 된다고 촉구했다. 김준우 정의당 비대위원장은 11월 29일 이재명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 대표가 ‘이제는 제3의, 제4의, 제5의 선택이 가능한 다당제 선거제도 개혁, 정치교체 확실히 하겠다’고 외친 연설을 잘 기억하고 있다”며 “모쪼록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민주당이 최소한 병립형으로의 퇴행을 막는 유의미한 결단을 해주셔서 문재인 정부 시절 촛불탄핵 연대를 무색하지 않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이 대표는 “정의당이나 민주당이나 지향하는 바는 같다”면서도 선거제 개편안에 대해선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친명계 일부에서조차 준연동형 비례제 유지를 주장하면서, 이 대표의 고민을 깊어지게 하고 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사수를 주도해 온 이탄희 의원은 ‘용인정 불출마·험지 출마’를 선언하며 초강수를 던졌다. 이어 민주당 소속 의원 75명과 연동형 비례제 유지의 보완으로 ‘위성정당 방지법(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선거제와 위성정당 금지, 지도부의 결단을 마지막으로 호소한다”며 “우리 당의 본질을 지키자. 당장의 이익보다 대의와 가치를 선택한 김대중·노무현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강민정 김두관 민병덕 민형배 송재호 이학영 장철민 의원 등도 11월 29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당은 지금 국민과의 약속과 눈앞의 이익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기득권을 내려놓을 것인지 기득권을 쥐고 자멸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며 “연동형 비례와 위성정당 방지로, 다당제 연합정치의 틀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음 대선에도 정권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린다”고 당 지도부에 우려를 표했다.
민주당은 지난 11월 30일 선거제 개편 등 논의를 위한 의원총회를 열었으나,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이날 3시간에 걸친 의총에서는 예상대로 ‘현실파’와 ‘원칙파’가 치열한 격론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 지도부는 시간을 두고 추가적으로 의견수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홍익표 원내대표는 의총 직후 브리핑에서 연동형과 병립형 의견개진 비율에 대해 “거의 반반”이라며 “좀 더 논의해보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재명 대표로서는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 병립형 비례제 회귀가 필요하다. 국민의힘은 지난 21대 총선을 앞둔 선거제 개편 때부터 ‘준연동형’을 반대한 만큼, 이번에도 ‘병립형’ 회귀 입장을 못 박았다. 이번 총선이 ‘준연동형’으로 치러질 경우 위성정당을 설립하겠다는 방침이다.
친명계로 분류되는 야권 관계자는 “이 대표는 내년 총선에서 당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면 정계 은퇴해야 한다. 이 대표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총선에서 1당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수라도 써야 한다. 이러한 현실에 병립형 회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표의 최측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지난 11월 30일 대장동 일당에게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대장동 사건과 관련한 법원의 첫 판단이 유죄로 나온 것. 재판부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를 유죄로 봤다는 점에서 이 대표 ‘사법 리스크’가 더 위태로워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총선 승리가 이 대표에게 더욱 절실해진 셈이다.
국민의힘 한 관계자는 “현재는 민주당이 국민의힘에 지지율에 큰 차이를 보여 총선에 유리할 수 있지만, 이 대표 관련 사법 리스크가 총선 때까지 이어지면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며 “준연동형 비례제에서 민주당이 위성정당을 안 만들면, 민주당이 비례대표제에서 20석 이상 잃게 된다는 시뮬레이션도 나왔다. 이 대표 입장에서는 병립형으로 돌아가거나 준연동형 비례제에서는 위성정당을 만들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서는 병립형 비례대표제로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위성정당 금지법’ 입법을 한다 해도 위성정당 설립을 막을 방도가 없다는 지적이다. 민주당 한 전략통은 “위성정당 방지법이라고 하지만 위성정당 기준도 모호하고, 법의 허점을 피해 합당할 방안도 넘쳐난다”며 “예를 들어 총선 이후 위성정당이 각 의원들을 출당시켜, 의원 개별로 다시 입당하면 그건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위성정당 방지법’ 자체가 준연동형 도입 취지를 훼손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또 다른 야권 관계자는 “준연동형 비례제의 목적은 다양한 이념을 가진 군소정당의 국회 입성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며 “그런데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발의한 위성정당 방지법을 보면 모든 정당이 지역구 후보를 내고, 지역구 후보자 20%만큼 비례대표 후보를 내야 한다고 적고 있다. 10명의 비례대표 후보를 내려면 지역구에 50명의 후보를 출마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그 정도 후보를 내는 게 군소정당인가. 선거제의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법안”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양당이 ‘준연동형 비례제’로 치르기로 하고 ‘위성정당 방지법’ 입법을 합의해도, 윤 대통령이 위성정당 방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며 “병립형 회귀 또는 위성정당 문제는 국민의힘이 제기하는 것이다. 준연동형 유지를 원하는 민주당 인사들은 국민의힘에 압박을 넣어야 한다. 왜 이재명 대표에게 요구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