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지연’ 해법으로 ‘승진제’보단 ‘충원’ 언급…조건부 구속영장·압수수색 사전심문제는 검찰 반대 넘어야
#재판 지연 풀어갈 카드는?
12월 11일 열린 취임식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은 취임사를 통해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재판 지연 해소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갖는데 법원이 이를 지키지 못해 국민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재판 지연 해소를 사법부 선결 과제로 꼽았다. 대안 제시 대신 법원 구성원 전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법조계에선 조 대법원장이 현재 사법부가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를 '재판 지연'으로 보고 이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는 해석과 함께, 대안들이 함께 거론된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재판 제도와 법원 인력의 확충 같은 큰 부분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제점을 찾아 함께 개선해 나가야 한다”고 한 만큼 판사 충원 등을 추진하는 한편, 주 3건씩 3주 동안 9건만 판결문을 작성하는 기준인 ‘3·3·3캡’ 등 법원 내 공공연해진 문제를 손볼 가능성이 거론된다. 또, 재판 제도를 언급한 것은 사건 접수 후 첫 기일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 문제, 재판부 기피 신청으로 재판이 장기화된다는 지적도 함께 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고등부장 승진제 부활’을 통해 경쟁하며 일하는 문화를 다시 만들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너무 큰 변화이기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한 고등부장 판사는 “승진제도가 없어지면서 위에 인정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게 재판 지연의 가장 큰 배경이지만 이를 다시 제도화할 경우 평판사들을 중심으로 한 반발이 거셀 수 있다”며 “그런 점 때문에 취임사에서 판사 충원만 언급한 것 아니겠냐”고 풀이했다.
실제로 조희대 대법원장은 김명수 전 대법원장이 도입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곧바로 손본다는 방침이다. 일선 법원 판사들이 투표하는 절차가 도입되면서 사법행정이 ‘덜 일하기 위한 제도’를 제안하는 이들을 밀어주는 인기영합주의로 변질됐다는 평가다. 이를 재판 지연 문제를 심화시키는 문제라고 본 것이다. 조 대법원장도 인사청문회 서면답변에서 “일종의 인기투표가 되고 있고 사법부의 본질적 목적인 충실하고 신속한 재판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또 장기미제 사건이 된 재판의 경우, 각 법원의 장(법원장)이 맡아 사건을 처리하는 안도 거론된다. 이 역시 조희대 대법원장이 인사청문회에서 언급했던 방법인데, 이렇게 될 경우 법원장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사건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만 고등부장 승진제도처럼 ‘인사적 보상’ 없이 어떻게 사건을 맡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 적지 않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밤늦게, 새벽까지 야근하면서 일했던 것은 승진하기 위해서, 인정을 받고자 했던 것”이라며 “고등부장 승진제도 없이, 어떻게 당근을 제안할 것인지는 조희대 대법원장이 고민 중인 부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문회 쟁점 된 영장 발부제도 손볼까
구속영장과 압수수색 제도도 도마 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조 대법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구속과 불구속 중 한쪽만 택할 수 있는 현재 구속 제도에 ‘중간 지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조건부 구속영장제가 거론되는 이유다. 조건부 구속영장제는 피의자에게 영장을 발부하되 거주지 제한 등의 조건을 달아 석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피해자 보호나 재범 방지를 위해 접근금지·전자장치 부착 명령을 부과할 수 있고, 교통사고 범죄라면 특정 차량 운행을 금지하는 등의 조건을 단다. 이를 위반하면 피의자를 구속하는 방식이다. 재판 중인 구속 피고인을 석방하는 보석 제도를 수사 단계부터 도입하는 셈이다. 1999년 대통령 소속으로 설치된 사법개혁추진위원회에서 처음 논의된 이래 2018년엔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입법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발부 과정에서 필요시 증인을 불러 신문하는 압수수색 영장 사전심문제도 도입 가능성도 거론된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청문회에서 “검찰이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면 법원이 자판기 찍듯이 발부해준다”는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현재 여러 가지 절차를 거쳐 오고 있다”며 “그 절차가 다 마쳐지는 대로 내용을 검토해서 대법관회의에서 논의해 볼 생각”이라고 답했다.
다만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 차이를 보이는 수사기관은 변수다. 검찰은 조건부 구속영장제에 대해서는 “구속돼야 할 피의자가 석방될 경우 피해자 보호에 역행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고, 압수수색 영장 발부시 증인 신문에 대해서는 “수사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후, 검찰의 존재감이 커진 상황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이 ‘검찰의 반대’를 딛고 구속영장과 압수수색 제도를 손볼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법원행정처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판사 수 증원부터 관련한 예산 문제까지, 여러 법원 관련된 행정 전반을 하려면 대통령실, 기획재정부, 법무부 및 국회 등 다양한 부처와 소통해야 한다”며 “검찰 등의 반발이 예상되는 제도 개혁안은 법원도 양보를 해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법원은 수사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검사가 신청하는 참고인으로 심문 대상을 한정하는 방식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후임 대법관 선정 등 인사 본격화
조 대법원장은 임기 첫날부터 내년 1월 1일 퇴임하는 안철상·민유숙 대법관의 후임자 선정 절차에 나섰다. 두 대법관의 후임자 제청은 대법원장 부재에 따른 시급한 문제로 지적됐는데, 행정 절차와 국회 일정 등을 고려하면 최소 2024년 3월이 돼야 대법관이 인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조 대법원장은 바로 2024년 초 정기 인사를 앞두고 있다. 현재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법원장 후보군에 다시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폐로 몰렸던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법원장 후보 자격을 ‘법조 경력 22년 이상, 법관 재직 10년 이상인 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제한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의 운영 등에 관한 예규’ 개정이 거론된다. 이 규칙이 2022년 10월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신설되면서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배제됐다.
다만 지법원장에는 지역에서 추천을 받아 뽑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서울과 수원 등 고등법원장 자리에만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먼저 앉히는 안에 힘이 실린다. 법원행정처장에는 오석준 대법관 등이 후보군으로 거론되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사법행정 개혁을 앞두고 안정을 위해 김상환 법원행정처장과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을 그대로 유임하는 안도 거론된다. 평판사들의 반발을 고려해, 변화의 폭을 처음부터 무리하게 가져가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취임해 ‘공석 사태’는 막았지만 대법원을 필두로 법원 조직 전체가 정상화되려면 최소 2~3년은 지나야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게다가 조희대 대법원장이 정년 때문에 임기가 7년 아니라, 3년 6개월에 그쳐 ‘빠른 추진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앞선 현직 판사는 “인사 제도를 손보고, 두 차례는 인사를 해야지 법원 내 새로운 문화가 자리 잡히지 않겠냐”며 “문제는 대법원장의 임기가 짧아 손볼 것은 많은데 다 손대지 못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