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다는 주변 반응에 뿌듯” 악역 파격 변신…“‘사이코패스 의심’ 이정은 선배 말씀 칭찬이겠죠?”
“어떻게 눈을 쳐다봐야 할지 모르겠다.” 인터뷰를 앞둔 기자들의 공통적인 소감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무통각증’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를 어찌나 소름 끼치게 연기했던지 이전 작품의 부드러운 로맨스 가이로서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최근 종영한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운수 오진 날’에서 연기 변신을 보여준 배우 유연석(39)은 자신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을 먼저 안심시킨 뒤에야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근래에 부드러운 이미지의 캐릭터들을 많이 하다 보니 갈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이미지를 탈피해서 다른 얼굴을 보여드릴 것이 뭔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갈증요. 그 타이밍에 혁수가 제게 오게 된 거죠. 주변 분들이 무섭다고 말씀해주시는 것도 어떻게 보면 연기적으로 좋게 봐주셨다는 거잖아요. 배우로서는 그것이야말로 캐릭터를 하나 만들었을 때 얻게 되는 일종의 쾌감인 것 같아요. 혁수가 너무 사악한 인물이다 보니 사람들이 어떻게 볼까 궁금했었는데 결국엔 연기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아서 너무 뿌듯해요(웃음).”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운수 오진 날’은 택시기사 오택(이성민 분)이 드물게도 거액을 제시한 장거리 손님 금혁수(유연석 분)를 태우고 목적지를 향해 가다 그가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공포의 주행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고등학생 시절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고통을 느끼는 신경 중추가 망가진 혁수는 무통각증을 무기로 쾌락 살인을 벌이고 다니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 무통각증’이란 세 가지 특이한 키워드를 하나의 캐릭터에 모두 채워 넣다 보니 그의 캐릭터성을 과하지 않게 연기에 녹이는 것이 유연석이 맞닥뜨린 첫 번째 과제가 됐다.
“저는 연기할 때 ‘만약에 내가 이 캐릭터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접근하는 편인데 혁수는 ‘나’로 출발해선 해답이 안 나오겠더라고요(웃음). 촬영하면서는 저와 캐릭터를 분리해서, 감정이입보단 ‘오늘 출근해서 이 배역으로서 역할을 잘하고 퇴근해야지’란 생각으로 하루하루 촬영했던 것 같아요. 아마 직장인 분들이 굉장히 공감해주실 것 같은데, 저도 회사(촬영장)에 영혼을 갈아 넣어서 일하는 것보단 출퇴근 과정을 했을 뿐이거든요(웃음). 아무래도 혁수를 연기할 땐 저로 엄청 감정이입해서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실제 저 캐릭터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상상을 하다 보면 자꾸 답이 안 나왔으니까요(웃음).”
유연석의 혁수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오택을 비웃으며 자신의 살인에 대한 정당성을 개똥철학마냥 늘어놓는다. 앞서 자신이 죽인 아들의 복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들을 뒤쫓아 온 순규(이정은 분) 역시 모욕하고 비릿한 웃음을 날리는 혁수의 얼굴은 소름과 동시에 머리에 열이 차오를 만큼 얄미움을 선사한다. 실제로 순규를 연기한 이정은 역시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너무 얄미워서 (순규가 가진 총으로) 빵 쏴버리고 싶더라”라는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때 이정은 선배님이 제게 그랬어요. ‘(진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고(웃음). 선배님과는 몇 개의 작품에서 인연이 있었지만 같이 찍는 신은 많이 없었거든요. 이번에도 만나는 신이 적었는데도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신 건, 칭찬이시겠죠?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웃음). 반대로 이성민 선배님과는 진짜 농담 삼아 지겹다고 할 만큼 붙어있었어요. 그만큼 정도 많이 쌓였고요. 옆에서 연기하시는 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말 많이 배웠는데 제가 특별히 뭔가 액션을 크게 취하지 않더라도 오택이 갖는 긴장감, 공포감의 연기를 정말 잘해주셔서 더욱 혁수의 공포스러움이 잘 표현됐던 것 같아요.”
유연석이 연기한 혁수의 캐릭터성이 후반부에 이르러 좀 더 풍부해진 것은 원작과 달리 그에게 ‘이병민’이란 또 다른 정체가 주어진 덕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첫 살인을 마친 이병민은 이후 공범인 진짜 금혁수(안현호 분)와 함께 범행을 저질러오다가 조금씩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된 금혁수에게 실망해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게 된다. 자연스러운 서사 연결을 위해 과거 고등학생 시절 이병민과 지금 금혁수를 가장해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이병민의 모습을 모두 유연석이 연기했다. 이를 두고 유연석은 “‘운수 오진 날’을 촬영하면서 강아지를 해치는 것과 고등학교 교복을 입는 것, 이 두 개가 정말 쉽지 않았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감독님께서 ‘우리 학교는 노안 고등학교’라면서 감사하게도 주변 고등학생들을 노안으로 캐스팅해주셔서 고등학생 신이 큰 논란 없이 넘어갔죠(웃음). 사실 처음엔 제가 이걸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당연히 아역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제 상대역인 윤세나도 아역 없이 같은 배우가 혼자서 과거와 현재를 맡으니 이병민이란 캐릭터를 더 탄탄하게 하기 위해 저도 직접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게 감독님의 의견이셨어요. 그래서 제가 연기하게 됐죠(웃음). 디에이징(CG로 배우의 나이를 어려 보이게 만드는 작업)도 거의 하지 않았는데 특히 이병민이 첫 살인 때 비에 젖어서 씨익 웃는 장면이 그랬어요. 표정이 과하게 보였으면 하는 신은 그 표정을 살리기 위해 편집을 거의 안 했거든요.”
말수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고등학생부터 제 나름의 살인 미학을 늘어놓으며 쾌락을 좇는 연쇄살인마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을 아우르며 한 배우가 보여준 것은 말 그대로 “파격 이상의 변신”이었다. 그 호평 그대로 유연석이 만들어낸 금혁수와 이병민은 그의 필모그래피 역사상으로도 가장 강렬한 캐릭터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방송 내내 주변의 놀란 반응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는 그는 방영을 마친 지금은 완벽하게 ‘퇴근’하고 혁수와 병민으로부터 벗어났다며 웃음 지어 보였다. 2023년 데뷔 20주년을 맞이해 팬들과 함께 나눴던 소소한 행복을 뒤로하고 2024년 새해엔 혁수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는 게 유연석의 이야기다.
“앞으로는 제가 아직 못 보여드렸던 얼굴들을 계속 찾아보려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보시는 분들이 ‘이 사람이 이 역할은 어떻게 할까, 다음 역은 뭐 할까’라는 기대와 호기심이 계속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저라는 배우 자체가, 그렇게 해야지만 유연석이란 배우의 힘이 생길 것 같아요. 선역도 했다가 악역도 했다가 다양하게 변주해가며 넓혀가는 게 제가 배우로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도 생각해요. 이렇게 낙차가 큰 역할을 갑자기 했을 때 생기는 흥미로움도 물론 크고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