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미묘한 관계 변화, 중도 확장 위한 역할 분리 해석…한 ‘김건희 명품백’ 우려 표명, 달라진 스탠스 눈길
정치권에선 이를 거리두기라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위원장은 ‘지르고’, 용산은 뒤를 챙기는 방식으로 맡은 역할을 분리하는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이는 자칫 용산과 여당 간 수직적 관계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어 새로운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여권에서 고개를 들었다.
#윤석열-한동훈, 역할 나눴나
1월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국민의힘 텃밭이자 보수의 심장으로 불리는 대구·경북(TK) 출신 여론 주도층 1000여 명이 총집결했다. 매일신문 주최 ‘2024 재경 대구경북인 신년교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행사의 백미는 윤석열 대통령 영상 축하 메시지였다. 윤 대통령은 메시지를 전하는 내내 TK를 한껏 치켜 올렸고, 반응은 뜨거웠다.
윤 대통령은 메시지를 통해 “대구는 30년 전 제가 공직 생활을 시작한 곳이고 제게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가르쳐 준 곳”이라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힘을 준 대구에 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특히 윤 대통령은 ‘새해에 힘을 내서 씨게 함 해보자’며 경상도 사투리로 새해 인사를 전했고, 참석자들은 큰 박수를 보냈다.
윤 대통령은 영상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은 물론, 이관섭 비서실장을 직접 이 행사에 참석하게 했다. TK 출신인 이관섭 비서실장은 “대통령님의 뜻을 받들어 대구경북이 재도약하는 데 힘이 될 수 있는 방안을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이 실장과 함께 성태윤 정책실장, 조상명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도 동석했다.
그러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이날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TK 출신이 아닌 오세훈 서울시장,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나경원 전 의원 등 차기 여권 잠룡들은 일제히 행사장에 출격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윤재옥 원내대표 등 주요 당직자들도 왔다. 하지만 한 위원장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이를 두고 당내에서는 해석이 분분했다. 한 위원장이 같은 날 나온 공관위의 공천 룰 발표 때문에 오지 못했다는 얘기가 먼저 나왔다. 중진들에게 불리한 룰로 인해 TK 지역을 비롯한 당 중진들을 만나기 껄끄러울 수 있어 참석하지 않았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다른 의견이 곧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이 중심이 된 행사여서 한 위원장이 불참했다는 진단이었다. 비대위원장 취임 초기 오지 말라고 해도 찾아서 가야 할 판인데 오지 않았다는 것은 전략적 행보 차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최근 한동훈 위원장에게 팔도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 위원장은 개혁을 내세우며 중도 확장을 위한 행보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이고 여당의 최대 지지층에 대한 민심 다독이기는 여권의 다른 축이 충분히 맡을 수 있는 것”이라며 “이재명 대표가 외로운 원톱 체제를 지키는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여권은 협업을 통해 여당의 전통적 상징인 안정 속의 개혁 이미지를 심고 있는 걸로 보인다”고 했다.
한 위원장이 전국 순회를 하면서 윤 대통령 관련 발언을 하거나 치적을 홍보하는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역시 정치권에서는 매우 낯선 장면으로 받아들인다. 전임 김기현 대표는 윤 대통령을 자주 만난다거나, 충분히 소통하고 있다거나, 윤석열 정부가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입버릇처럼 얘기했지만 한 위원장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당은 지르고, 용산은 다지고
여권이 분업 체제를 가동하는 것을 두고 정가에선 윤 대통령 지지율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다. 복수의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은 30% 박스권 내에 갇혀있는 것으로 나온다. 지난 대선 득표율(48.56%) 복원이 쉽지 않다는 얘기도 뒤를 잇는다. 때문에 여권 일각에선 윤 대통령이 아닌 ‘한동훈 간판’으로 총선을 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총선에서 뛸 상당수 여권 후보들이 윤 대통령과 찍은 사진이 아닌 다른 사진을 내걸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대통령제 하에서, 더욱이 임기 후반도 아닌데 현직 대통령이 뒤로 완전히 물러나 총선을 치를 수는 없다는 게 여권 내부 중론이다. 윤석열-한동훈 분업 체제가 태동하게 된 배경이다.
한 위원장은 기존 정치 시스템을 갈아엎어야 한다는 ‘지르기’ 전술의 선봉에 서 있다. 그는 1월 16일 인천시당 신년 인사회에 참석한 자리에서 국회의원 정수를 300명에서 250명으로 축소하겠다는 내용의 4번째 정치 개혁 방안을 공약했다. 한 위원장은 이에 앞서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포기, 금고형 이상 확정 판결을 받은 의원의 재판 기간 세비 반납, 국민의힘 귀책으로 인한 재보궐 선거 무공천 등도 약속한 바 있다.
2023년 12월 29일 ‘한동훈 비대위’가 공식 출범한 뒤 1월 16일 기준으로 닷새에 1건씩 정치 개혁 의제가 나왔다. 정치에 대한 국민 피로도가 극에 달한 시점에서 기존 여의도 문법을 완전히 바꾸는 방식으로 중도 민심을 얻겠다는 포석으로 읽힌다.
한 위원장이 과감하게 지르고 있다면 용산은 민심 행보를 통해 전통적 보수 지지층에 대해 최대한 안정감을 주는 정책 다지기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윤 대통령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에 이어 1월 17일에는 상속세 완화 방침을 전격 시사했다.
윤 대통령은 또 1월 16일에는 현행 91개에 달하는 법정부담금 전수조사를 통한 전면 개편을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와 함께 1월 27일부터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유예도 국회에 요청했다. 윤 대통령은 “현장의 영세한 기업들은 살얼음판 위로 떠밀려 올라가는 심정이라고 한다”며 “중소기업의 현실적 여건을 감안할 때 시간을 더 줘야 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1월 17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된 ‘2024년 교육계 신년교례회’에 참석해선 “선생님들의 목소리에 계속 귀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현직 대통령의 교육계 신년교례회 참석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이후 8년 만이다.
최근 대통령실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윤 대통령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절제된 모습을 보인다는 목격담을 전하고 있다. 과거 즉흥적 발언으로 인해 논란이 된 적이 있는 만큼 신중하게 준비된 발언만 하는 걸로 보였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 전직 국회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 위원장은 야당 대표에게도 매섭게 달려드는 정치적 발랄함이 장점인데 이를 살려야 하고 윤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진중한 태도로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줘야 한다. 요즘은 한 위원장이 나타나서 그런지 이런 역할 분담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한통속 논란, 어찌 잠재우나
여권 전체가 임무 분할을 통한 분업 체제를 가동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은 여권을 향해 ‘한통속’ ‘초록은 동색’ 불 지피기를 계속하면서 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을 동일시하며 여권의 분업체제를 흔들려는 것으로 읽힌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월 16일 한동훈 위원장을 겨냥 “술 안 먹는 세련된 윤석열에 불과하지 않으냐, 이런 의심이 (사실이) 아니라면 일을 좀 제대로 해라”고 몰아붙였다. 홍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자꾸 대통령의 아바타 소리가 나온다”며 이같이 비판했다.
이어 홍 원내대표는 “국민과 야당에는 공격적이지만 여당을 위기에 빠뜨린 장본인인 대통령과 부인에 대해선 여전히 굴종적 모습”이라며 “더 이상 자기가 상사로 모셨던 대통령 눈치를 보지 말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자신과 대통령의 관계가 검찰총장과 부하 검사의 관계도 아니고 김건희 여사로부터 카톡 지시도 받아선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한동훈 위원장에 대해 공개적으론 평가를 절하하고 있지만, 내심 긴장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윤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던 보수층뿐 아니라 무당·중도층에서도 한 위원장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이 하나라는 부분을 적극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국민의힘 안팎에서는 한 위원장이 여권 내부를 향해서도 못 이기는 척 지르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국민의힘 영입인재인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1월 1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한동훈 비대위’가 김건희 여사 리스크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적극적으로 대응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수정 교수는 “김 여사가 경위를 설명하고, 만약에 선물이 보존돼 있으면 준 사람에게 돌려주고, 국민에게 사과하고 이렇게 하면 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저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강조했다.
김경율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도 1월 17일 JTBC 유튜브 ‘장르만 여의도’에 나와 김 여사를 둘러싼 주가조작 논란 및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해 “경중을 따지자면 분명히 ‘디올백’은 심각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은 이날 “(주가 조작·명품백 수수 논란 중) 둘 다 부적절하지만, 이것(디올백)에 대해서만큼은 지금 시점에서 분명한 진상을 이야기하고 대통령이든 영부인이든 혹은 두 분 다 같이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국민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방법”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 위원은 비대위 내에서도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묻는 데 대해서는 “최근엔 조금 이야기되고 있다. 제 생각과 다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했다. 한 위원장이 김건희 리스크에 대한 해소를 건의할 수 있을지 보느냐는 질문엔 “O, X로 물어보면 O”라고 답하면서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위원장 차원의 결단이 나올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고 정면 돌파 전술이 사용될 수 있다는 전망으로도 조심스레 이어지고 있다.
이 연장선에서 한 위원장의 1월 18일 발언은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는 ‘국민 택배’ 공약 발표 행사를 한 뒤 기자들이 김 여사의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묻자 “전후 과정에서 분명히 아쉬운 점이 있고, 국민들이 걱정하실 만한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 보수 언론은 이 발언을 1면 머리기사로 올리기도 했다. 그동안 김건희 여사 문제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스탠스를 보였기 때문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