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 윤서하 역으로 세 번째 ‘연니버스’ 탑승…“선산, 가까우면서도 ‘굴레’ 같은 가족애 녹여내”
※이 기사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선산’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제가 개인적으로는 다양하게 연기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면서 제 연기 스타일에 새롭게 제 성격이 반영된 것 같아요. 이전까지는 감정을 억제하고 누르는 스타일의 연기를 많이 했다면 이번엔 좀 시원하게 내지르고, 배우 인생 처음으로 욕설도 하면서 현실에 와닿는 감정표현을 하게 됐죠. 카타르시스가 막 느껴지더라고요(웃음). 특히 남편과 차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신이 그랬어요. 거기서 제가 ‘꺼져, 이 새X야!’라고 욕하는 게 애드리브였거든요. 그런데 제 욕이 어색하다고들 하시더라고요. 너무 자존심 상했죠(웃음).”
‘선산’에서 윤서하는 고립무원 같은 존재다. 어느 날 갑자기 행방을 감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원망과 슬픔으로 가득 찬 어린 시절을 보냈고, 커서는 남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남편을 얻었지만 남편은 보란 듯이 불륜을 저지르곤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는다. 언젠가 주어질 정교수직만을 그리며 갑질과 성희롱을 일삼는 교수 아래서 온갖 더러운 짓은 다 당했지만 그 자리마저 빼앗겨 버렸다. 그의 삶은 뭐 하나라도 곱게 주는 것 없이 빼앗기고 또 빼앗기는 결핍의 삶으로 그려진다.
“서하는 결핍이 많은 친구예요. 부모에게 버림도 받았고 혼자 지내 온 시간이 많았죠. 그렇게 애써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남편은 죽고, 이상한 이복동생이 나타나서 내 선산의 소유권을 주장해요. 이런 상황에 제 주변에 믿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흥신소를 하는, 어둠의 사람밖에 없는 거예요. 차분하게 계획하고 생각해야 하는 심적 여유가 없을 수밖에 없죠. 물론 변호사를 쓴다든지 하는 더 좋은 방법도 있었겠지만(웃음), 벼랑까지 몰린 상황에서 서하가 빠르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을 것 같아요.”
김현주의 해석대로 서하에게 있어 갑자기 뚝 떨어진 선산은 그 자체만으로 욕망의 대상이 된다. 뒤늦게라도 자신에게 찾아온 복덩이 같은 이 십수억 원짜리 유산이 곧 얼룩진 내 삶의 유일한 광채가 돼줄 것만 같다. 그런 단 하나의 희망과 동시에 나타난 이복동생 김영호(류경수 분)가 제 몫을 요구하고 나서니, ‘돌아버리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수록 서하는 영호에게 보통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극심한 적대감을 표출하게 된다. 마치 ‘선산’에 홀린 것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서하에 대해 김현주는 “이전까지 쌓여있던 울분이 선산이란 욕망으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처음 선산을 차지하려 한 것은 욕망 때문이었고, 그다음에는 영호라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이복동생에게만큼은 이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 같아요. 여태까지 내가 원하고자 했던 것을 막아온 사람들로 인해 쌓여있던 감정이 ‘또 나를 막아?’라는 울분으로 터져 나온 거죠. 심지어 영호는 내 아빠를 빼앗아간 동생이잖아요. 그 아이한테만큼은 절대 뺏길 수 없다고 생각해 싸움을 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내가 선산을 갖고 싶어서 싸우는 건지, 영호에게 지기 싫어서 싸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싸움만 하게 되는 거죠.”
이처럼 이복남매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하지만 음울한 유산 싸움이 후반부에 이르러 ‘김영호 출생의 비밀’로 매듭지어지면서 이 소재를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선 갑론을박이 일었다. 그의 정체가 소름 끼치는 반전으로 다가오기보단 다소 찝찝한 기분을 안기는 탓이었다. 다만 이미 대본을 받을 때부터 반전을 포함한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는 배우들은 이런 날 선 반응을 예상한 채로 작품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근친상간이라는 게 제 입장에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단어였고, 또 한국에서도 이런 소재가 거의 다뤄진 적이 없었죠. 그런 점에서 저도 우려됐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 관계를 (메인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소재로써 작품에 녹인 것이기 때문에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작품 안에서는 다른 감정들이 더 보이니까 그것에 가려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반전을 반전으로 여기지 않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웃음). 감독님께 꼭 그런 소재를 넣어야만 가족애를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극적인 소재를 가져오기 위해 감독님께서 그런 관계를 설정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연상호 감독의 작품의 대다수가 그렇듯 ‘선산’ 역시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주제는 가족이다. 윤서하와 김영호는 물론이고 이들과 선산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불길한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최성준(박희순 분) 역시 가족의 굴레 아래 억압돼 있다. 가족이기 때문에 더 처절하게 미워하지만 그러면서도 끝내 가족이기에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 정서를 과연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릴 수 있을까. 김현주 역시 ‘선산’을 촬영하며 이 지점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봤다고 귀띔했다.
“한국은 가족애를 좀 과하게 강요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가족이니까, 자식이니까, 부모니까, 장남이고 장녀니까라면서요. 저도 장녀거든요(웃음). 사람들이 다들 그런 강요에서 오는, 갖지 말아야 하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부모는 자식에게 못 해줘서 미안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손 벌려서 미안하고…. 저도 제가 부모님께 잘해드리면서도 뭔가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우리 사회가 이런 걸 한국의 문화라고 강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잘하면서도 잘못하는 것처럼 느끼면서 살고 있지 않나. 가족은 너무 가깝지만 약간 굴레가 되는 느낌도 사실 좀 있잖아요, 발목을 잡거나 내 숨을 조르는 것 같은 느낌. ‘선산’의 안에서도 아마 그런 것들의 감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더라고요.”
촬영이 끝나도 오래도록 곱씹어 생각하게 만드는 ‘선산’의 윤서하를 통해 스스로도 새롭게 느낄만한 표현을 해냈다고 자평한 김현주는 올해 안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시즌2’로 네 번째 연니버스에 탑승할 예정이다. 윤서하로 보여준 오늘의 새 얼굴이 과거 ‘지옥 시즌1’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로 다져진 액션에 더해지면서, 신작 안에서 그는 더욱 단단한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정이’를 할 땐 액션 연기가 많아서 더 수월했어요. 감정이 적고 액션이 많으면 내 몸 컨디션만 좋게 해서 가면 되니까요. 정신적인 노동이 없어서 피로도가 덜했는데 계속 하다 보니 몸이 피곤한 것도 싫더라고요(웃음). 어떤 작품이든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저도 사실 배우를 한 지가 좀 됐잖아요? 이제는 ‘김현주 이번 작품에서 잘했다’ ‘김현주의 재평가’ 이런 말들로 일희일비하지 않아요. 그냥 듣고 ‘아, 예, 고맙습니다’하고 말죠(웃음). ‘선산’에선 내가 이제껏 해보지 않은 표현법을 윤서하란 이 캐릭터로 인해 써봤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