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회 구조 놓고 갈등, 스포츠체육위 출범이 방아쇠…이기흥 3선과 맞물려 대규모 세과시 정부 압박 관측도
“사상 초유의 대정부투쟁이다. 대한체육회가 정부를 상대로 사실상 전쟁을 선포했다. 문체부와 대한체육회가 팽팽한 줄다리기를 펼치면서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총선에다가 올림픽까지 겹친 2024년에 체육계 최대 화두로 주도권 다툼이 떠오르고 있다. 사실상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3선 가능성을 둘러싼 신경전이라는 분석이 많다.”
한 체육계 핵심 관계자 말이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과 유인촌 문체부 장관이 맞붙었다. 해결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평행선 갈등이다. 표면적인 갈등 요인은 대한체육회 구조를 둘러싼 갈등이다. 유 장관은 그간 복수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통해 대한올림픽위원회(KOC)와 대한체육회가 분리돼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회장을 비롯한 체육계 핵심 인사들은 지금처럼 KOC와 대한체육회가 통합 운영돼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의 체육계 관계자는 “조직 구조와 관련한 문제는 간단하다”면서 “국제 스포츠 업무와 국내 체육 인프라 운영 등 업무를 통합할지 분리할지 문제다. 즉, 국내파트와 국제파트를 나눌지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파트를 나누게 되면 자연스레 대한체육회는 국내 체육 전반에 걸친 업무만 담당하게 되는데, 이때 체육회 국제적 위상은 KOC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KOC를 대한체육회로부터 분리하게 되면 이기흥 회장 입장에선 곤란한 일이 하나 생긴다. 국가올림픽위원회 몫으로 할당된 IOC 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이 회장이다. 그런데, KOC가 분리되게 되면 이 회장이 IOC 위원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 있다. 혹은 IOC 위원직을 유지하려 대한체육회장직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 올 수 있다.”
이 회장과 유 장관 갈등이 본격화한 건 2023년 말부터다. 유 장관은 2023년 10월 7일 문체부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문체부 장관직을 역임했던 유 장관이 12년 만에 컴백했다.
유 장관 컴백 이후 대한체육회와 문체부 갈등에 방아쇠를 당길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국가스포츠정책위원회(스포츠정책위) 출범이었다. 스포츠정책위는 스포츠 주요 정책을 심의 및 의결하는 협치기구다. 위원장은 민관에서 한 명씩 맡게 된다.
정부 몫 위원장직은 한덕수 국무총리가 맡았다. 대통령이 지명하는 민간위원장직은 이에리사 전 태릉선수촌장에게 돌아갔다. 민간위원은 총 9명이고, 그중 3명이 당연직이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정진완 대한장애인체육회장, 조현재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이다. 나머지 6명은 허구연 KBO 총재를 비롯한 민간 체육계 인사들로 꾸려졌다.
정책위 사정에 정통한 한 체육인은 “정책위 출범 과정에서 대한체육회 입김이 원하는 만큼 작용하지 않은 것이 ‘대정부 투쟁’ 발단이 된 것으로 안다”면서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민간위원장직을 내심 기대했지만 당연직 민간위원으로 위촉됐고, 민간위원 위촉에 있어서도 대한체육회 추천이 사실상 반영되지 않으면서 갈등이 증폭됐다”고 전했다.
스포츠정책위는 2021년 8월 제정된 스포츠기본법에 따라 2023년 12월 출범했다. 유 장관이 문체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인 2023년 여름께부터 민간위원 인선을 두고 진통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대한체육회는 스포츠정책위 출범과 관련해 사실상 ‘보이콧 의사’를 표명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은 스포츠정책위가 출범도 하기 전에 당연직 민간위원직에 대한 사임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결국 민관협의체 스포츠정책위는 체육계 가장 큰 조직인 대한체육회가 배제된 상태로 출발하게 된 셈이다. 스포츠정책위 불참 국면 이후 대한체육회는 대정부투쟁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2024년 1월 16일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린 ‘2024 대한민국 체육인대회’에선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200대가 넘는 관광버스가 동원돼 전국 체육인이 이곳에 모였다. 그들 중엔 ‘KOC 분리반대’ 등 메시지가 적힌 팻말을 들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운집한 체육인 중 상당수가 본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한 체육단체 관계자는 “이번 행사는 이기흥 회장이 세를 과시하는 무대처럼 보였다”고 했다.
이날 행사엔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도 참석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런데 행사가 시작된 뒤 윤석열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윤 대통령을 대신해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참석했다. 윤 대통령이 행사 6일 전 불참 소식을 알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 ‘세 과시’ 의도에 대통령실이 호응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 원로 체육인은 “대한민국 체육인대회에서 이기흥 회장을 필두로 한 대한체육회 기득권 세력이 엄청난 세 과시를 했다”면서 “훈련 중인 선수들까지 동원했다는 말도 나왔다”고 했다. 이 원로는 “사실상 이 회장이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이후 유례가 없는 3선 대한체육회장이 되겠다는 선전포고 무대라는 해석도 나왔다”면서 “대통령 참석 여부가 행사 최대 쟁점이었지만, 정부가 ‘이기흥 잔치’에 호응하지 않은 모양이 됐다”고 했다.
차기 대한체육회장 선거는 2025년 펼쳐질 예정이다. 차기 선거를 앞두고 체육계 안팎으로 굵직한 이벤트가 많다. 코앞으로 다가온 제22대 총선을 비롯해 ‘2024 파리올림픽’ 등이 대표적이다. 정치권에서 활동했던 한 체육단체 고위 관계자는 “총선에선 정부가 심판대에 서고, 올림픽에선 체육회가 심판대에 선다”면서 “일단 정부가 먼저 심판대에 서는 만큼 체육회에서 이런 부분을 적극 이용하는 모양새”라고 했다.
그는 “웬만한 정당들보다 전국적인 점조직망을 갖추고 있는 게 대한체육회”라면서 “이번 대한민국 체육인대회 사례만 살펴봐도 체육회가 충분히 총선 결과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만한 조직력을 자랑했다. 총선을 앞두고 정부가 유심히 고려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유인촌 장관은 외나무다리 승부를 피하지 않고 있다. 유 장관은 대한체육회 역점사업인 ‘로잔 국외연락사무소’ 설립을 거부했다. 로잔은 IOC가 위치한 도시다. 대한체육회 입장에선 세계 체육 심장부에 ‘체육 대사관’을 설치하겠다는 로드맵이다. 하지만 문체부 입장이 유보적이다. 유 장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해마다 몇억 원씩 들어갈 현지 운영비를 당장 필요한 선수 육성 등에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유 장관은 2023년 12월 대한체육회가 주도한 ‘국가대표 선수 해병대 훈련’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방법”이라며 강한 견제구를 던졌다. 이 회장 ‘역린’과도 같은 KOC 분리를 언급하면서 대한체육회를 향한 압박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또 다른 체육인은 “유 장관이 대한체육회를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흥의 대한체육회’를 압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2월 6일 이 회장은 직접 유 장관을 직격했다. 서울 방이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제28차 이사회에서 이 회장은 “진천선수촌장이 네 차례나 문서를 보냈음에도 문체부에서 올해 체육 예산을 주지 않고 있다”면서 “이게 문체부 행태”라고 비판했다. 2월 7일엔 전국시도체육회장협의회가 2월 14일 열린 유 장관 주재 간담회 불참 의사를 밝혔다. 이 회장에 힘을 실어준 모양새다.
일련의 상황과 관련해 관료 출신 한 체육계 인사는 “대한체육회가 문체부를 ‘관료 카르텔’ 프레임으로 공격하고 있지만, 대한체육회가 형성하고 있는 ‘카르텔’ 역시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이기흥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체육계 전반에 퍼진 체육 카르텔은 전국적인 점조직을 구성하고 있어 ‘마피아’라는 비유가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3선 도전 가능성이 모든 갈등 뿌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대한체육회 내부 사정에 정통한 체육계 핵심 관계자는 “대한체육회가 문체부를 향해 다음 회장 선거에 개입하지 말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지는 것”이라면서 “세 과시를 통한 무력시위 또한 결국엔 ‘이기흥 체육회’가 건재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조치”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이 회장은 이른바 ‘공중전’에 상당히 능한 인물”이라면서 “정치적으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대선 때까지만 해도 내부적으로 ‘친윤’임을 자부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 회장이 묘한 기류를 타고 대통령실과 거리를 두며 문체부를 직격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총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의 대치여서 다양한 정치적 해석 및 변수를 고려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