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의협 반발 딛고 200명 증원·지역의대 신설…현실은 여전히 의대 졸업생수 OECD 평균의 절반 수준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과거부터 의사들이 악을 쓰고 증원에 반대해온 역사를 떠올리면, 이번에도 '기득권 수호'를 위한 행보라는 인상이 짙다. 실제 30년 전 의사 증원 당시 상황들을 보면 현재와 판박이 수준이다. 최근 집단행동에 나선 의사들 가운데 누군가는 어쩌면 선배들의 반대로 의사 가운을 입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 시기 의사들이 우려한 증원 부작용은 전혀 현실화하지 않았다.
#30년 전 의사들 “정부가 돌팔이 의사 양성”
"늘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인구 증가율 등을 보면 현상 유지만 해도 나중에는 의사가 많아진다." "가르칠 교수가 부족하다."
의사들의 최근 입장이 아니다. 30년 전인 1994년 교육부와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가 의대 입학 정원 증원을 추진하자 언론 등에 소개된 의료계 각종 이익단체들이 낸 목소리다.
당시 정부는 "전 국민 의료보험 실시 이후 특히 농촌 등을 중심으로 의료 수요가 급증 추세를 보인다"며 "노인 인구의 증가 및 국민 건강에 대한 관심이 고조돼 의료 인력 확충이 불가피하다"는 등의 이유로 의사 증원 방침을 내렸다.
그 시절에도 오늘날의 ‘병원 오픈런’처럼 “3시간 대기해서 3분 진료받는다”는 웃기 힘든 우스갯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비수도권 지역에 의대를 신설해 전체 의사 수를 늘리기로 구상했다.
이때는 교육부와 보건사회부, 의사단체의 3각 갈등을 벌였다. 애초 교육부는 1996년까지 3년 동안 800명씩 증원을 계획했으나, 보건사회부가 50명 이하를 요구해 마찰을 빚었다. 와중에 대한의학협회(현 대한의사협회) 등 단체들은 '증원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주목할 지점은 의사들이 증원을 반대했던 이유다. 경향신문과 매일경제 등에 따르면 대한의학협회는 "지금의 의대 정원만으로도 2010년이면 의사 1인당 환자 수가 45명으로 떨어져 의사들의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된다"며 "현재 상태만 유지해도 의사 과잉 시대가 온다"고 주장했다.
대한의학협회의 핵심 근거는 '이전 10년 동안 인구 증가율이 0.9%에 그친 반면 의료인력 증가율은 6.84%로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것이었다.
의사를 증원할 경우 의료 질이 낮아져 오히려 국민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빠트리지 않았다. 또 "정부가 돌팔이 의사 양성에 앞장서고 있다"는 등 거친 발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상대 당시 대한의학협회 사무총장은 1994년 9월 5일 조선일보 기고에서 "의대 신설을 반대하는 핵심 이유는 의학교육 여건이 너무 나빠 제대로 교육을 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의대생이 늘면 능력이 떨어지는 의사를 배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2024년 의사들의 투쟁과 꼭 닮은 역사지만 일부 차이는 있다. 적어도 의사들이 지금 같은 규모의 파업은 하지 않았다.
1994년 8월 30일 서울 영등포구 서울시의사회 앞에 대한의학협회 의사 약 500명이 모여 정부에 '입학정원 확대 철회'를 촉구했다. 단 출근 전인 아침 8시에 한시적으로 진행했다.
그럼에도 정부와 국민 여론은 매우 싸늘했다. 보건사회부는 의료계의 집단 반발에 "자기 몫을 잃지 않으려는 속 보이는 집단 이기주의의 한 단면"이라며 "의사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얄팍한 의도"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이 밖에 시민들이 각종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도 "밥그릇 지키기 발상을 국민 생명을 빌미로 호도하려는 궤변" "의사 만나기가 힘든데 숫자가 적정하다니, 우리나라 사람이 유독 아프단 뜻인가" "문민시대 사회개혁 차원에서 의사 집단이기주의도 사라져야 한다" 등의 비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정부는 1994년 9월 14일 강원대, 관동대, 서남대, 건양대 4개 대학 의대 신설을 확정했다. 입학 정원은 각 대학마다 50명씩 총 200명이었다. 이어 1998년 제주대 의대도 신설했다.
#거꾸로 간 의사 숫자
하지만 의사들의 반발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이런 탓에 의사 숫자가 다시 거꾸로 가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1998년 의대 입학정원은 3507명이었다. 그러다 2003년 3253명, 2004∼2005년 3097명, 2006년 3058명으로 줄었다. 1994년부터 증원 추진으로 간신히 200여 명을 늘렸는데, 결국 약 10년 만에 500명가량이 줄어든 셈이다.
이는 2000년 의약 분업 사태 당시 의사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의사 수 감축'이 이뤄진 탓이다. 그리고 2006년부터 18년 동안 의대 입학정원은 동결돼 왔다.
대한의학협회 등이 과거 주장한 '의사 과잉'도 전혀 현실화하지 않았다. 한국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12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인 3.69명보다 1.57명 적다. 의대 졸업생 수 또한 인구 10만 명당 7.2명으로 OECD 평균(13.2명)의 절반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현재 의사들 가운데 증원에 찬성하는 목소리도 있다. 추무진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과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 등이 상임대표로 있는 '더좋은보건의료연대'는 "의대 정원 확대는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라며 "증원뿐 아니라 필수의료에 대한 확충 방안 또한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김윤 교수는 "의사는 앞으로 부족해지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부족하고, 수도권 바깥 지방에는 대형병원뿐 아니라 동네의원마저 적다"며 "각종 통계를 종합하면 2000명 증원은 최소치일 뿐, 앞으로 15년 동안 4500명은 늘려야 하는 실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의협 등이 미흡한 교육 여건 등을 지적하지만 억지 주장"이라며 "구체적으로 뭐가 얼마나 부족하고 충당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또 "임상 교수 등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면서 "응급실 중환자실을 비우고 파업을 한다는 발상 자체가 한국 의사들의 윤리의식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꼬집었다.
한편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2월 21일 기준 전국 병원에서는 8816명의 전공의들이 의사 증원에 반대하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과거 의료계의 거친 반발을 뚫고 1994∼1998년 신설된 강원대병원 전공의 60여 명, 제주대병원 전공의 50명, 서남대 의대를 흡수한 전북대병원 전공의 189명 등이 포함된 숫자다.
병원 떠돌다가…수술할 의사 없어 사망한 환자들
전국 전공의 등의 무더기 사직서 제출로 의료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가며, 과거 의사가 없어 환자가 사망한 악몽 같은 사건들도 다시 떠오르고 있다.
2022년 8월 서울 아산병원에서 숨진 간호사 사례가 대표적이다. 평소 과로에 시달리다 뇌출혈까지 앓은 간호사 A 씨는 개두술(머리를 여는 수술)을 받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개두술은 난도가 높은 탓에 A 씨가 수술 가능한 의사를 찾기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일하는 아산병원에는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2명이나 있었다.
그럼에도 수술을 받지 못한 이유는 해당 의사 2명이 사건 당일 전부 여름휴가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몇 안 되는 의사가 동시에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에 의료계 안팎에선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2019년 10월 고 김동희 군이 하늘로 떠나게 된 사연도 가슴 아프다. 김 군은 편도제거수술의 후유증을 앓다 정신을 잃었다. 이에 양산부산대병원으로 이송이 결정됐는데 도착 5분 전 '심폐소생술 중인 다른 응급환자가 있어 수용 불가' 통보를 받았다.
김 군과 가족들은 발길을 돌리다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5개월 뇌사상태에 빠진 김 군은 2020년 3월 11일 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찰 수사 결과 당시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심폐소생술 중인 다른 환자는 없었다. 김 군을 살펴봐 줄 의사가 없었을 뿐이었다.
2016년 고 김민건 군 사건도 충격적이다. 당시 두 살이었던 민건 군은 전북 전주의 한 도로에서 친할머니와 견인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급히 전북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실이 없다' '수술 가능한 의사가 없다' 등의 이유로 다른 병원 이송이 결정됐다.
두 살인 민건 군은 차에 치여 크게 다친 상태로 7시간을 헤맸다. 다른 14개 병원이 전북대병원과 같은 이유로 이송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주대병원이 뒤늦게 수술을 결정했을 때는 민건 군이 이미 숨진 뒤였다.
민건 군 사건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 의사는 일요신문에 "수술할 수 있는 의사들이 전부 학회 등으로 자리를 비운 탓에, 다른 의사와 간호사 등이 발만 동동 구르며 민건이를 바라본 기억이 선명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자리를 비운 의사들의 개인 책임도 분명히 있겠지만, 의사가 단 1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이 의사는 '의대 증원' 등에 대해서는 "인기과로 쏠리는 현상을 방지할 수 있는 대책이 함께 마련된다는 전제로 찬성"이라며 "그 외에도 대학병원 특유의 경직된 조직문화 등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바라봤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