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특검법 부결 후 텃밭 현역 컷오프에 묘한 해석…용산과 차별화, 물갈이 후유증 처리 등 과제
#시스템이 고무줄로
시스템 공천을 앞세운 국민의힘은 경선 국면 초·중반까지 정치 신인에게 상당 부분 불리한 룰을 내걸고 경선 중심으로 공천 작업을 진행했다. TK 등 텃밭에도 똑같은 잣대를 적용했다. 책임당원 50%, 일반 시민 여론조사 모두 현역에게 유리할 가능성이 높다. 현역의 경우 탄탄한 지역 기반, 인지도 프리미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경선 가감점 기준도 현역에 유리하다는 평이다. 전국 4개 권역별 평가 하위 10~30%에겐 20% 감산, 동일 지역구 3선 이상에겐 15% 감산 등 기준이 있지만 경선 득표율에 정량이 아니라 비율로 감산하는 탓이다.
청년, 정치신인, 여성 등 유형에 따른 경선 가산점도 비율로 가산하는 것이어서 최대 20%까지 가산하더라도 실제 가점은 미미한 수준이라는 게 경선 참여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광역부단체장 출신은 첫 출마라 하더라도 정치신인 경선 가산점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하는 등 이번 시스템 공천 관련 기준이 신인에게 과도하게 박하다는 평가가 많다.
이런 여파로 인해 TK 등 텃밭에서 다선 의원들을 포함해 다수의 현역 의원들이 살아남았다. TK 3선 이상 중진 3인방인 주호영 윤재옥 김상훈 의원은 모두 공천장을 쥐었다. 재선의 경우에도 전체 8명 중 6명(김석기 추경호 이만희 김정재 송언석 임이자)이 공천을 받았다.
역시 전통적인 국민의힘 텃밭 서울 강남의 지역구 7곳 중에서도 서초갑(조은희)과 송파을(배현진) 2곳에서 일찌감치 공천이 확정됐다. 그것도 경선이 아닌 단수공천이 나오면서 텃밭에서 역시 현역 불패가 이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2월 29일 본회의에서 ‘김건희 특검법’이 부결된 후 시스템이라는 글자가 사라지고 고무줄이 등장했다. 텃밭에서 갑작스레 현역이 날아가고 도전자가 공천을 받는, 공천 초중반 형태와의 다른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는 3월 5일 박성중(서울 서초을) 유경준(서울 강남병) 안병길(부산 서·동) 홍석준(대구 달서갑) 등 이른바 텃밭 현역 의원 4명을 지역구 컷오프하기로 했다. 서울 강남의 경우, 7곳 중 5곳에서 교체가 이뤄지게 됐고 TK에서도 홍석준 의원이 경선도 없이 컷오프(공천배제)되면서 텃밭 현역 불패 대오가 무너질 조짐을 보였다.
당연히 낙천자들이 강력 반발하는 등 뒷말이 무성하다. 서울 강남병(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 전략공천)에서 컷오프된 유경준 의원은 공관위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의를 신청했다. 유 의원은 공관위 경쟁력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자신을 경선에 부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우선추천한 공관위 결정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바 있는 김웅 국민의힘 의원(서울 송파갑)은 3월 6일 페이스북에 유 의원의 컷오프에 대해 글을 올려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인 공천이다. 굳이 부르자면 오컬트 공천, 파묘 공천”이라고 비판했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충분히 높게 나오는 현역을 젖히고 신인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는 지적이었다.
대구 달서갑(박근혜 전 대통령 최측근 유영하 변호사 단수추천)에서 컷오프된 홍석준 의원도 법안 발의 실적, 책임당원 규모 확대 성과를 거론하며 이의 신청을 하는 등 발끈했다. 그는 “(유 변호사 단수추천이) 시스템 공천의 일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국민의힘은 서울 강남과 영남 등 텃밭 일부 지역구에 사실상 전략공천 형식의 ‘국민공천제’도 적용하기로 했다. 국민 추천을 받아 이 인물들을 심사한 뒤 텃밭 지역구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공천제 역시 반발을 부르고 있다. 기존 공천 신청자 외에 쇄신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인물이 갑작스레 나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밀실공천’ 등 공정성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시스템 공천으로 달려오다가 느닷없이 국민공천제를 제시, 경기 중에 골대를 옮겼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여당 공관위가 국민추천 지역으로 지정한 울산 남구갑의 현역 이채익 의원도 공관위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이 의원은 “잠시 떠나더라도 승리해서 복귀하겠다”며 탈당 후 무소속 출마까지 시사하고 나섰다.
#왜 고무줄 튀어나왔나
경선 중심의 시스템 공천이 자취를 감추고 텃밭에서 컷오프가 나오기 시작하자 해석이 분분하다. 우선 “김건희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을 수사할 특별검사 도입 법안이 국회 재의결을 통해 폐기되자 현역 물갈이가 본격화했다”는 분석이 주를 이룬다. 특검법 표결을 앞두고는 현역 의원들 반발을 막기 위해 컷오프를 최소화했지만, 법안 폐기와 함께 본격적 물갈이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상당수 국민의힘 의원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 모습이다. 당내에서는 김건의 특검법 처리에 대한 당 지도부의 경계심이 상당히 강했고, 이 같은 걱정이 현역 살리기를 통한 특검법 저지표 지키기 시도로 이어졌다는 게 복수의 여당 의원들이 전하는 얘기다. 국민의힘 한 현역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2월, 그리고 특검법 처리가 끝난 직후인 3월부터의 기류가 확실히 달라졌는데 특검법 정국이 끝났기 때문이다. 여당에는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특검법이 무산된 만큼 현역 의원 눈치 보기가 끝났고 그제야 현역 날리기가 시작된 걸로 봐야 한다.”
텃밭에서 ‘만만한 초선’만 쳐낸다는 질타도 나온다. TK 등 텃밭에서는 공천이 곧 당선인데 무소속 출마 파괴력이 생길 수 있는 다선은 빼고 초선만 날리는 이른바 ‘초선 잔혹사’가 일어나고 있다. TK에서는 다선의 불출마 선언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초선 윤두현(경북 경산)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했고, 컷오프된 홍석준 의원도 초선, 경선에서 진 김병욱 김용판 임병헌 의원 등 공천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초선이었다. 잡음을 최소화하는 공천을 하다 보니 물갈이 대상은 모두 초선이 됐다는 지적이다.
물갈이가 쇄신과 신선함으로 이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부호도 달린다. 친윤(친윤석열) 챙기기, 친한(친한동훈) 세력 심기 등의 시도로 해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텃밭 강남 지역구에서 유경준 의원을 제친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친한 세력으로 꼽힌다. 홍석준 의원을 되돌려 세운 유영하 변호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의식하면서 범보수 규합을 시도하는 용산의 정무적 판단 결과로 정치권에서는 읽고 있다.
#한동훈 정치력 시험대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내홍에 비해 국민의힘 반발 움직임은 강도가 그리 세지는 않다는 반응이다. 불공정한 공천 과정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낙천자들도 야당과는 달리 보상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집권 여당임을 감안해 향후 ‘책임 있는 행보’를 기대하면서 사생결단의 반발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 공천 약점에 대한 여론의 주목도를 더 떨어뜨리는 배경이다.
하지만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은 잠재돼 있다. 무엇보다 미래 권력으로 떠올라있는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특검법 정국을 지나치게 고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용산과의 차별화에 실패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용산 출신 인사들을 대거 공천하지는 않았지만 특검법 정국에 안테나를 잔뜩 올려놓으면서 용산과의 동조화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식, 즉 ‘아바타 논란’을 완전히 탈출하지는 못한 것이다.
막판 물갈이 시도를 가동한 한 위원장이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줄 인물들을 대거 수혈, 친한 세력이 당의 주류가 된 것도 아니다. 특히 다선 의원들에게 공천장을 대거 부여해 향후 대선 가도를 달릴 때 보폭의 제한도 상당할 전망이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3월 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윤석열 대통령하고 관계를 고려해 (한 위원장은) 일단 정치권에서 빠져야 된다. 안 그러면 윤 대통령하고 관계가 절대 원만하게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차기 권력을 현재 임기가 절반 이상 남아 있는 현재 권력이 눈뜨고 볼 리가 없다”며 “2개의 태양은 용납이 안 된다”고 했다.
한 위원장이 이번 공천 국면에서 현재 권력과의 강력한 차별화 효과를 내지 못하면서 윤 전 장관 분석처럼 미래 권력의 위치로 초고속 직행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주된 판단이다. 몇 단계를 더 거쳐야 하는데 이번 공천에서의 확보한 자신의 지분율도 크다고는 보기 어려워 여당의 차기 리더 그룹은 몇 차례 더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한 중진급 의원은 “텃밭에서의 현역 물갈이에 따른 후유증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한동훈 위원장에게 남아 있는 과제다. 농구로 따지면, 한 위원장은 그동안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온 반면에 민주당은 잃었다. 그래서 차이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칫 점수를 잃을 수 있는 상황이고, 반면 민주당은 이제 올라올 일만 남았다. 한 위원장 정치력이 시험대에 선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최경철 매일신문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