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역별 이해관계 복잡, 교수단체도 입장 따라 양분…2020년 ‘앙금’ 전공의들은 선배·스승과 거리 두고 ‘독자노선’
의료계에 따르면 서울대와 가톨릭대, 울산대 등 3곳의 의대 교수들이 집단으로 사직서 제출을 결의했다. 모두 ‘빅5’ 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두고 있는 학교다. 서울삼성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둔 성균관대 의대 교수들도 15일 입장문을 통해 사직 가능성을 시사했고 세브란스병원을 수련병원으로 둔 연세대 의대 교수들은 관련 논의에 속도를 낼 예정이라고 밝혀 사직 행렬은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교수들의 잇단 사직은 앞서 이들이 추진한 의·정 간 대화 자리가 성사되지 못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3월 12일 서울대 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의료계와 정부에 의대 증원 결정을 1년 미루고 대화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여당, 야당, 국민대표, 교수, 전공의, 의협이 모두 참여하는 대화협의체를 만들고 검증된 제3자 기관의 분석을 토대로 증원 규모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협)는 곧바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보건복지부는 “의료개혁은 더 늦추기 어려운 사안”이라고 일축했고, 주수호 의협 언론홍보위원장은 “논평할 가치가 없다”며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의사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문제는 의사단체의 구심점이 없다는 데 있다. 같은 의사라 해도 개원의·봉직의·교수·전공의 등 직역이 다양하고 직종이나 소속에 따라 이해관계도 복잡하다. 의협의 경우 의료법에 따라 모든 의사가 자동으로 가입되지만 실질적으로 의협을 이끄는 의사들은 개원의다. 봉직의는 대한병원의사협의회를 통해, 전공의는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선봉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당연히 증원 정책에 대한 의견도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재를 자처하고 나선 교수들마저 단체별로 의견을 달리하며 사분오열 갈리는 상황이다. 현재 교수단체의 두 축은 38개 의대가 속한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와 24개 의대가 모인 전국 의대 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국 비대위)다.
12일 출범한 전국 비대위는 서울대 의대 교수협의회 비대위를 주축으로 한다. 방재승 비대위원장은 “지난주 전의교협과 논의한 결과 서로 방향이 달라 19개(13일 기준) 의대를 따로 꾸렸다”고 밝혔다. 전국 비대위는 의대 증원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선대화 후협상’을 내세우며 정부와 접촉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15일 밤에는 한덕수 총리와 비공개 간담회를 열어 대표성 있는 협의체 필요에 공감했다.
반면 전의교협은 증원 자체를 반대하며 정부 정책에 반발하고 있다. 필수의료체계를 바꾸는 것이 선행된 후에 의대 정원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14일에는 보건복지부·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의대 증원 처분 집행정지 사건의 심문에 참석했다. 전의교협 측은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은 절차적으로 위법하다며 처분의 효력이 중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단 사직에 대해서는 같은 날 밤 온라인 긴급 총회를 열고 자발적 사직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면서 전국 비대위와는 노선이 다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은 15일 KBS 인터뷰에서 “비대위의 뜻은 존중하지만, 우리와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단체를 합칠 경우 하나의 목소리밖에 나오지 못한다”며 “교수 사회가 획일적인 사회가 아닌 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다.
한편 사안의 중심에 서 있는 전공의들은 개별행동을 유지하며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이들은 선배 의사인 의협과도, 스승인 교수단체와도 최대한 거리를 두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2020년 파업의 실망이 앙금으로 남아있다는 말이 나온다. 2020년 파업 당시 최대집 의협 회장은 전공의와 의대생을 배제한 채 ‘9·4 의정합의’를 도출했다. 이때 반발하며 의사 국가시험 응시를 거부했던 졸업반 의대생들이 현재의 전공의다. 복지부 관계자 역시 ‘한겨레’ 인터뷰에서 “대전협이 집단행동을 명시적으로 주도하고 정부와 소통했던 2020년과 전혀 다른 상황”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박단 대전협 비대위원장은 파업 초기부터 의협과는 별도의 노선을 간다고 공언해왔다. 2월 7일에는 전공의들에게 “추후 의협 입장이 어떻든지 따라가지 않겠다. 의협은 개원의 중심으로 2020년에도 참여율 한 자릿수였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보냈고 같은 달 20일 열린 대전협 임시대의원총회에서는 의협 비대위의 참석을 제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대화협의체를 만들자는 교수들의 제안을 “합의한 사안이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익명을 원한 한 전공의는 “2020년 파업을 직접 겪으며 느낀 점은 전공의 문제는 전공의들끼리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현재의 내부 분위기는 2020년 파업 때와는 많이 다르다. 그때는 ‘일단 모이자’는 기조가 강했다면 지금은 ‘각자 판단하자’는 분위기다. 어떻게 보면 탈조직화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대전협이 선배와 스승 대신 선택한 것은 국제노동기구(ILO)다. 13일 대전협은 사직서를 낸 전공의에 대한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발령 등과 관련해 ILO에 긴급 개입 요청 서한을 발송했음을 밝혔다. 박 비대위원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의료법 제59조 제2항과 이에 따른 처벌 조항인 의료법 제59조 제3항에 의거한 업무개시명령의 경우 ILO 제29호 강제노동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면서 “정부가 업무개시명령 등의 공권력을 통해 전공의를 겁박하며 노동을 강요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서 “ILO 제29호 협약에서는 국민 전체 또는 일부의 생존이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상황이나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강제노동 적용 제외를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정부로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설명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강제노동금지협약은 2조 1항에서 “처벌의 위협 아래 강요받거나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모든 노동이나 서비스”를 강제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2조 2항에 따르면 “국민 전체 또는 일부의 생존이나 안녕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상황과 같은 재해나 그런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강제노동에 포함하지 않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