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방 운영하며 또래 모집, 일주일이면 학교 전체에 퍼져…전문가 “사이트 차단보다 계좌 동결 효과적”
A 군이 말끝을 흐렸다. 올해 스무 살이 된 그는 중학생 때 처음 도박을 접했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직접 불법 도박 사이트 회원을 유치하고 관리하는 총판까지 맡았다. 매달 적게는 20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만 원을 벌었지만 이 돈은 고스란히 도박판으로 들어갔다.
“번 돈을 다 잃었어요. ‘이제 진짜 그만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잠깐 끊기도 했었지만 문제는 다른 어떤 걸 해도 재미가 없었어요. 왠지 다시 벌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들었고요. 결국 같이 게임을 하던 애들한테 돈을 빌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액수가 점점 커졌고 이자는 더 커져서 도저히 갚을 길이 없으니까….”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했다. 도박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도 여러 개 했으나 이미 수백만 원을 굴려본 A 군에게 50만 원 남짓의 월급은 큰 돈이 되지 않았다. 그는 집에 있는 노트북과 전자기기를 중고로 팔기 시작했다. 더 이상 팔 물건이 없을 땐 친구의 물건을 훔쳐 팔거나 돈만 받은 후 잠적하는 사기도 치게 됐다. A 군의 부모가 점점 피폐해지는 아들의 상태를 눈치챘을 땐 이미 불법 대출에 손을 댄 후였다.
#싸고, 빠르고, 똑똑한 청소년 총판
3월 12일 경기북부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5000억 원 규모의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조직 35명을 검거하고 총책인 40대 남성 등 10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2018년 12월부터 2024년 3월 초까지 5년여 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와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 사무실을 두고 도박 사이트를 운영한 혐의를 받는다.
그런데 검거된 일당 가운데 12명이 중학생과 고등학생이었다. 스포츠 경기를 중계하는 인터넷 방송이나 SNS 등을 통해 ‘적은 돈으로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며 청소년들을 도박 사이트 홍보책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홍보책이 된 청소년들은 텔레그램 광고방을 운영하며 회원을 유치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중학생 총판 3명이 3개월 동안 유치한 회원은 500여 명, 이들 각각이 받아간 범죄 수익금은 200만 원이었다.
경찰은 국내 도박 인구를 전체 인구 대비 5.5% 수준인 237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프랑스(1.3%) 미국(1.5%) 영국(2.5%) 등 외국과 비교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도박을 처음 접하는 시기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2년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 도박 경험률은 38.8%였고, 여성가족부의 사이버 도박 진단 조사에 따르면 돈 내기 게임을 최초로 경험한 연령은 11.3세로 2020년 12.5세보다 더 낮아졌다.
경기도 소재의 중학교를 다니는 B 군은 “토토는 소위 말하는 일진들만 하는 게 아니다. 공부 잘하는 애들도 하고, 노는 애들도 한다. 사촌형 따라서 하는 친구도 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는 애도 봤다. 학원 가는 동안은 대리를 맡겨서 돈을 따기도 한다”며 “학교에서 도박하는 애들 잡는다고 하면 100명은 끌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청소년은 성인보다 도박을 할 여유자금이 많지도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에 비하면 인맥이 넓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불법 도박판의 총판으로 세워지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해 조호연 도박없는학교 대표는 “성인보다 적은 액수의 돈으로 고용할 수 있으면서도 친구들 사이에 도박이 퍼지는 속도는 빠르고, 성인보다 인터넷을 훨씬 잘 다루기 때문이다. 불법 사이트 입장에선 오히려 이들이 최고의 마케터인 셈”이라고 말했다. 도박없는학교는 청소년 도박 근절을 목표로 운영되는 시민단체다.
조 대표의 증언과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한 학교에 불법 도박이 퍼지는 경로는 다음과 같다. 학생 한 명이 불법 OTT나 불법 웹툰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도박 배너를 클릭하고 도박을 접한다. 사이트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게임머니로 돈을 딴다. 이러한 영웅담은 다음날 같은 반 친구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이트에 접속한다. 가입 절차에는 추천인의 아이디를 적으면 추가 게임머니를 주는 이벤트도 있다. 아이들은 이것을 받기 위해 홍보에 더욱 열을 올린다. 그 결과 한 도박 사이트가 학교 전체에 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이트에 접속한 기록과 게임 실적은 서버에 고스란히 남았다. 모든 걸 보고 있던 총책은 먹잇감이 어느 정도 중독되었다고 판단되면 청소년들에게 ‘총판’ 직을 제안했다. 온·오프라인에서 사이트를 홍보해 회원을 유치하면 ‘롤링’(유저가 베팅하는 금액)이나 ‘루징’(잃는 금액의 일정 부분)을 떼어주겠다는 것이다.
판돈이 필요했던 청소년들은 주변 친구들과 선후배를 꾀어 도박 사이트에 가입시켰다. 인맥이 다하면 온라인으로 장소를 옮겨 홍보를 이어 나가기도 했다. 실제로 일요신문이 만난 청소년 총책들은 텔레그램 등 SNS에서 도박 홍보방을 여러 개 운영하는 방식으로 유저를 모집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은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청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도박에 유인되는 경로는 친구·지인의 권유가 67.6%로 가장 많았고, 온라인상 도박광고(18.9%), 금전적 욕심이나 호기심(13.5%)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그 뒤를 이었다.
#“불법 사이트 돈줄 끊어내야”
청소년들의 불법 도박은 높을 확률로 2차 범죄로 이어졌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2022년 소년범의 범죄 동기 1위가 유흥·도박비 마련(26.8%)이었다. 같은 이유로 범행을 저지른 성인범(7.6%)과 비교해도 매우 높은 수치다. 이에 대해 한 고등학교 교사는 “돈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는 사례가 가장 흔한 것 같다. 가해 학생은 빌렸다고 하지만 피해 학생 입장에서는 빼앗긴 거다. 돈이 될 만한 아이패드나 고가의 자전거를 훔치거나 학생들끼리 고리대금업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그동안 내부자 제보 등을 통해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자를 색출하고 해당 사이트를 차단하는 방식의 수사를 해왔으나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경찰이 수사를 통해 불법 사이트임을 확인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접근 차단 조치를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더러 차단을 한다고 해도 운영자가 서버를 분산하거나 주소를 변경해버리면 차단이 풀리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사이트를 차단하는 것보다 이들의 계좌를 동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조호연 대표는 “총책 입장에서 가장 큰 타격은 자금줄을 막는 것”이라며 “불법 도박 사이트의 홍보 방법이 진화하고 있지만 계좌로 돈을 받는 사실 만큼은 20년째 변함이 없다. 대포 통장을 납품하는 업체에서도 한 번 계좌를 막히게 한 사이트와는 거래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한편 검찰도 온라인 불법도박, 마약거래 등 불법행위에 이용되는 예금계좌를 지급정지하는 법안도 추진 중이다. 현재는 보이스피싱 사기이용계좌에 대해서만 지급정지 제도가 도입되어 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