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인 대화’ 있어 ‘몰카 아니다’ 판단, 결국 증거 불충분…‘물뽕 사실상 처벌 불가능’ 지적 나와
#기억나지 않는 성관계
2020년 7월 17일 A 씨는 1년 가까이 사귄 남자친구와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A 씨의 생일을 기념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그날 A 씨는 그가 따라준 와인을 마신 뒤 의식을 잃었다. 피곤한 탓이려니 했던 A 씨는 그날 밤 성관계를 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보름여가 지난 7월 31일 A 씨는 카페 데이트 도중 우연히 남자친구 휴대전화에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찍은 몰카를 발견했다. A 씨는 경찰에 즉시 ‘남자친구가 몰래 사진을 찍었다’고 신고했다.
수사 초반에만 해도 A 씨는 ‘단순 몰카’인 줄 알고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남자친구의 입장을 담은 의견 진술도 경찰에서 했다. 단순히 사진 몇 장 정도만 찍힌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A 씨와 A 씨의 아버지는 남자친구 휴대전화 포렌식 결과를 받고 충격에 빠졌다. A 씨와의 성관계 동영상이 발견된 것이다. 제주도 여행 당시 2분 30초씩 5개의 촬영된 영상이 있었다. 동의 없는 명백한 몰카였다.
경찰과 검찰이 수사 결과 확인된 구매 주류와 음료는 맥주 740ml 1병, 맥주 330ml 1병, 와인 한 병과 탄산음료 2개뿐이었다. 당일 와인을 마신 이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A 씨. 평소 주량이 소주 1병 반 이상이었지만 당일 마신 것은 와인 2잔 정도에 불과했다.
몰래 촬영된 영상까지 있었기 때문에 A 씨는 ‘물뽕’을 의심했다. 남자친구가 대마 등 마약을 하자고 A 씨에게 제안한 적도 있고, A 씨의 나체가 나오게끔 한 뒤 그가 손가락으로 ‘일베’ 표식을 한 사진 등도 발견된 탓이었다.
A 씨는 큰 충격에 빠졌다. 엄청난 충격에 학업까지 중단하고 정신과 치료와 상담을 꾸준히 받아야 할 정도였다.
경찰청은 2019년 8월 ‘성폭력 근절 업무 매뉴얼’을 개정하면서 GHB를 특정,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어떤 약물이 쓰였는지 우선 파악하고 약물 투여행위를 폭행으로 판단해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를 준강간이 아닌 강간 혐의를 적용해 수사하라”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하지만 A 씨 몰래 촬영된 영상은 결국 A 씨의 남자친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경찰은 1년여 만에 ‘당시 촬영된 동영상’을 근거 삼아 무혐의 처분을 했다. 동영상에서 A 씨가 성관계에 응하는 듯한 대화를 주고받았다는 게 근거였다.
#검찰도 결국 무혐의 처분
A 씨 측이 다시 수사를 요청했지만 최근 검찰도 사건 접수 2년여 만에 무혐의 처분을 했다. 3월 18일 검찰은 강간상해,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카메라등이용촬영·반포),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촬영물등이용협박) 혐의로 수사를 받던 A 씨의 남자친구에 대해 증거 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번에도 동의 없이 촬영된 영상이 불리하게 작용했다. 검찰은 A 씨가 영상에서 남자친구와 성관계에 응하는 듯한 성적 대화를 주고받는 점을 근거 삼아 “심신상실이나 항거 불능의 상태라고 보기 어렵고 영상 촬영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몰카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영상을 토대로 당시 성관계 역시 합의하에 이뤄졌을 수 있다고 보고 강간혐의에 대해서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경찰이 2020년 9월 남자친구의 모발을 채취해 대마 등 약물 성분을 검출해 봤지만 나오지 않은 것도 A 씨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남자친구의 약물 가능성이 배제된 것이다.
A 씨 측 변호인은 검찰에 “GHB가 투여돼도 대화가 가능하고 지시에 맹목적으로 순종한다는 보도와 자료들이 있다, ‘대화를 나눴으니 약물 투여는 없었다’는 것은 경찰의 성급한 판단”이라고 주장하며 전문의들의 영상 분석 결과도 받아냈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소장(전문의)과 국립법무병원 전문의가 영상을 분석해 “영상 속에서 A 씨가 지속적인 의식저하 상태를 보이고 있어 정상적인 의사 결정이 가능해 보이지 않고 약물 복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거나 “중추신경억제제에 취해 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며 약물 의심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의 영상분석 의견서 가운데 ‘약물을 특정할 수 없다’는 부분을 근거 삼아 무혐의 판단을 내렸다. “A 씨의 주장은 추측에 불과하다”며, 증거 불충분으로 판단한 것이다.
앞으로 물뽕을 이용한 성범죄를 단죄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약물을 이용한 성범죄(DFSA)는 행동과 인지력을 고의로 상실시키기 위해 타인에게 약물을 먹인 뒤 강간 등을 저지른 범죄를 말한다. 이때 악용되는 약물인 이른바 물뽕은 GHB와 케타민, 로히프놀 등이 있는데, 대부분 무색무취로 술이나 음료에 타면 맛도 구분하기 어렵다. 복용 후 1~4시간이면 체내에서 분해돼 소변으로 배출된다. 사건 발생 직후가 아니면, 피해자의 체내에 남아있지 않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2022년, 물뽕으로 처음 기소된 사건의 경우 피해 여성이 성폭력이 발생하는 도중 의식을 차려 달아난 뒤 곧바로 경찰서를 찾은 덕분에 물뽕 관련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위 사건처럼 피해자가 범행 직후 곧바로 경찰을 찾아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이례적이라는 게 문제다.
형사 재판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물뽕 사건처럼 반나절만 지나도 약물의 흔적을 피해자나 가해자의 몸에서 찾을 수 없다면 이를 입증해야 하는 경찰이나 검찰이 ‘원치 않는 무혐의’ 판단을 할 수도 있다”면서도 “위 사건처럼 피해 여성이 꾸준히 피해를 주장했다면 한번쯤은 재판에서 ‘물뽕 사건에서 유무죄 판단을 위해 필요한 증거가 무엇인지 등 형사재판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적극적 기소를 해보는 것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