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 탓 인사 지체, 낙천·낙선자 낙하산 우려…‘한국판 플럼북’ 도입 요구 나오지만 법제화 아직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 관장 모집 주목
전남 목포시의 '국립호남권생물자원관'은 5월 29일까지 관장 공개모집 지원 절차를 진행했다. 이곳은 2020년 환경부 산하에 설립된 기관으로, 공공의 목적을 띠지만 '운영의 자율성'은 보장하는 '기타공공기관'으로 지정돼 있다. 류태철 관장이 2023년 8월 떠났어야 했으나, 후임자 인선에 실패해 임기를 마치고도 9개월 넘게 이끌고 있다.
총선 직후 진행된 공공기관장 인사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한 곳이기도 하다. 관장 임명권자인 환경부가 윤석열 대통령이 지목한 '이권 카르텔' 부처의 한 곳인 데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낙하산' 인선 사태 등으로 실형까지 선고 받은 배경이 있어서다. 이번에는 얼마나 개선된 모습을 보여줄지 이목이 쏠린다.
이곳 관장은 연봉이 약 1억 8500만 원으로 공공기관 가운데서도 낮지 않은 편이다. 2023년 7월 류 관장 후임을 뽑으려 했으나 물거품이 됐다. 당시 민간인 출신 A 인사가 2대 관장으로 취임할 수 있었는데, 허위 경력을 기재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무엇보다 정치권에서 추천했다는 소문이 번지며 분위기가 매우 뒤숭숭했다고 한다.
이번 모집에는 민간인사 포함 4명 이상이 지원했다고 전해졌다. 최종원 현 낙동강유역환경청장도 지원했다. 업계에선 최 청장 임명을 유력하게 보지만 환경부 입장에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김은경 전 장관의 낙하산 논란 트라우마가 아직 가시지 않은 탓에 자칫 '제 식구 챙기기' 혹은 '낙점 인사'로 비칠 수 있어서다.
강원 강릉 출신인 최 청장은 2023년 8월 낙동강유역환경청장에 임명돼 아직 임기를 1년도 못 채운 상황이기도 하다. 그가 임명되면 낙동강유역환경청장도 공석이 된다. 최 청장은 일요신문에 "이전부터 자원 분야에 관심이 컸기에 고민 끝에 지원을 하게 됐다"며 "그 외에는 설명드릴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총선 낙선자 '눈독' 공공기관장 90여 곳
이처럼 공공기관장 임명을 둘러싼 고민과 우려는 곳곳에서 최근 더욱 깊어지고 있다. 5월 30일 새 국회가 개원한 상황 속 그동안 총선 낙마자들이 줄줄이 공공기관장으로 왔던 흑역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현재도 정치권에서는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한 인사들이 공공기관장을 눈독 들이고 있다는 말이 파다하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의 직원들은 선제적으로 '경고'까지 던진 상태다.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은 현재 11곳의 기관장이 비어 있다. 문체부 공공기관 노동조합협의회는 최근 "정권마다 여권 총선 탈락자들을 중용해 온 보은성 '낙하산 인사'가 이번에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유인촌 문체부 장관에 전달했다.
이 협의회는 성명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공기관 낙하산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공약과 유인촌 문체부 장관의 신속한 인선 약속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면서 "기관별 모집공고의 자격요건 등 최소한의 조건만이라도 충족할 수 있는 인사가 수장으로 임명되기를 기대한다"고도 당부했다.
하지만 이 같은 메시지가 현실에 반영될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현재 기관장의 임기가 이미 지났거나 자리가 아예 비어 있는 공공기관은 약 80곳에 달한다. 2024년 6월 전에 임기가 끝나는 기관도 12곳으로 무려 90여 개 기관의 수장 자리가 상반기에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최근에는 대통령실이 공공기관장 인사를 위해 이제 막 동시다발적 인사검증에 돌입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야당의 한 관계자는 "최근 채해병 특검 등에서 총선에서 참패한 여당의 이탈표가 예상되기도 했지만 결론은 정반대가 됐다"며 "공공기관장 임명 등 아직 정부에 잘 보여야 할 요인이 반영됐다는 시각이 있다"고 설명했다.
#'알짜' 공공기관장도 매물
때마침 알짜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공공기관장 자리들이 매물로 나와 있는 상황 역시 우려를 더한다. 총 327곳의 공공기관에서 기관장 연봉이 3억 원을 넘는 곳은 13곳인데, 여기서 2개 기관이 곧 수장을 뽑아야 한다. 한국투자공사(사장 연봉 3억 8033만 원)와 국립암센터(3억 6070만 원)다.
한국투자공사의 경우 기획재정부 출신 관료들이 주로 사장을 맡아온 까닭에 이번은 어떨지 이목이 쏠린다. 다만, 현 진승호 사장이 5월 17일 임기가 끝났는데도 한국투자공사는 공모는커녕 사장후보추천위원회조차 꾸려지지 않은 상태다. 국립암센터는 기존의 '흡연자 지원 불가' 방침을 폐지해 눈길을 끈다.
정치권에서는 2024년 4월 일제히 공석이 된 한국전력공사의 5개 발전자회사 사장 자리를 특히 눈여겨보고 있다. 벌써 한국동서발전의 경우 국민의힘 소속으로 울산 동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권명호 전 의원이 하마평에 올랐다. 한국서부발전은 4선을 지낸 홍문표 전 국민의힘 의원이 자주 거론되는 분위기다.
이 밖에 한국관광공사·강원랜드·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국악방송·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산업연구원 등의 대표직도 남아 있다. 이들 역시 국회의원이나 정부 요직 등에 몸담은 인사들이 자주 사장으로 옮겨온 기관들이다. 특히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는 이백만 사장이 2024년 4월 임기를 5개월 앞두고 갑자기 관둔 탓에 후임자가 초미의 관심사다.
업계 일각에서는 낙하산이 오더라도 '문외한'만 아니면 된다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온다. 한 공공기관의 인사는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크게 패한 장면에 낙하산이 올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는 우려가 많았다"며 "현재로서는 낙하산이 오더라도 업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라도 갖춘 인물이길 바랄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갈길 먼 'K-플럼북'
공공기관장 인사 때마다 되풀이되는 문제다 보니 재발을 막으려면 아예 법제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이른바 '한국판 플럼북'이 한 예다. ‘플럼북’이란 미국 의회가 작성·발행하는 국가 주요직의 명부록으로, 낙하산 방지를 위해 대통령의 인사권이 미치는 9000여 개 자리를 일일이 명시하고 자격요건 등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제도다.
국내 도입 요구도 잇따랐으나 구호에 그쳤다. 21대 국회에서도 이성만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이 각각 '한국판 플럼북 도입' 법안을 대표 발의했지만 본회의에 상정도 안 됐다. 공교롭게도 두 의원 모두 낙천·낙선해 새 국회에서 다시 추진하는 모습은 아직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한국판 플럼북은 잠시 시행된 적이 있는 까닭에 아쉬움도 꾸준히 따라다닌다. 김판석 연세대 교수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제도비서관 등을 지내며 이를 추진한 적이 있다. 그는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인사혁신처장을 맡아 이른바 'K-플럼북' 도입을 욕심냈지만, 법제화가 되지 않는 한 한계가 뚜렷하다고 진단한다.
김 교수는 "공공기관장을 포함해 공직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직무 능력에 따라 검증하고, 인사시스템을 선진화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뤄 꽤 의지를 갖고 시도했는데 지속되지 못해 안타깝다"며 "플럼북은 계속 발간하면서 내용의 질을 높이는 등 체계화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인선 기준 등 불투명한 공공기관장 인사를 두고 혼란과 갈등이 이어지는데, 플럼북은 투명성은 물론 정부의 인사 원칙을 명확히 할 수 있고 뛰어난 후보군도 정보를 갖고 지원할 수 있다"면서 "이런 시스템을 정착하려면 법제화가 필수"라고 제언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