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해운사업 시작 후 사세 확장…‘역외탈세’ 집유 2년으로 막 내려, 현재 ‘45억 횡령’ 수사 중
애리스토틀 오나시스는 20세기 세계를 누볐던 대사업가다. 그리스 태생 오나시스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뒤 해운업에 손을 댔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을 거점 삼아 여러 유조선을 보유한 세계적인 선박왕으로 거듭났다. 한국 해운업계에도 오나시스와 비교되는 인물이 있다. ‘한강의 기적’과 함께 성장한 선박왕 권혁 회장이다. 업계에선 그가 가진 선단이 이순신 장군 함대 이후 가장 파워가 세다는 말도 나돌 정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대한 성공신화를 이뤄낸 권 회장은 2011년 국세청 ‘역외 탈세 추적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국세청이 조세회피처에 거주하는 것처럼 위장해 세금을 탈루한 혐의를 받는 이들을 대거 고발했는데, 최대 규모 추징 대상자가 권 회장이었다. 국세청이 매긴 권 회장 추징금은 4101억 원이었다. ‘선박왕’을 둘러싼 대형 탈세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국세청은 검찰에 권 회장을 고발했다. 권 회장은 횡령, 저축 관련 부당행위, 조세처벌법위반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2013년 2월 1심 재판서 권 회장은 징역 4년, 벌금 2340억 원(종합소득세 1672억 원, 법인세 582억 원)을 선고받으며 법정구속됐다. 권 회장은 항소했고, 항소심에서 기사회생했다. 시도그룹 핵심 해상운송업체인 시도카캐리어서비스(CCCS)를 둘러싼 법인세 포탈 혐의를 무죄로 뒤집었다.
항소심 선고로 권 회장은 법인세 포탈 혐의를 제외한 종합소득세 2억 4000여만 원 포탈 혐의에서만 유죄를 받았다. 형량은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으로 대폭 줄었다. 유죄로 인정된 부분은 선박 중개업자 명의 해외 계좌에 입금해 관리한 중개수수료 및 배당소득 7억 원에 대한 부분이었다. 2016년 2월 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인용했고, 권 회장의 역외탈세 혐의 관련 주요 재판은 막을 내렸다.
일요신문은 권 회장 역외탈세 스캔들 주요 분기점이 된 항소심 판결문을 단독 입수했다. 판결문엔 ‘선박왕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판결문에 정리된 ‘인정사실’ 항목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권 회장 주요 행보가 명시돼 있다. 다음은 이를 요약한 내용이다.
권 회장은 6·25 전쟁 발발 나흘 뒤인 1950년 6월 29일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고, 1977년경 현대자동차에 입사해 자동차사업부에 근무했다. 1980년 9월 김 아무개 씨와 결혼한 권 회장은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현대자동차에서의 경력은 권 회장이 ‘선박왕’으로 거듭나는 주춧돌이 됐다. 권 회장은 현대차와 기아차 등 수출용 국산 자동차 해외 운송을 주목적으로 해상 운송사업을 시작했다. 권 회장은 1990년경 본격적으로 해운사업을 준비했다. 부산에서 동업자 양 아무개 씨와 함께 시도물산을 설립해 공동대표이사직을 유지했다.
일본을 거점으로 한 해운사업 준비도 1990년경에 진행됐다. 1993년 일본 도쿄 신바시에 시도해운(현재 시도쉬핑 재팬)을 설립했다. 권 회장은 일본에서 중고자동차선을 확보해 선주사업을 했다. 그 뒤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업을 확장했다. 선박 관리업무를 일본 회사에 위탁하지 않고 직접 수행하기 위해 1995년 부산에 시도상선을 설립했다.
사세는 빠른 속도로 확장됐다. 권 회장은 2004년 시도쉬핑 한국영업소, 유도해운, 2009년 시도항공여행사 등 기업을 각각 설립 및 인수했다. 2005년 12월까지 이 기업들을 대표이사 자격으로 운영했다. 시도상선은 1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는 기업체로 성장했다. 2005년 12월 이후부터 권 회장은 ‘회장’ 직함을 단 사실상 대표로서 회사를 운영했다.
권 회장은 국산차 해외 운송을 주목적으로 해상운송사업을 시작하면서 또 다른 구상에 돌입했다. 조세피난처에 회사를 세운 뒤 국내 회사에 업무를 위탁하는 방식을 설계했다. 해외에 거점을 둔 시도그룹 주요 계열사 및 단선회사(선박 SPC) 등 권 회장이 사실상 100% 지배하는 법인들 명의로 복수 국내 금융기관에 10여 개 계좌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판결문에 적시된 권 회장의 일대기다.
권 회장의 이런 구상은 2011년 그가 초대형 역외탈세 스캔들 중심에 서게 되는 단초가 됐다. 권 회장을 둘러싼 역외 탈세 혐의 핵심 쟁점은 권 회장이 국내 실거주자에 해당이 되는지 여부와 해외 거점 시도그룹 계열사로부터 소득을 얻었는지 여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실상 권 회장 손을 들어줬다.
판결문에 따르면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 권혁이 포탈한 세액이 아주 많다고 보이지는 않다”면서 “피고인 권혁이 이 법원에 이르러 미화 2000만 달러 상당 종합소득세를 납부한 점, 피고인 권혁이 자신과 피고인 CCCS에 부과된 조세에 관한 법률적 판단이 확정되면 이를 납부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는 점, 벌금형 처벌 외 별 다른 범행 전력이 없는 점 등 제반사정을 종합해 형을 정한다”고 판단했다. 2016년 2월 대법원에서도 항소심 선고를 인용했다.
그러나 권 회장 법정공방은 끝나지 않았다. 권 회장이 세무 당국을 상대로 낸 종합소득세 및 지방소득세 취소 행정소송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권 회장은 “2006~2010년 종합소득세, 지방소득세 3051억 원을 취소하라”고 소송을 제기했고, 2013년 원심과 2014년 항소심에선 이 가운데 988억 원을 취소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2016년 4월 대법원은 일부 종합소득세액을 다시 계산하라는 취지로 해당 건을 파기환송했다.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2024년 기준 해당 건은 서울고등법원을 거쳐 다시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6월 권 회장은 서초경찰서로부터 45억 원 규모 횡령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상태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