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 카피 의혹 해명 과정에서 블랙핑크 등 언급해 역효과…민희진에 반감 강했던 BTS 팬덤마저 등 돌려
연예기획사 하이브(HYBE) 산하 레이블이자 신인 걸그룹 아일릿(ILLIT)의 소속사 빌리프랩(BELIFT LAB)의 '야심찬 해명 영상'을 본 연예 관계자들의 반응을 종합해 정리하면 이 문장 하나로 끝낼 수 있다. 또 다른 산하 레이블 어도어(ADOR)의 민희진 대표에 대한 민사소송 예고와 함께 그가 주장한 아일릿과 어도어 소속 걸그룹 뉴진스(New Jeans)간 각종 표절 및 유사성 논란을 반박하겠다는 의도 자체는 좋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업계 금기 중 하나로 꼽히는 '타 아이돌 끌어들이기'까지 이뤄지면서 국내는 물론 해외 K팝 팬덤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됐다. 명명백백히 밝히겠다는 의혹들도 시원하게 해소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안 하느니만 못한' 해명으로 회복 못할 타격을 자진해서 입은 셈이다.
6월 10일 빌리프랩은 유튜브 채널 '빌리프랩 어나운스먼트'를 통해 '표절 주장에 대한 빌리프랩의 입장'이란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약 28분 분량의 이 영상에는 "아일릿과 빌리프랩, 하이브가 뉴진스의 데뷔 전 행보부터 이후 활동까지의 전반적인 포뮬러(공식)를 모방했다"는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주장에 대한 빌리프랩의 반박과 근거 자료 등이 담겼다. 민 대표가 뉴진스와 그 브랜드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아 하이브를 들이받았던 것처럼 빌리프랩 역시 '짭진스'(가짜+뉴진스)라는 오명이 붙은 아일릿을 지키기 위해 소속사로서의 의무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영상을 본 대중들의 반응은 빌리프랩이 원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민 대표의 표절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우리가 표절이라면 이들도 표절"이라며 근거로 다른 아이돌 그룹을 이용한 데다, 일부 주장 및 근거자료는 뉴진스 악성 안티들이 모인 커뮤니티로 알려진 디시인사이드의 한 갤러리에서부터 나온 사실이 지적됐다. 게다가 자신들의 주장에 짜맞추기 위해 일부 자료들을 의도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발견됐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특히 이 영상에 '이용된' 다른 아이돌 그룹의 국내외 팬덤이 크게 공분하면서 그나마 K팝 팬덤 내에 아일릿에 한해서만큼은 남아있던 최소한의 동정 여론까지 무너졌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영상은 공개 이틀 만인 6월 12일 오후 기준 조회수 89만 회, 댓글 4만 5000여 개를 기록했으며 이를 시청한 이용자들이 '싫어요'를 누른 비율은 무려 92%(11만)를 넘어섰다. 그만큼 국내외를 막론한 K팝 팬덤으로부터 매우 큰 반감을 사고 있다는 이야기다.
빌리프랩은 이 영상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걸그룹 여자친구, 엔믹스, 트리플에스, 라붐, 프리스틴, 다이아, 블랙핑크, 아이즈원, 아이브, 오마이걸, 르세라핌과 가수 선미, 보이그룹 엔하이픈 등을 근거로 들었다. 이들의 안무 일부가 뉴진스의 안무와 유사한 부분이 있고, 민 대표가 아일릿의 카피 의혹을 제기했던 뉴진스의 한복이나 긴 생머리의 청순한 콘셉트를 먼저 선보인 적이 있으며, 콘셉트 포토나 뮤직비디오의 일부 유사한 장면들도 뉴진스보다 먼저 촬영해 공개했다는 게 빌리프랩의 주장이다. 아일릿이 뉴진스를 카피한 것이라면 뉴진스 역시 같은 논리로 다른 그룹의 카피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각 그룹의 팬덤은 "뉴진스가 따라했다고 전혀 생각해본 적 없다. 왜 가만히 있는 다른 아티스트들을 상관 없는 문제에 강제로 끼워넣어 자신들의 방패막이로 쓰냐"며 빌리프랩의 주장을 곧바로 반박했다. 애초에 아일릿의 뉴진스 카피 의혹이 일었던 것은 △데뷔 전 명품 브랜드 행사에 먼저 참석한 파격 행보 △멤버 전원이 긴 생머리의 청순한 이미지를 내세운 그룹 △고궁에서 촬영한 전원 파스텔 톤의 한복 착장 콘셉트 포토와 그 구성 △공식 활동 전후의 전반적인 톤 앤 매너 유사성 등이 종합됐던 탓이었다. 모든 유사성이 뉴진스라는 단일 그룹에서 발견됐기에 일어난 카피 의혹을 타 그룹에서 하나씩 근거를 가져와 반박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게 각 그룹 팬덤의 주장이다.
해외 K팝 팬덤의 반응도 전에 없이 싸늘하다. 엔터사의 공식 해명 영상임에도 영어 자막을 제공하지 않았으나 영상이 올라오자마자 팬들이 자체적으로 번역, 제작한 자막이 X(옛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와 해외 K팝 커뮤니티를 통해 빠르게 퍼지면서 국내와 비슷하게 빌리프랩을 향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해외 팬들은 "한국어를 잘 못하지만 이 영상이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영상이라는 건 알겠다" "이대로라면 빌리프랩은 민희진이 아니라 대중과 싸우게 되는 셈이고 그 결과는 아티스트만 겪게 될 것이다. 바보" "영상을 볼수록 뉴진스가 아일릿의 청사진이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더 웃긴 건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내용을 나란히 놓고 보면 똑같아 보인다"며 빌리프랩을 비판했다.
이 가운데 민희진 대표에게 아일릿의 팬덤만큼이나 극렬한 반감을 드러내 왔던 하이브 소속 방탄소년단(BTS)의 팬덤 아미(ARMY)마저도 "빌리프랩과 민희진의 문제에 방탄소년단을 엮지 마라"며 빌리프랩에 불쾌함을 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빌리프랩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열린 '2024 코리아 온 스테이지' 무대에 한복을 입고 오른 뉴진스를 저격하며 "방탄소년단이 앞서 경복궁에서 가졌던 공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나"고 언급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해당 공연이 국가유산청(구 문화재청)과 KBS의 제작으로 이뤄진 것이라 어도어나 뉴진스의 자의적인 레퍼런스 참고가 있을 수 없는데도 아미에게 이들을 공격할 빌미를 던져주기 위해 그릇된 예시를 든 것이란 의혹이 제기됐다. 이를 본 해외 아미들은 "아미는 이번 사태에 어떤 이유로든 절대 관여하지 않겠다"며 한발 물러서는 입장을 택했다. 결국 그나마 남아있던 편마저 자신의 손으로 잃게 된 셈이다.
사실상 아일릿의 팬덤을 제외하면 국내외 K팝 팬덤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것이나 다름 없는 결과를 맞이한 빌리프랩의 현 사태를 두고 가요계 관계자들도 "황당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연예계 역사를 되짚어 보더라도 소속사가 나서서 이런 최악의 대처를 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엔터사 홍보팀 관계자는 "해명을 위해 타 소속사 아티스트들의 사진을 멋대로 이용하고 심지어 자신들의 주장에 맞게끔 일부 보정한 것도 보이는데 과연 해당 소속사에서 이를 허가한 것인지 의문"이라며 "내부적으로 타 아티스트와 비교하고 라이벌 화(化)해서 기획 경쟁하는 일은 비일비재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기 논란을 진화시키겠다고 '우리가 표절이라면 여기도 표절'이라는 식으로 들고 나오는 건 상도덕적으로도 맞지 않다. 만일 영상 제작 전 타 소속사에 직접 사진 이용을 요청했다면 아무도 허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가요계 관계자 역시 "논란이 불거졌을 때 엔터업계의 정석은 '마이 웨이'여야 한다. 소속사는 법적 대응을 하고, 아티스트는 본업에 집중하면서 이후 대중들의 여론이 조금 잠잠해졌을 때 재판 결과로 이야기하면 끝나는 일"이라며 "이 사태도 빌리프랩이 굳이 다른 아티스트를 내세운 '물귀신 작전'을 할 게 아니라 민 대표나 악플러에 대해 고소는 고소대로 하고, 아일릿은 지금은 괴롭겠지만 다음 활동을 위해 준비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최소한 해외에서 아일릿에 대한 동정 여론은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현 K팝 업계에서 신인 그룹이 해외 시장을 잃게 된다는 것은 굉장히 뼈 아픈 손해다. 아일릿은 노래 '마그네틱'으로 큰 인기를 얻긴 했지만 가창력이나 퍼포먼스가 약해 본격적인 콘서트는 많이 이르고, 그나마 팬미팅 같은 팬덤 위주 행사나 K팝을 좋아하는 외국인을 위한 공연 등이 주력이 돼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한 축을 이미 잃고 시작하게 된 것"이라며 "아일릿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크다 보니 소속사로서는 아티스트 보호 차원에서 나선 것이라 볼 수 있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된 데엔 해당 영상에 출연한 임직원 중 과연 누가 책임을 질 것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빌리프랩은 5월 22일 민희진 어도어 대표를 업무방해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6월 10일 민 대표에 대한 민사소송을 추가로 제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빌리프랩 측은 "K팝 역사에 남을 놀라운 데뷔 성과를 만들고도 그동안 멍에를 짊어지고 숨죽여 온 아티스트와 빌리프랩 구성원, 참여 크리에이터들의 피해에 대해 민 대표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해명 영상에 달린 수많은 비판 댓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