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투자자 보상 길 열려, 한국 형사재판 1심만 수년 예상…“국내 사법체계 개선해야” 지적도
암호화폐 테라·루나 발행사 테라폼랩스와 권도형 씨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환수금과 벌금 약 6조 3273억 원(45억 5382만 달러)을 내기로 합의한 서류를 지난 6월 12일(현지시각) 미국 법원에 제출했다. 이 중 권 씨 개인에게 부과된 환수금 및 벌금은 총 2849억 원(2억 432만 달러)이다.
합의는 SEC가 테라폼랩스와 권 씨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이뤄졌다. 미국 뉴욕 검찰이 권 씨를 사기 등 혐의로 기소한 형사소송과는 별개다. 민사소송 재판부는 2023년 12월 암호화폐 루나는 증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지난 4월 민사소송 배심원단은 테라폼랩스와 권 씨가 루나 등을 발행하는 과정에서 투자자들을 속인 책임이 있다고 평결했다.
테라폼랩스가 환수금과 벌금 전액을 실제로 낼지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테라폼랩스는 지난 1월부터 미국에서 파산보호 절차를 진행 중이다. 미국 파산보호는 국내 회생 절차와 비슷하다. 테라폼랩스는 지난 4월 30일 미국 델라웨어주 파산법원에 자산총액 약 5975억 원(4억 3007만 달러), 부채총액 약 6265억 원(4억 5092만 달러) 상태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테라폼랩스가 파산보호 신청 전 다른 곳으로 자산을 미리 옮겨놓았다는 의심이 제기됐다. 테라폼랩스가 법률 자문 비용으로 수천억 원을 지출한 점도 논란거리였다. 테라폼랩스는 지난 2월 파산법원에 제출한 서류에서 세계 최대 로펌 중 하나인 덴톤스(Dentons)에 1년간 약 2313억 원(1억 6599만 달러)을 송금했다고 밝혔다. 덴톤스는 SEC와의 소송에서 테라폼랩스와 권도형 씨 변호를 맡았다.
덴톤스가 테라폼랩스로부터 받은 돈은 또 다른 로펌으로 전달되기도 했다. 덴톤스가 테라폼랩스 파산보호 신청 전 90일간 지출한 금액은 약 444억 원(3187만 달러)이었다. 지출 내역을 보면 김앤장 법률사무소는 지난 1월 10일과 19일 총 139억 원(1000만 달러)을 받았다. 김앤장은 루나가 폭락한 2022년 5월 전후로 테라폼랩스로부터 90억 원을 넘게 송금받아 논란이 됐었다. 김앤장은 국내에서 테라폼랩스 직원들 변론을 맡고 있다.
몬테네그로에서 권도형 씨 변호를 맡은 고란 로디치 변호사 사무실로는 5차례에 걸쳐 약 15억 원(112만 달러)이 송금됐다. 권 씨는 해외 도피를 하다가 2023년 3월 몬테네그로에서 현지 경찰에게 붙잡혔다. 이후 권 씨는 자신 송환국과 관련한 몬테네그로 법원 결정에 여러 차례 항소하며 법적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SEC는 권 씨에게 부과한 환수금 및 벌금 2849억 원(2억 432만 달러) 확보 방안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SEC와 권 씨 합의서에는 스위스 시그넘 은행 계좌에서 230만 달러, 권 씨가 2021년 5월 취득한 PYTH 토큰, 테라폼랩스 지원 재단 '루나파운데이션가드(LFG)' 소유 모든 가상자산 등 권 씨가 내야 할 자산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다. 반면 SEC와 테라폼랩스 합의서엔 환수금 및 벌금 확보 방안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 않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루나 사태 재판이 훨씬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검찰은 루나 폭락 사태 핵심 인물인 권도형 씨 신병을 여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검찰은 권 씨와 테라폼랩스를 공동창업했던 신현성 씨 등 8명을 2023년 4월 먼저 기소했다. 뒤이어 테라폼랩스 최고재무책임자(CFO) 한창준 씨를 지난 2월 기소했다. 한 씨는 권 씨와 함께 해외 도피를 하다가 몬테네그로에서 붙잡힌 뒤 지난 2월 국내 송환됐다. 한 씨에 대한 재판은 지난 4월 신 씨 등 8명에 대한 재판에 병합됐다.
신 씨, 한 씨 등에 대한 형사 재판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검찰은 테라·루나 폭락 사태를 수사하면서 200명에 가까운 참고인 진술조서를 작성했다. 신 씨, 한 씨 등 피고인들은 사기 등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200명에 가까운 증인을 일일이 법정에 불러 증인 신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증인 신문은 지난 2월 5일 시작됐다. 하지만 6월 24일까지 4개월여 동안 고작 5명에 대한 증인 신문이 이뤄졌다. 증인들의 불출석이 이어진 탓이었다. 불출석으로 과태료 처분을 받은 증인이 벌써 3명이다. 검찰은 "증인들이 소환 통보를 받으면 질병 등을 주장한다. (증언에)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며 "다른 오해가 있을까 봐 증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앞으로 소환에 관해서는 연락을 취해야 할 것 같다"고 지난 6월 10일 공판에서 말했다.
공판기일 간격 조정으로 재판 기간이 더 늘어날 가능성도 생겼다. 재판부는 지난 6월 24일 공판에서 "저희 재판부에 사건이 원래 많았다. 격주로 하기는 힘들다. 많이 하면 3주에 한 번 하는 걸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현재 2주에 한 번 열리는 신 씨, 한 씨 등에 대한 재판이 오는 8월부터는 3주에 한 번 열린다.
미국 재판 결과가 국내 재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검찰은 미국에서 암호화폐 증권성을 인정한 판결문을 2023년 8월 증거로 신청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지난 6월 10일 공판기일에서 미국 판결문을 증거로 채택하기 어렵다는 의사를 나타냈다. 재판부는 "미국 판결이 예전부터 있었고 피고인들이 그걸 검토해서 (테라·루나) 사업 계획을 구상했다면 증거일 것 같은데 미국에서 비슷한 거(암호화폐)에 대해 증권이라고 했다는 의견 제시 형태라면 증거가 맞는지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루나 폭락 사태 이후 권도형 씨 등을 사기 등 혐의로 고소한 A 씨는 "답답한 마음이다. 한국 정부, 검찰은 뭘 하고 있는지 안타깝다. 미국은 SEC가 나서는데 우리나라는 책임지는 곳이 없다"며 "이번을 계기로 사법 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지난 6월 26일 일요신문에 주장했다.
남경식 기자 ng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