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트 9이닝 퍼펙트 기록에도 팀이 9회까지 점수 못 내 무산…정민철 ‘무사사구 노히트노런’ 진기록
그날의 선발 투수가 퍼펙트게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면, 더그아웃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감독도, 코치도, 동료도 그 투수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꼭 해내라"는 격려조차 금기시된다. 투수가 최고의 집중력과 최대의 능력을 끌어 모아 최선의 흐름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이라는 단어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투수 개인의 능력과 수비의 도움 외에도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 필요하다. 제아무리 훌륭한 투수라도, 하늘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해낼 순 없다.
그래서일까. 한국보다 프로야구 역사가 훨씬 긴 메이저리그(MLB)와 일본 프로야구(NPB)에서도 퍼펙트게임은 아주 귀한 기록이다. 1876년 시작된 MLB에서 148년간 24번, 1936년 출범한 NPB에서 88년간 16번만 나왔다. 올해로 43년째를 맞은 KBO리그에선 아직 퍼펙트게임이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수많은 투수가 퍼펙트게임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LG 트윈스 외국인 투수 케이시 켈리(35)도 그랬다. 지난 6월 25일 잠실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역대 최초의 퍼펙트게임 문턱까지 갔다가 아쉽게 돌아섰다.
#켈리, 9회 첫 타자에게 그만…
켈리는 이날 8회까지 단 한 타자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고 삼성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그러나 퍼펙트게임의 위업까지 아웃카운트 3개를 남겨뒀던 9회 초, 삼성 선두 타자 윤정빈에게 2구째 시속 134㎞짜리 체인지업을 던지다 중전 안타를 허용했다. 켈리는 머리를 감싸며 주저앉았고, 포수 박동원은 무릎을 꿇은 채 아쉬워했다. 관중석과 LG 벤치에서도 탄식이 쏟아졌다.
그래도 켈리는 이내 평상심을 되찾고 1루 쪽을 향해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또 자신을 위로하러 마운드로 올라온 박동원을 미소 지으며 안아줬다. 관중들도 켈리의 이름을 연호하며 우렁찬 격려를 보냈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은 켈리는 다음 타자 강민호를 병살타로 솎아낸 뒤 마지막 하나 남은 아웃카운트까지 무사히 잡아내며 경기를 마쳤다. 켈리의 최종 성적은 9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퍼펙트게임 대신 '1피안타 완봉승'으로 에이스의 부활을 알렸다.
켈리는 "9회 마운드에 올라갔을 땐 집중하려고 노력했는데 상대 타자가 체인지업을 잘 공략했다. 경기 중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라며 "박동원이 곧바로 다가와 '퍼펙트게임 문전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멋진 일'이라고 말해줬다. 그 말에 힘을 얻어서 더는 무너지지 않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 "1루 쪽을 향한 인사는 퍼펙트게임을 엄청나게 기대하며 열렬히 응원해준 팬들을 향한 것이었다. 안타를 친 윤정빈에게 인사하는 의미도 있었다"라며 웃었다.
켈리는 이 경기 전까지 15경기에서 3승 7패, 평균자책점 5.13으로 부진했다. 2019년부터 LG와 함께하며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지난달부터 퇴출 후보로 거론됐다. 이날은 달랐다. 완벽에 가까운 피칭으로 모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그는 경기 후 중계방송사와 인터뷰를 하다 끝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한결같이 응원해주는 팬들에게 감사드린다. 지금도 관중석을 떠나지 않고 응원해주시는 모습에 가슴이 북받친다"며 "이 경기는 먼 미래에도 잊지 못할 거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등판에 이어 내 야구인생 두 번째로 특별했던 경기였다"고 털어놨다. 염경엽 LG 감독도 "켈리가 한국 최초로 퍼펙트 경기를 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체인지업 실투 하나가 굉장히 안타깝지만, 오랜만에 켈리다운 피칭을 해줬다"며 "이 경기를 계기로 켈리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고 했다.
염 감독은 이튿날 켈리가 퍼펙트게임에 도전하던 순간의 더그아웃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하기도 했다. "켈리가 5회까지 퍼펙트로 끝낸 뒤부터는 나도 모르게 매 이닝 내 루틴을 똑같이 반복했다. 점점 선수들도 다들 평소 안 하던 엉뚱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루틴을 지키고 있더라"며 "7회부터는 모든 코치와 선수, 프런트가 자기가 앉거나 서 있던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9회도 다들 조용하게 시작했는데, 켈리가 안타를 맞자마자 모두 '아!' 하고 외쳤다"고 귀띔했다. 또 "느낌상 진짜 퍼펙트게임이 나올 것 같은 날이었다. 나도 삼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대기록을 보나 싶어 기대가 컸다"며 "상대가 집중력이 떨어질 수 있게 점수가 조금 더 났어야 했는데 (4점 차라) 아쉬웠다"고 덧붙였다.
#'완벽한 9이닝'으로 끝난 폰트
퍼펙트게임에 가깝게 다가갔지만, 한끝 차로 아쉬움을 삼켜야 했던 투수들도 있다. SSG 랜더스 외국인 투수였던 윌머 폰트는 2022년 4월 2일 창원 NC파크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의 정규시즌 개막전에 선발 등판해 9이닝 동안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으로 역투했다. 이날 NC 타자를 27차례 상대하는 동안 단 한 명도 1루를 밟지 못했고, 1회부터 9회까지 모두 삼자범퇴였다. 유일한 위기가 있었다면, 1회 첫 타자 박건우와 승부. 한가운데 담장 바로 앞까지 날아가는 큼직한 장타성 타구를 맞았다. 그러나 발도 빠르고 수비 범위도 넓은 SSG 중견수 최지훈이 펜스에 부딪히면서 공을 잡아냈다. 새 시즌의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수비의 도움으로 잡아낸 폰트는 이후 일사천리로 NC 타자들을 무너뜨렸다. 심지어 9회 2사 후 대타로 나온 마지막 타자 정진기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시속 150km 강속구를 던졌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해낸 '완벽한' 투구였다.
문제는 SSG 타선이 9회까지 단 1점도 뽑지 못했다는 거다. 한 투수의 퍼펙트게임 요건이 성립하려면 경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책임져야 하는데 SSG는 9회 초 공격에서도 점수를 내지 못해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폰트의 9이닝 투구 수는 104개. 평범한 경기였다면 고민 없이 불펜에 마운드를 넘기고 내려왔겠지만, 역사적인 퍼펙트 행진이 이어지던 상황이라 누구도 투수 교체 여부를 쉽게 판단하지 못했다.
김원형 당시 SSG 감독은 결국 고심 끝에 폰트를 마운드에서 내리기로 결정했다. 9회가 끝난 뒤 폰트에게 다가가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고 권유했고, 폰트는 큰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 감독은 이와 관련해 "폰트는 원래 90~95구를 던지기로 계획했다. 사실 9회에도 올라가면 안 되는 거였는데, 워낙 잘 던져서 예정보다 10구 정도 더 소화한 것"이라며 "그것만으로도 이미 폰트가 무리한 거다. 아무리 중요한 순간이어도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경기가 시즌 첫 등판이라는 점도 폰트를 연장 10회에 올리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144경기 레이스를 막 시작한 상황에서 외국인 에이스가 첫 경기부터 '급발진'을 하면 팀이 감수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폰트가 이미 4~5경기를 뛰고 어느 정도 몸이 올라왔다면 도전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직전 시즌 투수 파트에서 부상자가 많이 나와 고생했던 걸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며 "대기록을 보고 싶었던 팬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내가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라 생각하고 판단했다"는 소신을 밝혔다.
폰트는 그렇게 'KBO리그 역대 첫 퍼펙트게임'이라는 이정표를 포기하고 '사상 최초의 정규이닝 퍼펙트 투구'라는 비공인 발자취를 남긴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는 경기 후 "팀이 이겨서 충분히 만족한다. 9회까지 점수를 못 낸 건 전혀 아쉽지 않고, 오히려 모두 좋은 수비를 보여준 것에 고맙다"고 야수들에게 공을 돌렸다. 또 "투구 수가 이미 많아져서 기록을 위한 연장 10회 등판을 욕심내지는 않았다. 마음은 올라가고 싶었지만, 몸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시즌 첫 등판이었고,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에서 투구 수 100개를 한 번도 넘긴 적이 없는 상황이었다. 부상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SSG는 이날 연장 10회 초 4점을 뽑아 뒤늦게 리드를 잡은 뒤 10회 말 불펜 김택형을 기용해 4-0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김택형이 2사 후 NC 손아섭에게 볼넷을 내줘 팀 퍼펙트게임도 무산됐지만, 실점 없이 경기를 끝내 팀 노히트노런은 완성했다.
#정민철의 완벽에 가까운 노히터
한화 이글스 정민철이 1997년 5월 23일 대전 OB(현 두산) 베어스전에서 달성한 '무4사구 노히트노런'은 역대 가장 퍼펙트게임에 근접했던 경기로 꼽힌다. 7회까지 OB 타자가 단 한 명도 출루하지 못한 상황에서 8회 정민철이 다시 마운드에 오르자 야구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민철은 훗날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공이 제발 자신에게 오지 않기를 바라는 야수들의 간절함과 부담감이 등 뒤로 전해져 왔다"고 했다.
정민철은 8회 첫 타자를 무사히 잡아낸 뒤 다음 타자 심정수와 맞섰다. 볼카운트 1B-2S에서 심정수가 헛스윙을 했다. 삼진이었다. 다만 정민철이 던진 공이 포수 사인과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게 변수였다. 바깥쪽 공을 기다리던 포수 강인권은 몸쪽 높은 코스로 공이 오자 급히 미트 위치를 바꿨다. 공은 그 미트에 맞고 백스톱까지 굴러갔다. 그사이 심정수는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1루를 밟았다. 안타와 볼넷은 없었지만 타자 주자가 진루에 성공하면서 퍼펙트게임이 깨진 것이다.
정민철은 그 후 남은 아웃카운트 5개를 추가 출루 없이 잡아냈다. 8회 중견수 대수비로 투입된 전상열이 9회 1사 후 이종민의 안타성 타구를 슬라이딩 캐치해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28명의 타자를 상대로 완성된, 역대 가장 '완벽한' 노히트노런이었다.
#9회 1사에 안타 맞은 리오스
두산 외국인 투수였던 다니엘 리오스는 퍼펙트게임까지 두 걸음을 남기고 아쉽게 뒤돌아선 전력이 있다. 그는 2007년 10월 3일 잠실 현대 유니콘스전에서 9회 1사까지 안타와 4사구를 한 개도 내주지 않고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8회까지만 해도 자칫 '설레발'로 일을 그르칠까 숨죽이고 있던 두산 관계자들은 서서히 에이스의 대기록 축하 팡파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리오스는 퍼펙트게임까지 아웃카운트 두 개만 남긴 상황에서 현대 8번 타자로 나선 포수 강귀태에게 통한의 좌전 안타를 내줬다. 두산 벤치는 즉시 리오스를 더그아웃으로 불러들였고, 뒤 이어 등판한 마무리 투수 정재훈이 강귀태의 득점을 허용하면서 리오스의 최종 성적은 8과 3분의 1이닝 1피안타 무4사구 1실점으로 기록됐다.
리오스는 이와 관련해 "경기 전부터 컨디션이 매우 좋아서 직구 위주로 공격적으로 던지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다. 1회에 현대 타자들이 직구를 잘 못 치는 모습을 보고 2~3회부터는 사실 퍼펙트게임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며 "한국에서 퍼펙트게임이 아직 안 나왔다는 건 마운드를 내려올 때까지 몰랐다. 나 역시 프로에 와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기록을 달성하고 싶었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그는 또 "투아웃을 남기고 깨진 건, 야구하면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주자가 1루에 나가는 모습을 보고 곧바로 '다음 타자는 병살타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안타 1개만 맞은 경기를 아쉬워 할 투수는 없다. 좋은 경험을 했다"고 담담한 소감을 남겼다.
강귀태는 이날 리오스의 초구에 기습번트를 시도하는 등 사상 첫 퍼펙트게임 희생양의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경기 중엔 데뷔 후 처음으로 당시 화제성의 척도였던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고, 경기 후엔 지인들의 축하 및 비난(?) 전화를 수십 통 받았다는 후문이다. 강귀태는 또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 소속이던 2010시즌엔 한화 류현진(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23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 기록을 중단하는 안타를 때려내 '레코드 브레이커'라는 뜻밖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물론 이날 강귀태의 안타가 가장 반가웠을 사람은 따로 있다. 당시 9번 타자로 대기하고 있었던 황재균(현 KT 위즈)이다. 만약 강귀태마저 범타로 물러났다면, 황재균은 9회 2사 후 퍼펙트게임 달성 여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타자로 타석에 들어설 운명이었다. 황재균은 "내 타석이 오면 초구 직구에 승부를 걸겠다는 생각으로 기다렸다"며 "귀태 형이 안타를 못 쳐도 내가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사라져) 아쉽다"며 짐짓 웃어 보이기도 했다.
올해 한화로 돌아온 류현진은 LA 다저스 시절이던 2014년 5월 27일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빅리그 역대 24번째 퍼펙트게임의 주인공에 도전한 경험이 있다. 당시 MLB 2년 차 투수였던 그는 홈구장 다저스타디움 마운드에서 7회까지 퍼펙트 행진을 이어갔지만, 8회 선두타자 토드 프레이저에게 좌월 2루타를 내줘 아쉬움을 삼켰다. 퍼펙트게임과 노히트노런이 동시에 무산된 순간이었다.
일본인 투수인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도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고 있던 2013년 4월 3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전에서 첫 26타자를 연속 범타 처리해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9회 2사 후 만난 마르빈 곤살레스에게 통한의 중전 안타를 맞아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을 채우지 못했다. MLB에서 퍼펙트게임을 해낸 아시아 출신 투수는 아직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