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지배 승자전 결승서 2위 김은지 제압…최근 잇단 부진 털고 타이틀전 직행
여자랭킹 1위와 2위의 맞대결로 눈길을 끌었던 이날 대국에선 최정의 공격바둑이 빛을 발했다. 초반 좋지 않은 흐름이었던 최정은 중반 중앙에서 끊는 강수를 들고 나오며 형세를 반전시켰다. 마지막 승부처였던 우변 전투에서 김은지에게도 기회는 있었으나, 초읽기에 쫓겨 정확한 수순을 밟지 못했다.
최정과 김은지의 대결이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것은 직전 중국에서 열렸던 황룡사배에서 최정이 1승 6패, 최악의 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8명 중 8위. ‘바둑여제’로 불리며 세계 여자바둑을 호령해 온 최정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성적표였고, 최정을 쫓는 추격자들은 이때다 싶게 철저히 물어뜯었다. 황룡사배 우승은 그동안 한 수 아래로 여겼던 중국 저우훙위(6승 1패)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와 맞은 국내 2인자 김은지와의 대국. 만약 여기서도 밀린다면 ‘최정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기에 더욱 중요했다.
최정과 김은지는 그동안 17번 대국을 벌여 최정이 김은지에게 13승 4패로 앞서고 있었지만, 가장 최근의 대결이었던 2023년 12월의 여자기성전 결승3번기에서는 1승 2패로 김은지에게 정상의 일각을 허용한 바 있다.
최정은 이번 대국의 중요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듯 대국이 끝나고 가진 인터뷰에서 “상대 돌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고 수읽기에만 집중했다”면서 “중앙을 끊어가면서 굉장히 복잡해졌지만 제가 유리한 흐름이라고 판단했다”고 되돌아봤다. 이어 그는 “최근 며칠간 시합이 없어서 이 대국만 열심히 준비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뒀다”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바둑을 지켜본 이현욱 프로는 “우리가 알고 있던 최정 9단이 돌아왔다”면서 “수읽기가 강한 김은지 9단을 상대로 전투바둑으로 이끌어 수읽기로 제압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최정의 최근 난조를 일시적인 현상이라 분석하는 분위기다. 한 바둑 전문가는 “올해 만 28세로 이제 서른을 눈앞에 둔 최정 9단이 과거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그렇지만 황룡사배 부진은 단기간에 일곱 판을 소화해야 하는 풀리그로 치러졌다는 점, 장소도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단 점에서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었을 수 있다”며 “한두 대회를 더 지켜봐야 확실하겠지만 아직은 최정 9단이 정상에서 내려왔다고 하긴 이르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여자바둑 판도가 과거와 같이 일인 독주시대가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는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했다. 남자바둑의 신진서 9단도 세계대회에서 애를 먹고 있듯 여자바둑도 AI의 등장으로 상향평준화되어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이야기다.
한편 패자로 밀려난 김은지는 패자조 4강에서 김채영을 꺾고 올라온 스미레를 상대하게 된다. 이제 열일곱인 김은지에게도 뒤를 밟아오는 후배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만큼 여자바둑계의 정상부가 촘촘해졌다. 김은지-스미레 전의 승자는 다시 최정과 결승3번기를 벌이게 된다. 갈수록 재미있어지는 최근의 여자바둑이다.
[승부처 돋보기] 2024 닥터지 여자최고기사결정전 승자조 결승
흑 최정 9단 백 김은지 9단 223수끝, 흑 불계승
#장면도1 ‘화려한 퍼포먼스’
대국 전 “제가 오늘 어떤 작전을 들고 나올지는 바둑판 위에서 확인해 달라”던 최정의 선택은 세력을 바탕으로 한 강공책이었다. 흑2는 화려한 퍼포먼스. 백3과 교환돼 실리로는 손해지만 다음 흑4의 변칙적인 협공으로 초반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장면도2 ‘엄청난 강수’
포석을 생략한 채 힘과 힘이 맞붙어 어지러운 형세. 좌하에서 패싸움이 한창인 장면. 백2로 팻감을 썼을 때 흑3 끊음이 선악을 떠나 엄청난 강수. 백6으로 좌상귀가 크게 잡혀 엄청난 손해를 보았지만 중앙 공격을 통해 주도권을 잡겠다는 게 최정의 의지다.
#장면도3 ‘백1이 패착’
중앙 백 대마 생사가 승부가 됐다. 흑A면 좌변 백도 잡힐 수 있는 상황. 여기서 시간에 쫓긴 백1이 패착이 됐다. 흑6까지 수습이 쉽지 않다. 따라서 백은….
#장면도3-1 ‘삶의 급소’
백1이 삶의 급소였다. 흑2라면 다음 백5까지 흑이 곤란해진다. 9까지 거꾸로 흑이 연결이 안 된다.
유경춘 객원기자